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013. 우는 토끼 (2)
* * *
큰소리 떵떵 쳐놓은 것치고는 느리게 움직였다.내 대답을 듣자마자 갈룸이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녀석을 던지듯이 침실에 내려놓고 돌아오자 랑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자주 먹으면 안 된다고 경고해두었던 초콜릿을 까먹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언짢은 기색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다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직후 다치겠다는 약속을 해버렸다.
그 다음으로는 본인 언니가 싸우는 꼴을 보고 말았다는 건데.
“언니, 연락 닿았어.”
“응?”
랑이 휴대폰을 짐짝처럼 내던졌다. 소파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날아와 툭 떨어졌다.
집어들자, 아직 통화가 연결돼 있었다. 떠오른 상대방의 이름은 ‘언니’였다.
내가 영문을 몰라서 고개만 기울이자 랑은 턱짓으로 명령했다. 받아. 그렇게 했다.
깜짝이야! 무슨 일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유가 그렇게 소리쳐댔다. 휴대폰이 집어던져지는 바람에 저쪽으로 소음이 흘러갔던 모양이다.
잠시 사정을 설명했다. 전화는 내가 바꿔 받았으며, 방금은 그냥 휴대폰을 잘못 받아서 시끄러웠던 것이라고.
그 작은 소음마저 걱정했는지 유는 들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자매애에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야 했다.
몰라요!
겨우 묻자, 유는 그렇게 쏘아붙였다.
정신없어서 죽겠어요. 그보다 오빠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됐냐니? 나는 평소처럼 그냥 있는데.”
그럼 갈룸이 왜 거기에 있어요!
휴대폰을 떼어놓았다.
마이크는 물론 가렸고.
“야, 랑! 얘한테 말했어?”
“그럼 말하면 안 돼?”
그러게, 왜 말하면 안 되겠니. 네 집에서 네 시종에게 일어난 일인데. 토라진 톤이라 더 따질 수가 없었다.
스피커를 도로 귀에 갖다 대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걸 뭐라고 해명하면 얘가 믿어줄까? 그보다 얘는 어디까지 알고 있지? 전부 다 알고 있나? 알고 있겠지?
그도 그럴 것이, 유도 무뢰한과 마찬가지로 새카만 칼날들 팀의 일원이잖아.
게다가 갈룸과 동일한 존재라는 신사와 싸우고 있었고.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지, 알고 있느냐 어떠느냐는 사실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유의 스탠스다. 나는 갈룸을 도와주기로 했으니 녀석이 원하는 타이밍에 죽게 해줘야 한다.
무뢰한처럼 일단 죽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 문제는 차치하구요. 지금 제가 따지고 싶은 건 제 동생이 이 사태에 말려들었다는 건데요.
“아니, 그게……. 그게 말이지.”
그 지점을 놓치고 있었네.
변명은 됐어요. 대강 들어보니까 오빠가 자초한 일도 아닌 것 같고. 나 참, 왜 오빠까지 한월 오빠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엮이고 다녀요? 옮았어요? 옮았어?
“그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나는 이 상황에서 빠지려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에게도 하늘에게도 랑에게도 맹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말 불가항력적이었다. 갈룸의 설득은 너무 참신한 것이었으니까.
원래 사람이라는 건 감정적인 동물이라서 자기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지는 법이다.
물론 갈룸은 사람이 아니라지만, 지금은 사람의 몸을 얻었으니까.
단군신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곰과 호랑이 대신 토끼인 단군신화.
그나마 다행이지. 저빌이나 미어캣 같았다면 동화에도 신화에도 대입을 못 시켰을 텐데 전래동화에 수시로 등장하는 토끼라서 얼마나 좋아.
예, 예, 토끼라서 기쁘네요. 우리가 자라가 된 것 같지만.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뭐요?
그렇게 질문받자 망설이게 되었다.
나는 원래는 이 타이밍에 협조를 요청하려고 했다. 갈룸이 믿을 가치가 있는 녀석이라는 사실과 그래서 녀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유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뭐랄까, 아까도 언급했지만 이 녀석은 한월이네 팀원이다. 갈룸은 이미 한월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했다고 전해왔다.
한월의 성격을 감안하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문제는 유가 한월에게 동조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어차피 대장은 한월이고 구성원들이 그 녀석 의견에 크게 동조하는 측면이 없잖아 있다.
따라서 협조를 구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굳이 유에게 말할 것이 아니라…… 한월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한월 오빠요?
“응. 그게, 뭐랄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포기하세요.
“응?”
세 마리, 전부 죽이려는 거죠?
“어, 어?”
뭐지? 어떻게 알지? 내가 말했나? 나 그 정도로 입이 싼 녀석이었나?
아뇨. 그냥 오빠 속은 훤히 보여요.
“하지만, 뭐냐, 암만 그래도 죽이는 건데? 내가 그렇게 잔혹한 녀석으로 보여?”
전혀요. 그래서 오빠는 쉬운 길로 가려고 하잖아요. 안전한 길로. 완전 쫄보니까.
“허어.”
근데, 그거 알아요?
유가 은밀하게, 수화기 너머인 주제에 귓가에다가 속닥거리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이어나갔다.
저도 쫄보잖아요.
“갈룸을 못 믿잖아, 너는.”
네에, 당근이죠. 근거도 없이 누굴 믿어요. 하물며 파계종인데.
말 그대로의 정론.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유는 정말로 정직하게, 정론이 아니면 무엇도 논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쫄보라는 거예요. 갈룸을 지키자느니 하는 작전, 저는 못 펼치죠. 사실 작전 자체도 손아귀에 없구요. 아, 지금 마베 꼬마가 취조 중이긴 해요. 작전이 튀어나올 수도 있기는 하죠.
“무슨 말이야?”
그게 참,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저희가 일단 신사라고 불리는 개체를 제거했거든요?
“신사.”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 개체가 죽었다고 갈룸이 한참동안 괴로워 했으니까.
그런데 있죠, 거기에 더불어서 바니걸도 포획했어요. 포획이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포.
“바니걸?”
아, 모르시는구나. 다른 개체예요.
“뭐야, 그러면 세 개체가 다 확보됐단 말이야?”
신사가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는 그렇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진전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좋은 일이었다. 갈룸의 계획의 기초는 다른 누군가가 신사와 바니걸을 모두 죽여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것들이 어떻게라도 동시에 죽으면 직접 확인한 뒤 자신도 죽겠다는 것이었으니까.
신사는 이미 죽었고 바니걸은 생포돼 있다니. 모든 조건이 통제 하에 있다. 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튼요. 지금 저희가 그 바니걸이란 녀석을 심문하고 있거든요. 조만간 결과가 나올 거예요.
“결과라면, 어떤 결과?”
그건 두고 봐야 알 텐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거든, 나. 완전 혼자 노는 기분인데.”
실제로 맨날 혼자 놀잖아요. 바깥에 좀 나와서 살아요!
“아니, 그 얘기가 아니고.”
팩트폭력을 멈춰 주세요…….
됐어요. 말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한월 오빠의 바람을 실현시켜줄 멋진 작전이 떨어질지 아니면 제가 갈룸과 오빠를 믿어줘야 할 결정적인 근거가 튀어나올지 마베 꼬마가 밝혀낼 거라구요.
“네가 나서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한월이를 바꿔줘.”
어차피 안 먹힌다니까요. 게다가 지금 기껏 설득했다가 한월 오빠 마음에 드는 작전이라도 튀어나와 봐요.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게다가 말이죠, 왜 제가 나서면 안 되나요?
“너는 어차피 한월이네 팀이잖아.”
누가 정했어요, 그런 거.
“내가 정한 건 아니니까 나한테 따지지 마. 그렇지만 명확한 사실이라고. 너희들이 같은 팀이라는 건.”
팀 정도는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죠. 상황이 엎어지면.
허어? 파든 미?
“한월이랑 같이 움직이지 않겠다는 거야?”
몰라요, 저도. 요즘 싱숭생숭해요. 에휴.
“둘이 싸웠어?”
참견하지 말아요.
“아, 네.”
한월이 유하고 싸웠든 어쨌든 나까지 유와 싸울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한월이 오빠한테 전화할 생각도 말아요. 말해도 안 들을 거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빠가 가려는 길을 가로막아 버릴 테니까. 무슨 말인지 다 알죠?
“그래.”
그 시점에서 통화가 끊겼다.
한마디는 덧붙여주고 싶은데 하지 못했다. 한월의 전화번호는 이미 지워버렸고, 그래서 네가 아니면 연락할 방도도 없다고.
뭐, 또 그것까지 꼬치꼬치 따져댔을 테니 어쩌면 말하지 못한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니 랑은 팔짱을 끼고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첫 멘트를 뭐라고 해주면 좋을까. 근래 들어 매일 사과만 하다 보니 레파토리가 다 떨어졌다.
이번에는 역으로 지금까지 날 도와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타이밍 아닐까?
“고마…….”
“면제.”
랑이 손 안에 들린 휴대폰을 확 낚아채갔다.
“공익도 아까워. 면제. 5급.”
“어째서?!”
“다치지 말라는데 다치니까. 조만간 면제 받을 거야, 무조건.”
랑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침실을 가리켰다.
갈룸이 깨어났다는 얘기 같았다. 아니면 얼른 깨워서 둘이 손잡고 나가버렷! 하는 뜻일지도 몰랐고.
그렇지만 나에게도 갈룸에게도 계획이랄 게 없었고 따라서 나갈 일도 없었다.
때마침 신사가 죽었고 바니걸이 생포됐다고는 하지만, 바니걸은 새카만 칼날들 팀이 생포했다.
어쩌면 앞으로 며칠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직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유에게서 전화가 다시 왔기 때문이다.
어떤 식이었냐면, 이런 식이었다.
오셔야 해요.
특유의 가라앉은 톤이었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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