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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82화 (82/112)

〈 82화 〉 013. 우는 토끼 (6)

* * *

코트를 챙겼다.

“어떻게 돌아가시게요?”

“일단은 택시.”

다소 사치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경제능력이 늘어났다기보다는 그저 오늘만큼은 사람들 틈에 껴서 귀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과 싸운 기념으로 고등학생처럼 비유를 해보자면, 야자가 없는 날에 유독 나머지 청소에 걸려서 홀로 노을을 등지고 하교하는 기분이랄까.

음, 희한하게 와 닿는군.

그리고 그런 감상적인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택시를 탈 필요는 있었다.택시가 버스나 지하철보다는 안전하고 빠르게 돌아갈 수 있으니까.

물론 한월은 갈룸이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한다지만, 만약의 가능성이라는 게 있다.

가령, 그 덩치 큰 아저씨가 ‘잘은 모르겠지만 갈룸은 잠시나마 제갈랑의 자택에 있었다.’ 같은 무시무시한 조언을 던져줄 수도 있고.

아니, 사실 ‘만약의’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개연성이 매우 높은데, 그 높은 개연성이 부정되는 것은…….

“그 아저씨, 오늘 종일 연락이 안 된단 말이죠.”

“그게 참 찝찝한데.”

“그래요? 자주 있는 일이에요. 뭐, 하도 파계종 때려잡는 일에 골몰하는 사람이라서요. 파계지점 근처에서 죽치고 살게 되죠. 그래서 전파 문제로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러니까 한월 오빠한테도 연락은 못했을 거예요. 보세요, 지금도 신호가 안 간다구요.”

유는 묵묵부답인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튼 찝찝하니까. 수신은 안 되도 발신은 가능할 때도 종종 있고…….”

“걱정도 팔자셔. 애초에 둘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단 말이죠? 한월 오빠가 어떻게 랑이네 건물에 갈룸이 있다는 걸 알아냈어도 달려오는 데 35분 정도, 아까 오빠들끼리의 통화가 5분 전이었으니까…… 딱 지금 나가면 저희가 앞지르게 되겠네요.”

“지나치게 여유로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 무렵을 넘어서고 있었다. 노을이 끝나버린 거리에 푸른빛이 유령처럼 돌아다녔다.

약간의 허기를 느끼며 대로로 나갔다. 택시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랑에게 전화를 걸려 했는데, 유가 졸졸 쫓아왔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

“왜? 안 돌아가?”

“돌아가요? 어디로?”

“너희 사무실로 가야지.”

“미쳤어요? 지금 돌아가서 한월 오빠가 오면 어떻게 하라구요. ‘어서오세요~ 나가서 고생하시는 동안 일단 생포해두기로 했던 파계종은 멋대로 죽여버렸네요~’하고 웃는 얼굴이라도 보여줘요?”

“음, 하긴, 그러네.”

“무엇보다도 이건 팀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킨 거라구요. 저, 징계는 못 피해요.”

“나머지 멤버들이 징계 같은 걸 요청할 정도로 터프한 녀석들은 아닐 텐데.”

택시를 잡으며 말했다. 나는 앞자리에, 유는 뒷자리에 탔다.

그대로 랑의 자택까지 운전이 시작되었다. 15분 안에 도착한다.

막상 일을 끝내고 의자에 앉아버리니 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유가 징징거리는 소리를 내기 전까지는.

“아주 터프한 아저씨가 한분 계시거든요.”

“좀 뭐냐, 보수적이시지? 그분?”

“글쎄요,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다른 부분은 다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파계종 관련해서는 아주아주 엄격해지신다고 해야 될까요.”

“그거 너 아냐?”

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근데 오빠, 랑은 안전하게 두신 거 맞죠?”

“당연하지.”

“갈룸하고 같이 놨다거나.”

“내가 미쳤냐. 그 근처 경비단지에 맡겨놨어. CCTV도 잔뜩 달려 있어서 복도나 엘리베이터도 감시가 되니 갈룸이 탈출할 걱정도 없고.”

경비책임자분과 다소 마찰이 있었으나 주택 임대차 문서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그래요, 됐어, 듣자하니 돈 받고 일하신다면서요?”

“아, 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존댓말을 손으로 덮어 가렸다.

유가 피식 김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월급은 얼마 받느냐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로 빠져버리기 전에 나는 재차 휴대폰을 들었다.

화제도 돌릴 겸, 그쪽 상황은 어떤지 물어볼 겸, 랑에게 전화를 걸 심산이었다.

그러나 전화번호부로 들어가기도 전에 화면이 수신 화면으로 뒤덮였다.

역으로 랑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응? 누구예요? 설마 한월 오빠.”

“아니, 네 동생인데.”

가볍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수많은 무게추가 천천히 떠밀려와 나의 이야기에 얹어졌다.

어쩌면 이미 가볍게 끝나버렸다고 해도 무관했을 이 이야기는 마치 언제까지고 이어질 듯 무겁고 무겁게 막을 올리는 것이었다.

***

한월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한월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지 않았다. 대신 다소 당황한 얼굴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베 꼬마가 다가와 화면을 살폈다. 아무것도 아닌 바탕화면이 들어차 있었다.

마베 꼬마는 다시 한월의 얼굴을 바라봤다.

한월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이오?”

“모르겠어.”

마베 꼬마의 물음에 한월은 그렇게 대답했다.그게 마베 꼬마를 한월만큼이나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월은 형이라고 부르는 누군가와 다소 격앙된 어조로 언쟁을 나누더니, 이제는 자신이 무슨 통화를 나누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마베 꼬마가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라고 말하기 직전 한월은 반대로 마베 꼬마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무슨 말이오?”

“뭔가,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아. 형한테. 잘 모르겠어. 왜 그런 말을 하시는지…….”

“형이라니, 그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부터 말해보시오.”

“그게, 아, 그 붉은 길앞잡이에서 복무하다가…… 지금은 탈퇴한 형 있잖아. 한나진이라고.”

“누군지 기억나는군. 하지만 그 자가 왜? 제법 친하지 않았소?”

그 말에 한월은 대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친했거나 친하지 않았거나 하는 일은 이제 한월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 같았다.

지금에 이르러 한월의 관심을 끄는 것은 간혹 승도가 내뱉었던 말이었다. 무뢰한은 자주 한월에게 한나진이라는 사람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 친한지, 어떻게 알게 됐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월이 별 생각 없이 그 질문들에 답을 하면 무뢰한은 인상을 찡그리고 그 주제에서 다시 벗어나는 것이었다.한월은 그때부터 무뢰한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무뢰한은 그 이후로 한나진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아 그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지만, 지금 통화를 통해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떠오르게 된 것이다.

한월은 다시 인상을 구겼다.

한월과 나진은 사실 특별할 것 없이 친해졌다. 둘은 사무실 위치가 같았고 나이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아서 간혹 얘기를 나누었다.

길앞잡이 팀인 나진이 선진입 이후 빠져나갈 때 후발대로 들어오는 한월이 하이파이브를 권하는 정도. 그러다가 팀끼리 같이 밥을 먹거나 하면서 평범하게 친해졌다.

유의 동생이 위기에 처하고 그녀를 우연찮게 나진이 도와주기 전까지 나진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또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라서 한월과 엮일 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어째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 적이 없다’라고?

한월은 인상을 찡그린 채 생각에 몰두했다.

마베 꼬마를 안고 본부까지 달려나가는 것은 이미 잊은 뒤였다.

위압도 모두 걷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속해서 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한월을 보며 마베 꼬마는 말했다.

“Réveille­toi!”

마베 꼬마는 폴짝 뛰어 한월의 목 칼라를 낚아챘다.

그대로 끌어내리자 한월은 힘없이 가라앉았다.

마베 꼬마가 입술을 잔뜩 내밀고,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만 갈룸과 바니걸의 처리에 대해 논하는 것을 들었소. 서로 구상하는 계획이 다른 모양이지. 그리고 다르게 되었던 모양이지. 그러나 한월 공, 동요하지 마시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려는 일을 하는 것이오. 갈룸을 구하기로 했잖소!”

그러자 한월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 변화를 알아챈 마베 꼬마가 한월의 옷깃에서 손을 뗐다.

천천히 허리를 편 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나진은 이미 바니걸을 죽였을 것이고, 이제 확보했다는 갈룸을 죽일 차례였다.

한월은 또렷하고 빠르게 통화의 내용을 마베 꼬마에게 전달했다.

“무슨……. 그렇다면 갈룸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이오?”

“모르겠어. 그게 파악이 안 돼서……. 아니, 파악이 된다고 해도 인천으로 돌아가려면 30분은 더 필요해. 만약 저쪽에서 바니걸이 있는 곳에 갈룸까지 데리고 왔다면 이미 모든 게 끝났을 수도 있어.”

“다시 전화를 하시오. 막아야 해.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한단 말이오.”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모르겠어. 지금 그 형이랑 대화를 해도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지…… 차라리 유에게 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러는 게 좋겠소. 유 양이라면 사정을 전부 아니까, 말로 설득할 수 있을 거요.”

거기까지 확신하며 한월은 다시 휴대전화를 쥐었다. 빠르게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신 버튼을 누르기 직전, 띠링, 가볍게 문자 메시지 수신음이 날아들었다.

이 중요한 타이밍에 누가 저런 방해가 될 문자 따위를 날려보내는 거야, 하고 따질 법도 했지만 한월과 마베 꼬마 모두 그럴 수 없었다.

문자 메시지는 오늘 내내 연락이 닿지 않던 그 남자, 무뢰한으로부터 와 있었다.

문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현재 파계지점에 있다. 통화 수신이 되지 않는다. 문자도 수신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발신이 가능한지 또한 불분명하나 일단 전달하기로 한다.]

다음 줄로 이어졌다.

[이 중차대한 메시지를 한월, 오직 너에게만 전달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 배신자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마르그리트에게도 유에게도 재인에게도 전달하지 않고, 오직, 내가 가장 믿는 너에게 전달한다. 또한 전파 상태를 알 수 없으니 중요 대목을 먼저 전달하고 후술하는 식으로 전달하겠다.]

다음 줄로.

[먼저, 내가 말하는 배신이라 함은 두 가지 뜻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관리국 내부에 파계종을 추종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그리고 다음 줄로.

[둘째는 하젠야크트와 관련한 의미이다. 한나진이 유의 동생인 머즐드독스의 차녀 제갈랑의 자택에 갈룸을 숨겨주고 있었다는 정황이 발견되었으며, 한나진은 이에 대한 조사에 불응했다. 그리고 그를 조사하던 도중 특이한 보고를 받아 관리국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그 이후로 메시지는 몇 줄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나 한월의 눈에 그것들은 사로잡히지 못했다. 한월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달릴 준비를 했다.

송도 내부의 제갈랑의 사택은 40분 안에 도착한다. 지정력을 모두 소모해서라도 미친 듯이 달려가면 30분까지 단축할 수 있다.

어쩌면 시간을 맞출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월은 마베 꼬마의 무릎 밑으로 양손을 뻗었다.이곳까지 올 때 그러했듯 안은 채로 이동하겠다는 것이었다.

마베 꼬마는 한월이 한사코 거부하던 ‘공주님 안기’를 자청하는 것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헛웃음의 무게만큼 가볍게 한월의 양손을 아래로 내렸다.

“한월 공, 이것까지 스스로 짊어질 필요는 없소.”

“무슨 말이야. 지금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갚을 기회를 주시오.”

마베 꼬마는 한월과 함께 개통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발신자는 인천에 남아있는 유가 아닌 새카만 칼날들의 팀원이었다.

마베 꼬마는 간절하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그 사람의 번호를 그저 ‘재인 양’이라고 저장해두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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