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013. 우는 토끼 (4)
* * *
죄송해요. 제가 지금 정신이 좀 없어서…… 제대로 못 들었어요.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마 제대로 들었을 텐데.
제대로요?
제대로.
그렇지만 뭐지, 뭐라고 해야 되지, 형이 그 얘기를 어떻게 알고 있어요? 갈룸이라든가, 그런 거 지금 기밀이고, 관리국 안에서도 관리되고 있는데.
관리국에서 들은 건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됐다고 말해주는 거야. 갈룸이 지금 나한테 확보가 돼 있고 신사는 죽었고 바니걸은 유에게 있어. 정확히는 유의 팀 사무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조건이 다 갖추어진 거야. 때마침 유가 동의를 해줘서 그 아이가 확보한 바니걸을.
유요? 옆에 있으면 바꿔주시겠어요?
있긴 한데 이건 나랑 할 얘기잖아. 갈룸을 확보한 건 유가 아니고 나야.
네, 네, 그건 아는데, 잠시만요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혼란스러워요. 일단 형,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요. 갈룸은 확보할 대상이 아니에요. 갈룸은 그런 ‘용도’를 지닌 무엇인가가 아니고요, 무엇보다도 지금은 그런 방식은 필요가 없어졌어요.
왜 필요가 없어졌어? 무슨 말이야?
유가 곁에 있다면서요. 말 안 해줬어요?
말 해줬어. 그런데 지금 너희 플랜 대로 가는 게 효율적이지가 못하잖아. 그래서 내가 너희 동의를 구하는 건데,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 효율을 생각할 일이 아니잖아요. 저희는 지금 갈룸을 살리려는 방안을 찾고 있는 거고, 실제로 찾았어요. 유가 제대로 설명을 못 해준 거 같은데.
제대로 해줬어. 그리고 그렇게 설명을 해준 유가 판단을 내린 거야. 여기서 바니걸과 갈룸을 죽이는 게 낫겠다고. 갈룸은 일단 안전 문제로 내 근무지에 내려놓고 왔거든? 그래서 시간 상으로는 바니걸을 먼저 여기서 제거하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어떻게?
글쎄, 그건 너도 알다시피…….
형, 그 아이랑 말씀을 좀 나눠 보세요.
그 아이?
갈룸이요. 말씀을 나눠 보셨어요?
어, 응. 그래서 지금 내려온 결론이거든. 내가 이것도 너한테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걔가 지금 나쁜 의도를 갖고 우리한테 자기를 죽여 달라고 그러는 게 아니야. 너희도 지금 바니걸을 통해서 파악을 했다며.
아뇨,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제가 묻는 건 그 애를 왜 죽이겠다는 건지…… 형, 죽이는 거예요. 그게 어떤 건지 알고 계시잖아요.
알고 있어.
그래요. 당연히 알겠죠. 그런데 왜 그런 방식으로 가려고 하세요. 지금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어요.
일단 그건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부정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우선 첫째로 갈룸은 살기를 바라고 있지 않아. 그 아이는 자기 가치를 찾길 바라고 있어. 외견 그대로 어린아이 같은 상태고, 미숙한 판단이기는 해도…… 노력해서 내린 결론이 이거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어줄 수 있는 거.
형, 저 지금 형이 말씀하시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어린아이 같은 상태에서, 미숙한 판단으로 다다른 결론이 죽는다는 거잖아요. 왜 그런 식으로 자기 가치를 찾아요. 그럴 수 없어요. 왜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부정하면서까지 가치를 증명하려고 해요? 그런 건 곁에서 말려야 하는 거잖아요. 그 아이는 지금 자기가 뭘 하려는지도 잘 몰라요. 그 아이가 밤마다 우는 건 알고 계세요?
그게 두 번째 이유야.
어떤 게요?
나도 알아. 눈물 흘리는 거. 울더라고. 나도 당황했어. 왜 우냐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죽는 게 무섭대. 인간으로서 사람의 몸으로 느끼는 공포가 너무 저릿저릿해서, 그래서 자꾸 울게 된대.
그렇게 운다면, 형.
울면 달래줘야 한다.
예?
아니, 이런 거잖아. ‘울면 달래줘야 한다.’ 그렇지?
예, 뭐, 당연히…….
왜 달래줘야 해?
그게 무슨?
아니, 달래준다는 거 그런 거잖아. 네가 가진 욕심을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라. 이번은 그냥 넘어가라, 이런 게 달래주는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다른 사람한테 그런 자격이 있는 건가? 자기가 저렇게까지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데. 물론 그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지. 그렇지만 걔는 파계종이잖아, 기본적으로. 나는 갈룸이 자기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적도 없다는 말을 하는 걸 보고 확실하게 느꼈거든.
형,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부터 사람 같다는 거잖아요.
아니, 너는 왜 사람이 더 고귀한 거고 파계종은 더 저열한 거라고 먼저 구분을 하고 존재하는 모든 걸 각 카테고리에 집어넣으려고 하냐고. 고귀하면 사람이어야 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람이니까 사람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하고. 그건, 조금…… 강요하는 것 같은데.
그런 의미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 아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람처럼 남을 위할 줄 알아요. 그런데 그런 아이가 자기 자신을 자꾸 비하하고, 학대하니까. 희생할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게 그렇게 나쁜 거야?
나쁘죠. 절대 용서 못할 정도로. 저는 그런 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형, 저는 그 아이가 인간으로서 무슨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인간과 동등하게 행동하고, 무엇보다도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배우고, 나아가고, 발전할 필요와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멈추고 있으면 안 된다? 자기가 그러길 바라더라도?
적어도 그럴 기회를 줘야죠. 자신을 죽인다는 게 어떤 건지,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깨닫지도 못하는 녀석인데 그저 죽겠다니까 고맙다고 죽게 만드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형도 그런 사실을 다 알고 계실 텐데, 왜 그 아이가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거예요?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이기적인데, 그건.
이기적이라고요?
네 바람이잖아. 기회를 줘야 한다는 부분부터 네 가치판단이 담겨 있다고.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무엇이 옳다든가, 그런 너만의 판단이 담겨 있는 거라고.
저만의 판단이요? 그러면 형은 이렇게 생각 안 하세요? 저는 지금 제 개인의 바람을 담은 게 아니고 사람들의 상식을 담은 거잖아요. 사람들이 함께 바라는 ‘이기심’이요. 그러니까 저는 이기적이란 말에는 동의해도, 저만의 가치판단에 근거해서 움직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지.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헛 배운 게 많아서 말을 좀 못해.
그렇다면 형.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것하고 해야 하는 게 같지는 않잖아. 나도 솔직히, 이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어. 갈룸 그 녀석 괜히 가오 잡다가 죽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남아버려서 계속 이상한 말투로 떠들어대는 녀석으로 남았으면 좋겠고, 폴트나 그 누구냐, 마베 꼬마? 걔처럼 한국 음식 맛없다고 툴툴거리면서 외국인 속성 어필하고 그랬으면 좋겠고. 아무튼 그래. 나도 내 이기심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거 완전 이기적인 거고,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나도 너랑 똑같이 자기 바라는 거 많은 인간이야. 그런데 한월아, 우린 지금 각본을 짜는 게 아니야.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고. 우리는 추하고, 역겹더라도 가능하면 안정적이고 뒤탈이 없는 결말을 바라야지.
형, 지금 말 돌리는 거잖아요. 아까는 갈룸이 바라는 대로 해주자고 해놓고서는 이제는 갈룸이 바라는 대로 해주냐 마냐는 둘째로 치고 해야 하는 일을 하자고 말씀하시다뇨.
맞아, 미안. 말 돌리는 거 맞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 지금 쫌 추하다. 나도 내가 갈룸의 마음이나 의견에 동조해주고 있고 그 녀석을 이해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는데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 녀석에게 동조하고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는 것 같아. 이 부분은 내가 좀 제멋대로 굴고 있어. 그렇지만 말을 돌리고 제멋대로 굴어서라도 너희를 말려야 될 거 같아서. 왜냐하면 이건 우리 둘끼리 합의할 사항이 아니잖아. 너희 플랜이라는 거, 나도 유한테 다 들어봤어. 그리고 그 플랜에 대한 내 생각이 이래. 이건 너무 위험하다고. 너희 지금 엄청난 짐을 짊어지고 있는 거야.
짊어질 거예요.
그 짐을 떨어뜨리면 주변의 모든 사람이 깔려 죽어.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을게요. 지금까지 계속 그랬잖아요. 최선을 다하면 할 수 있어요. 지금 마베 꼬마도 도와주고 있고요, 관리국에서도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어요! 극본을 쓰는 게 아니라구요? 왜 극본을 쓰면 안 돼요? 최선을 다하면 최고로 멋진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사람들의 계산이나 속셈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진짜 제대로 된 결말이요! 뻔히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길이 눈앞에 있는데, 대체 왜 한 사람에게 불행을 몰아주려고 하세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예. 모든 사람이요. 정말 조금만 더하면 되는 건데, 이제 방법까지 다 찾아서 실천만 하면 되는 건데 그 위험성이 두려워서 지금 갈룸에게 떠맡기는 거잖아요. 때마침 갈룸이 온전치 못한 판단으로 자기가 죽겠다고 하고 있고, 그렇게 하면 갈룸 혼자만 불행해지면 되니까.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웃는 척하는 세계에서 살고 싶으세요?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해서 자기가 아파한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형은 그렇게 하실 수 있을지라도 저는 그렇게 못 해요.
있잖아.
예?
너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적이 없어.
그 전언과 동시에 통화는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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