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010.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7)
* * *
모든 것이 끝났다. 뒤틀렸던 것들은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윌리엄과 멜라니는 배임과 횡령 그리고 집단살인 및 폭행 등등 온갖 혐의를 적용받아 구속 수사 중에 있다.
영국지사는 차기 지사장으로 선출되려는 간부진들의 물밑작업으로 바쁘다.
랑이 분전해준 덕분에 또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 여지는 막을 수 있게 되었고, 결국 큰 문제는 없다.
그보다도 오히려 본사 입장에서는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이 반전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지사들이 독자적으로 갖고 있던 권한 대부분이 본사에 회수되었으니까.
윌리엄의 만행을 알게 된 유럽 지부는 반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국을 비롯한 세계의 민간과 언론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채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윌리엄은 그저 횡령을 비롯한 몇몇 ‘있을 수 있는’ 죄목으로 기소된 기업가에 불과했다.
윌리엄이 세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대규모의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먼저 희생당한 300인은 파계종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보도된 그대로.
이는 나와 랑이 영국 경찰에 잠시간의 발표 유예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증언이 반드시 필요했던 그들은 일주일의 기간을 주었다.
그 일주일 동안, 랑이 치료를 받을 때에도 영국지사에서 이런저런 문제 처리했다.
그 와중에 틈틈이 언론에 소문을 퍼뜨렸다. 본사의 어린 딸이 정체불명의 목적으로 영국지사에 방문했다고.
그러자 언론은 아주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마침 자국 지사장은 구속됐지, 가업 계승자는 지금껏 언니라고 알려져 있었지…… 나 같아도 호기심이 솟구쳤을 일이었다.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을 모조리 거부했다. 대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중대한 사실을 발표하겠다.’라고만 정리해뒀다.
어그로를 끌어댄 셈이다.
그리고 그 짧지 않은 해프닝이 끝나, 우리는 공항에 있었다.
어그로는 성공적으로 중첩됐다.버밍엄 국제공항에서는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인근 유럽국가와 한국, 미국(머즐드독스 지분의 절반은 다시 말하지만 미국 소유다.)의 기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당초 아마 많아야 서른 명 정도 오지 않을까? 라고 기대했건만.
실제 현장에 나타난 기자의 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세 자리 숫자를 넘어서고 있었다.
오늘 발표할 내용이야 미리 정해놓았다.
랑에게 연습도 시켜놓았고.
하지만 뭐랄까.
“괜찮겠어?”
랑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고 그저 얼음처럼 굳어 있다가.
“어, 어? 어…….”
이런 식으로 속되게 말하자면 얼을 탔다.
“저기, 도저히 못하겠으면 그냥 내가 할게.”
혹시 몰라서 나도 연습을 해놓기는 했다.
그날밤 벌어졌던 상황 도중 랑은 이런저런 상처를 많이 입었다. 큰 멍까지 들었지.
지금이야 거의 나았지만 처음에는 의사가 입원을 권유할 지경이었다
랑은 지금도 볼에 반창고를 여러 개 붙이고 있다.
‘오늘은 너무 아프시대서 제가 대신 발표하겠습니다.’하고 내가 나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나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내가 해주는 수도 있다.
그러나 랑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래.”
천천히, 내 손을 잡아끌고 차갑게 식었던 손을 데웠다.
깨닫고 보면 어느새 깍지를 끼워놓고 있었다.
랑은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것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내 손을 자기 볼로 끌고 가놓고서는 말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배우는 것이 빠르고 남들 모르게 쑥쑥 크는 나이로군.
한가롭게 그런 생각을 했다.
***
안녕, 안녕하십, 꺄악?!
……으우, 읏.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안 도와줘도, 앗, 공익, 괜찮다니까! 혼자서 일어설 수 있어!
……….
하아.
흠, 흠.
안녕하세요, 머즐드독스 인더스트리 총무이사 및 한국 총주주, 겸 회장 제갈무의 차녀 제갈랑이에요.
웃지 마세요.
웃지 말라니까요.
………….
다시 시작할게요.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사안이 중대한 만큼 미사여구는 생략하고 바로 본제에 관해 논하겠어요.
오늘 저는, 윌리엄 맥걸린 영국지사 지사장에 관해 말하려고 해요.
모두가 그간 알아왔던 것처럼, 그리고 지난 일주일 전 기사를 접하고 존경하는 영국 국민들이 당황했던 것처럼 윌리엄 지사장은 성실하고 근면한 기업가였어요.
그는 권위 있는 주요 언론사와 자선단체에서 주관하는 ‘청탁 없는 사업가’ 상을 세 차례 수상했죠.
그가 재임하고 있는 기간 동안 실제로도 영국지사에서는 어떠한 불법적인 근무 현황이나 비리가 발견되지 않았지요.
많은 분들이 우려하시는 바와 다르게도, 윌리엄은 기만을 통해 이 상들을 수상하지 않았어요.
일주일간의 짧은 회계 감사를 통해 알게된 결과, 윌리엄 지사장은 실제로도 어떠한 형태의 불법도, 배임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그가 흉물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요.
……….
잠시만요, 잠시만, 셔터를 닫아주세요.
알아요, 충격적이시겠죠. 유럽 연합의 결의에 근거해 흉물의 행위는 불법 자경죄에 해당해요.
영국 자체의 법률에서도 위반의 소지가 컸어요. 그 부분에 관해서 우리의 생각도 여러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윌리엄 맥걸린은.
흉물로서.
런던의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
머즐드독스의 자산을 빼돌려.
불법적인 자선활동을 벌였다.
……….
모두 침묵하시는군요.
이 정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요?
아니면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마음에 걸렸나요?
다시 정정할 수 있어요. 윌리엄 맥걸린은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슈트를 장착해 안전이 인정되지 못한 제품을 무단으로 배포했어요. 런던에는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형성했고요.
이는 내란의 위험까지 초래하는 중대한 범죄였죠.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흉물을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가 체포되기 전까지 우리는 그와 몇 차례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경단원이 되게 되었는지. 그는 방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기업에서 빼돌린 것으로 자기 자신을 채우지 않았어요.
모두 남에게 나누어주었지요. 이런 양식의 범죄는 전에 없던 것이에요.
우리는 최소한 그를 이해하려고 했어요.
인도적인 측면에서라면 그를 도와줄 의향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거부했어요. 우리를 믿지 않았지요.
우리가 다소간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이제까지 누구도 바꾸지 못했으니까. 아무리 다른 누군가가 도와주고 손을 뻗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런던을 도와주길 바라지 않으니까.
설령 한 명의 흉물이 아니라 수백 명의 흉물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는 런던을 완전히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60억의 흉물을 원했어요.
……….
아니,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그는 흉물까지는 필요로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런던에서 파계종이 거의 가장 먼저 등장한 이후, 런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달라졌어요. 망한 땅. 멸망한 곳. 폐허.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런던에는, 이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렇게까지 많은 파계종이 나타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왜 런던은 버려졌을까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남아있는데도 왜 누구도 그 도시를 재건하려 하지 않을까요?
파계종이 나타나서?
아니라고 했죠.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다고 도시 하나를 포기하진 않죠.
런던은 개발할 가치도 없는 시골이어서?
헛소리죠.
……….
그렇다면 혹시.
필요 없기 때문에?
네.
그 도시 안의 사람들이 필요 없기 때문에.
……….
윌리엄 지사장은 자신의 몸을 쓰레기로 치장하고 가진 것을 모조리 내던진, 그래서 남은 살덩이로만 살아있는 성경 속의 어보미네이션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저, 사람들이 런던에 관심을 가졌으면 했지요. 그는 자신의 힘이 아무것도 아닌만큼, 사람들의 힘을 믿었어요.
인류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런던 안의 버림받은 고아와 핍박받는 난민들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어요.
그러나 누구도 인간답게 행동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간성조차 유지하지 못했어요.
그날 밤, 윌리엄이 체포되기 전날 밤, 살해당한 300명의 난민은 흉물이 죽였어요.
네, 윌리엄이, 죽였어요.
……….
………….
셔터를 또 터뜨리시는군요.
셔터를,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셔터를 닫아주세요. 한 말씀만 더 드리겠어요.
그날 죽은 300명의 난민은 그냥 난민이 아니었어요. 사실은 런던 내부에서 범죄를 일으킨 수형자들이었지요.
흉물은 평범한 난민이 아닌 범죄자들만을 골라 살해한 뒤, 살해당한 시신을 외부로 반출시켰어요.
무고한 난민으로 둔갑시켜서요.
……….
이번에는.
이번에는 아무도 셔터를 누르지 않으시네요.
……….
몰랐지요.
아무도 몰랐어요.
정부도 몰랐고 언론도 몰랐어요. 왜냐하면, 아무 관심도 없었으니까. 알 필요도 없고 알 가치도 없는 정보였지요.
무저갱에서 들끓는 버러지가 몇 마리인지, 그중에 기생충이 들러붙은 버러지가 몇 마리인지 안 붙은 버러지가 몇 마리인지 대체 무슨 상관이었겠어요.
그저 저 너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시체구덩이가 있고, 그뿐이다.
그것만 중요했겠죠.
그래서 모두 몰랐어요.
……….
그 사실을 윌리엄은 참을 수 없어 했어요.
아, 지금 기사를 써 내리기 전에 주의를 가해주세요. 저는 지금 윌리엄을 두둔하려는 게 아니에요.
죽은 300명이 범죄자건 살인마건 뭐건 죽여서는 안 되죠. 사형을 한다고 하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할 뿐더러 영국은 사형폐지국가예요.
애초에 이런 법률적인 문제를 제쳐놓고 윌리엄의 행동은 극단적이었고 파멸적이었어요.
그날, 그날 밤 윌리엄을 막아 세운 것은 제 수행인과 저였어요.
저희는 결코 윌리엄을 두둔하려는 게 아니에요.
…….
다만.
다만 왜 윌리엄이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말씀드리려고, 이 자리에 섰어요.
………….
그는 관심을 원했어요.
300명의 민간인이 어느 날 밤 파계종에게 몰살을 당했다는 끔찍하고 재앙적인 기사가 나타나면, 그때는 사람들이 일어서줄 거라고 믿었어요.
60억이 아니라 단 30억이라도, 아니 1억이라도, 5천만이라도 좋으니까…… 나타나 줄 거라고.
그래요, 윌리엄은 하나의 충격이 되고 싶어 했어요.
이 집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알려주기 위해 커다란 장롱 정도는 무너뜨릴 수 있는, 망치가 되길 바랐어요.
그게 그의 희망이었어요.
……….
저는, 그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은 숫자로 겨루는 게 아니에요. 인간을 등급으로 매기지도 않아요.
301명을 살리기 위해 300명을 죽이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고, 1등급 인간을 살리기 위해 2류 인간들을 도려내는 것은 짐승의 사고방식이에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윌리엄이 바랐던 이상향의 끝부분은 인정하겠어요.
그 말단이나마, 저는 그를 존중해요.
……….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런던에 있다는 소식이 처음 알려진 일주일 전, 많은 기사들이 있었어요.
어째서 장녀가 아닌 차녀가 왔는지. 이 어린 나이에 상속과 후계에 관한 다툼이 벌어진 것인지, 재벌일가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비난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그 비난의 화살은 이 문장으로 끝났지요.
‘차녀인 네가 가업을 이어가려는 것이냐.’
……….
네.
맞아요.
제가 이어갈 거에요.
아, 셔터는 닫아주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어갈 수 있다는 게 아니에요.
이어갈 거예요. 제가 이렇게 결정한 거예요.
어머니의 재가를 받은 게 아니라 지망하는 거예요.
일종의 장래희망, 같은 것이지요. 그래요. 저는 저보다 능력이 없는 언니를 대신해서 더 뛰어난 제가 머즐드독스를 이어가길 원해요.
그래서 이곳까지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로 한 거죠.
……….
처음에는 이 길이 맞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어요.
저는 세상 누구보다 언니를 좋아했고, 사실 기업 운영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공부도 잘 하지 못했고, 언니처럼 훌륭한 지정능력자인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처음에 이 짐을 떠맡겠다고 했을 때, 저는 그저 언니를 위해 대신해서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그 호의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하지만 런던에서.
이곳에 산재한 많은 문제와, 머즐드독스가 쌓아놓은 것들, 망가뜨린 것들을 보게 된 순간.
저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머즐드독스를 바꿔야만 한다고.
우리 회사의 사업방식과 분야를 이유로 비난하시는 많은 분들이 있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가 바꾸겠어요.
제가 바꾸겠다고, 제가 윌리엄과 같은 괴물이…… 흉물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겠다고 그렇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이 자리에서 감히 밝힙니다.
저, 제갈랑은, 머즐드독스의 차기 총무이사가 될 겁니다.
누구도 저의 꿈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막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을 짓밟아버릴 겁니다.
설령 그것이 제 언니라고 해도, 혹은 어머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 기업을 물려받아 머즐드독스를 제 손으로 이끌 겁니다.
더는 누구도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지 않도록.
……….
감사합니다.
…….
앗, 아코.
으읏, 아야야……….
………!
……야, 야! 안 도와줘도 된다니까!
………?
……아!
…………….
…………호,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
일장연설이 끝나고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 우리는 면세점에 들렀다.
한국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준데다가 오늘 연설에서 뜬금없이 거론된 유를 위해 가벼운 선물이라도 하나 사가지고 가자는 것이었다.
랑은 초콜릿을, 나는 향수를 골랐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우리는 총수가 줬던 그러나 분명히 정지된 카드를 긁어보았다.
부저음과 함께, 거래가 완료됐다는 메시지가 조용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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