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011. 첫 번째 토끼 (4)
* * *
“우리는 그 파계종을 신뢰할 수 없다.”
무뢰한은 말했다.
“파계종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돕겠다는 발상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뭐, 한월은 그놈답게 그 파계종조차 구하겠다고 나섰고 나 역시 한월을 신뢰한다.
그러나 그건 그 파계종이 한월의 품 안에서 놀 때의 이야기이다. 상황은 뒤집혔고, 쇄도가 끝내지 못한 일은 무뢰한이 무뢰한의 방식으로 끝내겠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첫 번째는 무뢰한을 비롯한 관리국의 주장이 매우 타당했다는 것이다.
극히 드물게 파계종과 인간이 협력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시도했던 경험이 있긴 하지.결과는 대개 파국으로 치달았다.
드문 경우에서도 또 드물게 인간에게도 이로운 결과가 나타났던 적도 있긴 하다.그러나 그것은 전부 파계종의 입장에서는 일이 틀어졌을 때의 결과였다.
즉, 파계종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 인간이 이득을 보게 되었다, 라는 식이었다.
따라서 파계종과의 완전한 협력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론이다.
갈룸에게 유독 믿음을 줄 별다른 근거도 없는 와중에 그녀의 주장을 수용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럴 때 인간으로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그저 눈앞에 있는 파계종을 파괴하는 것이다.
자, 이제 내가 인정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이다.
그 사실이란 바로 내가 여기서 갈룸을 내어주고 싶지 않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물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에 내 개인적인 감상은 의미가 없고 사실 나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마음조차 없다.
다만,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까지 이빨조차 드러내지 않은 누군가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 생각들을 다 읽어 내렸는지, 무뢰한은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어린 여자아이의 외관을 하고 있는데 죽인다고 말하니 마음이 복잡하겠지. 이해한다. 우리라고 해서 내키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필요한 일이다. 어린아이의 허물을 뒤집어쓴 그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진짜 어린아이들이 죽는다. 그쪽도 나도 수십 수백 번은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나.”
알고 있다.
파계종이 왜 나쁘다고 말하는지 나도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눈앞의 남자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노나 증오의 방아쇠가 되기에는 충분하고, 나도 파계종을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 심정의 이면에는 무엇인가가 죽임을 당한다고 했을 때 지켜주고 싶다는 소망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늑대에게 연인이 물려죽는 경험을 했을지라도, 그 늑대와 정확히 같은 종인 어린 강아지를 보고 동정심을 품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다시 인정하는데, 지극히 감정적인 입장에서 나는 갈룸을 내어주고 싶지 않다. 그렇게 느낀다.
물론 나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내 의견을 내세워 이들의 이야기를 방해한다면 결국 이들의 이야기에 끼어드는 꼴이다. 이야기의 한 축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나는 내가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만 하는 선에서 모든 것을 다 했다.
당초 요구했던 대로 사정을 모조리 들었고, 그 사정은 그들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몇 마디 투덜거릴지언정 갈룸을 내어주는 것이──
“싫어.”
내가 입술을 떼기 직전, 랑이 내 앞으로 섰다.
그리고 분명 그렇게 말했다. 싫다고. 착각이라고 둘러대기에는 너무 뚜렷하고 분명한 어조였다.
또한 말을 내뱉은 대상까지 너무 확실했다. 랑은 무뢰한을 향해 말한 것이다.
무뢰한조차 자신에게 들려온 말인지 순간 납득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말이지, 아가씨?”
“싫다고 했어. 그 파계종은 내주지 않아. 당장 나가. 그리고 사과도 필요 없어. 현관문도 내가 수리할 거니까 다시 찾아오지 마.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무뢰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나 늘 보이던 겁많은 중학생의 랑은 어디로 갔는지, 랑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맞섰다.
그녀는 그대로 버티고 선 채 입술을 질끈 물기까지 했다.
무뢰한은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물었다.
“요구한 바를 모조리 행해줬다. 문을 부순 것에 대해 사과했고, 지정능력자가 파계종을 잡아가겠다는데 그것까지 막아 세우니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더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단 말이다.”
“어쩌라고.”
“당장 비키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는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지.”
“이쪽은 재력 행사한다? 관리국 해체해? 해체된 관리국 앞에서 S등급 떡볶이나 만들어 팔래?”
어린아이의 아집은 아니었다.랑은 그냥 어린애라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다.
물론 그 협박은 무뢰한에게 있어 두려움을 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뭐, 솔직히 말해 한국이 통째로 망해버린다고 해도 해외로 떠버리면 그만인 인간이었다.
S등급 지정능력자는 세계 각국에서 두 팔 벌려 환영받는 존재이고, 사실 무뢰한이 한국에 남아있는 것도 남아있어 ‘주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협박을 가했다는 것이 무뢰한은 신기한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어린아이를 밀치고 쳐들어가는 방식 대신, 조금 더 신사적인 방식을 취했다.
“죽이는 건 싫다는 건가?”
그는 목적어를 생략했다. 너와, 네 곁에 서 있는 B등급 지정능력자도 얼마든지 목적어가 될 수 있다는 것처럼.
그제야 랑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무뢰한은 그 광경을 보고 그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가씨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해는 간다. 하지만 틀렸다. 그 파계종은 어차피 죽음을 자청하고 있지 않나.”
“그 파계종은 당신들한테 당신들의 방식으로 죽임 당하는 걸 바라지 않아.”
랑이 쏘아붙였다.
그러나 무뢰한은 맹랑하다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랑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분명 그렇군.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 파계종이 자살지망서에 써낸 일자가 며칠 뒤틀리는 게 사람들의 안전보다 중요하다는 건가?
아가씨, 누군가가 아가씨와 비슷한 고집을 부렸다고 쳐보지. 그날, 바롱이 아가씨를 죽이러 찾아왔던 날 말이야. 그 대단한 것 없는 고집 탓에 거기 있는 친구는 아가씨를 지키러 가지 못했고, 아가씨는 죽었어.”
무뢰한은 이를 부드득 깨물었다.
“아가씨는 지금 그 파계종을 살리자고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야. 어차피 죽을 파계종의 기분을 조금 맞춰주자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잡아 죽인 거지.”
“극단적으로 말하지 마시죠. 바롱이랑 갈룸이 같습니까?”
“그럼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설명할 수 있나?”
많이 다르거든요! 하고 소리쳐주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랬다.
하지만 누구나 납득할 만한 심증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외관으로 판가름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태도를 본다고 쳐도 그게 연기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바롱조차 (자기 말로는)인류를 위해 랑을 죽이겠다고 했으니까.
그들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근거는 무수히 많지만, 그 반대의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직감에 몸을 맡기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지.
어쩌면 그 고집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는 무뢰한이 신사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과 같이 막타를 끊어대는 것만 빼면.
“아가씨, 아가씨의 언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본질적으로는 저쪽도 물불 안 가리는 아저씨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S등급은 처음 만나는 거 아닌가? 나야 뭐, 내 등급이니 기업과의 화합이니 아무 관심도 없지만 다른 S등급은 또 이야기가 다르단 말이지.
기업가들과 협상하고 어떻게라도 얼굴을 마주치려 하고…… 그런데 대체 왜 차기 총수라는 아가씨에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을까.”
“적당히 하십쇼.”
“아까 교육이라고 하지 않았나. 산타가 없다는 걸 늦게나마 알려주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지.”
“제가 교육합니다. 산타가 있든 없든 제가 알려주고요.”
그렇게 받아치자 무뢰한도 질렸다는 것처럼 칫,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라고 해서 어린아이 마음이나 꺾어대는 게 즐겁진 않아. 하지만 반복해서 말하는데, 이건 사람들 목숨이 달린 문제야. A+등급인 하젠야크트가 수작질을 부려대면 한두 명 죽는 걸로 안 끝나.”
“아, 예,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그쪽 말고 저기 계신 아가씨가 알아들었으면 좋겠군.”
거기까지 말하자 랑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힘만 있었다면 저 무뢰한이고 뭐고 뒤통수를 한 대 때려줬을 텐데 특별히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당성이 있는 것도 아니네.
내가 분을 삭이고 있는데 랑이 쪼르르 달려왔다. 울먹거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
아까까지 제법 강하게 나갔지만, 언니 얘기가 나오니까 바로 멘탈이 나간 것 같았다.무뢰한의 약점을 짚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거지.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랑이 물러선 시점에서 내가 뭘 어쩌겠는가
갈룸이고 나발이고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
랑의 멘탈을 추슬러주는 것만으로도 벅차거든…….
최근 담배를 끊었는데, 갑자기 확 치솟아 오르는 흡연욕이 뒷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구워 삼든 뭘 어쩌든 알아서 하세요.”
“고맙다. 그쪽도 세상을 구하는 데 일조한 거라고 쳐두지.”
알아서 하시라니까.S등급 소고기야, 제발.
이 시점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무뢰한의 말마따나 어차피 죽음을 바라고 있는 파계종이었고, 또한 그저 파계종이었다.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해도 관리국이 밝히고 한월이가 구원할 일이지.
그러니 그 어린아이 외관이라든가 고풍스러운 말투 같은 것은 그만 떠올리고 싶다.
더 떠올려대면 아마 그녀를 사람으로 인식해버릴 것 같았다.
마치 허물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뱀이, 그 허물 그대로 뱀인 것처럼……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있다면 인간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을 테지.
분명, 그렇지 않다.
그래도 나는 갈룸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베란다 쪽으로 갔다는 사실만 알려두고, 그곳을 향하는 무뢰한은 굳이 뒤쫓지 않았다.
잠시 뒤, 무뢰한은 혼자서 돌아왔다.
식어 있는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없어졌다.”
다시 말했다.
“돌아버리겠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