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013. 우는 토끼 (3)
* * *
멍한 눈으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옛 사무실 건물이었다.
지금은 다른 길앞잡이들이 한때 나의 팀 이름이었던 ‘붉은 길앞잡이’라는 명패를 달고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더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장소에,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 완벽한 외부인으로서 사무실 건물을 바라보는 것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기묘한 기분이라.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로 공익이었군. 군대를 일찍 전역한 몇몇 친구들은 자기 복무 지역을 향한 채로는 오줌도 못 싸겠다고 욕지거리를 달고 살았는데.이렇게 태연하게 찾아올 수 있다니.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네모나고 특이한 물건이 손에 채였다.
꺼내보니 담배였다. 작년 겨울에 태우다가 남은 것이 오늘 간만에 꺼내본 코트 안에서 1년간 묵고 있었던 모양이지.
담배도 상하나? 싶었지만 그냥 피웠다. 술은 오래 삭히면 좋다고들 하니까. 금연 기록은 여기서 깨지고 말았다.
갈룸은 집에 두고 왔다. 여러 사유가 있었다.
우선은 의심을 피하기 좋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무뢰한 본인이 없다는 건 확인했다.
무뢰한이 관리국이나 자기 팀원들과 연락이 된다면 ‘제갈유, 네 동생네 집에는 없다는 걸 확인했다!’라는 식으로 전달하겠지.
무엇보다도 랑이네 집은 건물 하나가 통째로 랑의 관리 하에 통제되고 있으니 안심이다.
둘째로는 갈룸을 바니걸 혹은 다른 개체와 접촉시키고 싶지 않았다.
유는 신사가 죽었고 바니걸이 무력화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행동해서 나쁠 것은 없다.
어쩌다가 무력화 상태에서 벗어나고 갈룸을 빼앗은 채 도망가버리면 곤란하다.
마지막 셋째로는 너무 곤히 잠들어서 깨우기 미안했다는 것 정도.
이상, 홀로 유를 만나게 된 경위를 고백했다.
이제부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에 대해 얘기할 시간인데, 안타깝게도 그건 내 영역 바깥의 일이다.
아무래도 새카만 칼날들 팀에서는 상황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저는 감시 역으로 남아 있고요, 대신 한월 오빠랑 마베 꼬마는 지금 여기 없어요! 둘이 아공간을 찾으러 나갔거든요.나간 김에 관리국에 지원도 요청하고. 그렇지만 나 참, 대체 왜 그런 도박을 하려는 걸까요? 간단한 해결책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공간’은 무엇이며 관리국에 지원은 왜 받는다는 것일까.
일단 한월이 갈룸을 죽이는 해결책을 포기했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그래서 각설하고 말하자면 나는 새카만 칼날들 팀의 사무실로 입성했다.
저어어엉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내가 같은 건물의 다른 사무실에서 일했던 시절에도 새카만 칼날들 팀의 사무실에는 거의 와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간만에 내부 디자인에 관한 감상을 내놓자면……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구나 부르주아 놈들.” 정도.
“뭐가요?”
“아니, 그냥,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는 참 적응 안 되는 분위기였다.
붉은 길앞잡이 팀의 사무실은 원룸 정도 크기였는데 반면 이곳은 대규모 헬스장 정도의 크기였다.
굳이 헬스장이 비유에 사용된 이유는 정말로 헬스 부스가 있기 때문으로…….
“아, 저거는 승도 아저씨 거예요. 한월 오빠도 가끔 쓰던데 전혀 못 하더라고요. 게을러 빠져서.”
유는 내 시선을 따라가며 그렇게 말해주고는 했다.
뭐, 그래봤자 이곳의 시시콜콜한 단편 에피소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때마침 이야기가 나온 한월이인데.
“한월이한테 연락은 안 될까?”
“네에?”
교복 가디건을 벗으며 유가 되물었다. 이윽고 벗은 가디건을 내게 던졌다.
되묻는 것보다도 가디건이 이쪽으로 던져진 게 당황스러워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유가 깜짝 놀라며 가디건을 회수해 갔다.
유는 벌게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앗, 죄, 죄송해요. 원래 한월 오빠가 그 위치에 앉는데, 뭐야, 거기 앉으면 제가 가디건을 접어놓으라고 던져주곤 해서, 무심코 버릇이…….”
오빠들에게 그런 일진 같은 부탁은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유는 스스로 가디건을 개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유는 헛웃음 대신 헛기침을 몇 번 킁킁거리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더니 곧바로 진지한 톤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월 오빠한테 연락이라뇨?”
“얘기는 해봐야 할 것 같아서. 너희가 잡은 파계종이잖아. 그걸 죽인다는 거니까.”
“무슨 얘기를 해요. 아까 통화할 때도 말씀 드렸죠? 얘기는 제가 다 했는데 안 먹혀요. 그 오빠,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그렇게 너무 공격적으로만 나오지 말고…….”
나는 휴대폰을 빼들었다. 그러자 유가 손가락을 허공에서 쓱 휘둘렀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작이었으나 유는 염동력자였다. 휴대폰은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 유의 손에 착지했다.
유는 내 휴대폰을 자기 치마 위에 올려놓았다.
“한월 오빠와 통화하는 건 금지. 애초에 그 오빠는 오빠가 이 사건하고 관련이 있는 줄도 모르잖아요. 일만 복잡해진다고요. 제발, 오빠까지 왜 그래요?”
“상도덕이야, 상도덕. 그리고 한월이는 모르겠는데 너희 팀 그 덩치 큰 아저씨가 나중에 뭐라고 할 거 같아서 그래.”
“아, 진짜.”
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툴툴거렸다.
“통화해서 무슨 얘기할 건데요?”
“일단 사정을 설명해야지. 우리한테 갈룸이 있고 갈룸의 말이 타당한 것 같다고. 그래서 우리 쪽에서 너희가 확보한 파계종을 처리할 거고, 돌아가서 갈룸도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아…….”
유는 이마를 턱 짚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내 휴대폰을 쥔 채로 내 옆에 앉았다.
뭘 하려나 싶어 가만히 기다렸는데, 유는 휴대폰을 넘겼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면 어떡해요! 안 되겠어. 내가 옆에서 코칭을 해야지.” 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유는 내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가며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빠는 어휘선정이 너무 구려요. 센스가 없어. ‘우리 쪽에서 너희가 확보한 파계종을’ 같은 표현을 쓰지 말라고요. ‘유의 동의를 구해서 그 아이의 파계종을’ 하고 말해야 저쪽에서 주도권을 거머쥐지 못하죠. 게다가 갈룸 얘기는 왜 해요?”
“그렇지만 그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잖아?”
“빼요. 어차피 상대방도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거니까. 괜히 언급해서 감정적으로 확 달아오르게 하지 말라고요.”
“정말 그래도 돼?”
“이렇게까지 해도 어차피 안 들어먹을 테지만, 한월 오빠가 복장이 뒤집어지는 건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죠.”
유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꼭 처녀귀신 같은 모양새를 하고서는 유가 나를 째려봤다.
살려주세요, 라는 말을 하면 아마 정말로 살려두지 않을 것 같았다.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주자 유는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머리 상태를 되돌렸다.
그러고 보면 며칠 전에 파마 했다고 톡이 왔었다. 그때는 안 어울릴 거라고 답장을 했지만 막상 보니 제법 괜찮았다.
그걸 거론하며 말을 돌리는 수가 번뜩 떠올랐지만 나는 괜히 깝죽거리지 않고 다만 다음과 같이 물었다.
“한월이가 그렇게 못마땅해?”
유가 인상을 팍 구겼다.
재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제가 왜 그 인간을 미워하겠어요.”
“그렇지만 오늘따라.”
“오빠가 굳이 한월 오빠를 설득하려고 하니까 그러잖아요! 가만 보면 오빠 탓도 있다니까요!”
헛기침을 했다.
“양해를 구하는 거지. 나도 그 녀석하고 싸울 마음은 없어. 그렇지만 뭐랄까, 너 오늘 되게 스트레스 받은 거 같은데. 오히려 네가 싸운 거 같다니까?”
유는 고개를 도리질쳤다.
“진짜로 안 싸웠어?”
“싸워서 뭐 해요.”
“그럼 정확히 어디가 불만이야?"
유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이나 지나서, 침묵이 분위기를 모조리 잡아먹기 직전에야 유는 입을 열었다.
“그 오빠는요, 사람이 너무 좋아요.”
어느새 유의 손에 지휘봉이 들려 있었다.
“그렇지만 말이죠, 전 사람이 무조건 좋은 게 무조건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도 그럴 게, 좋은 사람이라는 건 가끔은 손해도 보잖아요?
그리고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눈앞에 닥친 문제를 못 보고 넘어가기도 하고…… 극기로 극복하면 된다! 라고는 해도 그게 안 먹힐 때를 생각해야죠.”
“그래.”
“한월 오빠는 너무 자기 좋은 방식으로 성공해왔어요. 손을 뻗으면 뜬금없이 거기에 자기가 바라던 게 있었다구요. 그래서 재인 언니나 마베 꼬마라든지 그런 사람들은 한월 오빠가 손을 뻗겠다고 하면 바로바로 믿어주지만…… 저는 그때마다 불안해요.
만약 이번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이번에도 저번처럼 요행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그래서 결국, 다른 사람들이 상처입거나, 아니면 한월이 오빠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면…….”
“무슨 말인지 알아.”
“진지하게 듣고 있기는 해요?”
“어, 응.”
유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긴 한숨이 이어졌다.
“그래요.”
유는 다시 내 허벅지를 두드려댔다.
“담배는 왜 또 다시 피웠어요.”
“어쩌다가. 그런데 어떻게?”
“냄새가 나거든요. 여자는 원래 냄새에 예민한 동물이니까. 여자친구 사귀고 싶으면 향수라든지 좀 사봐요.”
“어, 어, 네.”
“그리고 뭐야, 오빠는 제발 무리하고 그러지 마세요. 담배 포함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그럼 가봐요, 얼른. 나 완전 센치해졌어. 혼자 있고 싶어요.”
대답하지 않고 일어섰다.
물론, 내 휴대폰에는 한월의 번호가 없었다. 좋은 분위기 다 깨부수고 다시 돌아와 연락처를 물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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