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009. 그래서는 안 되는데 (7)
* * *
“의심의 계기는 이거야.”
텅 빈 맥주 캔들을 집어 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들을 포함해 폴트의 말마따나 딱 여섯 캔, 모두 그녀가 마신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검문소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폴트에게 보여줬다.
폴트는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스스로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쪽이 떠보는 중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슨 근거를 잡고 이러는 것인지 들어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들려주는 수밖에 없다.
“물자가 왜 이렇게 많지?”
물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이 지옥에서 술까지 마셔가며 건강하게 살 수 있냐는 거야. 아스페르를 포함한 난민들은 술이 아니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돌아다니고 있어. 이걸 도대체 어디서 구했지?”
“말씀드렸습니다. 흉물이 나눠준다고.”
“흉물이 어째서 이런 것들을, 어째서 이렇게 많이 나눠주는 건데.”
나는 방금까지 흉물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왔다.
그들이 방법론에 있어서 뒤틀렸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런던의 사람들을 구해내려 했다.
흉물을 이루는 한 사람은 회사와 스스로의 자산을 모두 이곳에 헌납했고, 다른 한 사람은 직접 괴물이 되어 다른 괴물들과 싸워왔다.
하지만 술이라니, 이해하기 어렵다.
술은 구호물자로서 의미가 없다. 설령 약간의 술이 추위를 잊고 푹 잠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독실한 기독교들인 그들이 굳이 술을 나눠줄 리가 없다.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다시 말하지만 아스페르는 술이 아니라 당장 살아남기 위해 먹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일단 가능성 첫째, 이건 흉물이 나눠준 것이 아니고 다른 루트로 네가 구해온 것이다.
가능성 둘째, 흉물이 정말로 나눠줬다. 너에게만. 술을. 유별나게 많이.”
폴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느 쪽으로 대답할래?”
“꼭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지 않아도 좋아.”
“그럼 않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의 발단은 이미 입에 올렸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엇이 이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드는지 알려줄 시간이다.
나는 다음 차례라고 생각해두고 있던 것을 말했다.
“멜라니는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지?”
“무슨, 말씀이신지.”
“시간 순서대로 나열할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는 이틀 전 저녁에 폴트를 만났다.
그리고 여차저차해서 폴트에게 ‘머즐드독스에 따로 알고 있는 친구를 불러 달라’는 부탁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나와 폴트 모두에게 영국지사에 연락할 수단이 없는 상태였다.
난민촌에서 운용된다는 공용 전화기는 파계종의 등장 탓에 이용하러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폴트는 분명히, 오늘 밤에는 연락을 취하는 게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결론이 떨어졌을 때 나는 아스페르를 구하기 위해 건물 바깥으로 나갔고 흉물과 조우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돌아왔을 때, 멜라니는 어째서인지 우리가 있던 건물 안에 들어서 있었다.
폴트에게는 파계종과 싸울 능력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우리가 시간을 재촉했던 것도 아니다. 그녀는 잠자코 기다리다가 파계종이 전부 사라지고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그때 연락소로 달려가면 되는 것이었다.
아니,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멜라니는 그곳에 있었다.
그날 밤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흉물이 멜라니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건 다시 말해서 폴트가 흉물을 불렀다는 것이다.
“이건 대답 안 할래?”
“못하겠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폴트는 흘끗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들고 계신 클로를 사용하시겠지요.”
“틀렸어. 아직 많이 남았거든.”
나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어떻게든 폴트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피했다.
피한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망친다고 해서 거기 남아있는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거나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는 이어서 말했다.
“흉물은, 그러니까 윌리엄과 멜라니는 내 물건을 하나 가져갔어.”
“물건을?”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러면 정말로 클로를 쓰고 싶어질 것 같아. 제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말을 해.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잠시 호흡했다.
“그러니 다시 말할게. 흉물이 내 물건을 가져갔어. 그렇지만 누구도 내가 그 물건을 갖고 있었다고는 알지 못했어. 심지어는 랑조차 몰랐지. 말 그대로 비밀병기 같은 거였거든.
그런데 갖고 갔어. 자연스럽게. 그냥 뭐랄까, 이미 모두가 내가 그 물건을 갖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물 흐르듯이 깔끔하게 가져갔다고.”
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침묵을 지켜주기 어려웠다.
“바롱의 눈알 말이야.”
말했다.
“내가 아스페르를 구하러 가기 전에 가방과 캐리어를 너에게 모두 맡겼어. 잠시 부탁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지.”
말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다음에 가방을 열었을 때 내용물은 온통 뒤섞여 있었어.”
이제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폴트가 말했다.
“제가 무엇을 위해서…….”
“나도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아!”
끊어냈다.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뒀어.
네가 도대체 어디서 술을 구했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그냥 안 물었어!
네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멜라니를 불렀는지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네가 맡아두고 있던 가방의 내용이 헤집어져 있었지만 나는 돌아다니며 흔들어댄 탓이라고 둘러댔어!
그런데 이제 물을 수밖에 없어. 랑은 납치됐고 그 미치광이들의 손아귀에 바롱의 눈알이 들어갔으니까.”
물었다.
“왜 그랬어?”
물었다.
“나를 친구로 생각하긴 했어?”
계속 물었다.
“아니면 친구라고 생각해서 이런 거야?”
그러나 거기까지 물었을 때 폴트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검문소 의자에 멍하니 앉아서 시선을 내린 채로 미미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애처로운 몸을 안아주고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게 하는, 어떻게 보면 실로 가엾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이 가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대답을 유보해주었으므로 이 물음의 답변만큼은 얻어내고 싶었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여기서 클로로 그녀를 베어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더는 알 수 없는 방해를 하는 것을 막아 세우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마지막 대답을 위해 머릿속에서 헤아리고 있던 남은 시간이 모두 사라져갈 무렵, 폴트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폴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제가 고용됐기 때문입니다.”
나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녀가 말하는 고용의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그것에 관해 묻자, 폴트는 자신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폴트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제 삶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폴트는 나에게 호소했다.
“아가씨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고용됐다면 주인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니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나진 씨가 안 계셨다면 작은 아가씨께서는 돌아가셨을 것이고, 큰 아가씨께서는 더는 어떤 인간도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 결과를, 제 삶의 지침으로 일해 온 그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반드시 그러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방식이 과연 틀렸던 것인지, 그 대답을 얻고 싶었습니다.”
폴트가 고개를 들었다.
엉망이었다. 그 예쁘던 얼굴은 취기까지 겹친 울음으로 인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그랗고 깊게 패였던 눈매에도 그저 눈물만 가득 고여 있었다.
폴트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고 저는 틀렸던 겁니다.”
말했다.
“제가 틀렸습니다. 주인의 명령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그 방식이 틀렸습니다.
또한 지난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그 지침 또한 틀렸습니다. 틀렸다면 부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당신 앞에서 잘난 것처럼 떠들기나 했습니다.
이렇게 못나고, 한심하고, 바보 같은 여자인데도, 저는, 그래도 당신이 제 말을 들어주는 게 기쁘다고 생각해서…… 그러면 마치 제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그래서 당신을 속이면서도, 혐오스럽게 저는 당신과 떠들어대며 즐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폴트는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저었다.
“저를 의심하신 것 이해합니다. 다 사실입니다. 저는 윌리엄 지사장에게 고용됐다는 이유로 당신의 가방을 뒤졌고, 멜라니와 결탁해 그 내용물을 훔쳐가게 만들었습니다. 당장 저를 어떤 식으로 벌하신다고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두 가지만큼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오직 이것들만큼은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폴트는 말했다.
“첫째로, 저는 지금껏 당신을 속여 왔습니다만, 그렇지만 지난밤 전화해서 런던의 소식을 들려드린 것만큼은 아무 저의도 없는 진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때 제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염치없고 터무니없지만 당신이 윌리엄을 막아줬으면 했습니다.”
이어서 폴트는 말했다.
“둘째로, 저는 정말로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났다.
폴트는 무엇이라고도 덧붙이지 않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말한 그대로 내가 어떤 벌을 준다고 해도 납득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다시 말하자면 부모에게 벌 받는 순간의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내게도 선택지가 생긴 셈이다. 여기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괜찮아괜찮아 잘 될 거야.’를 외쳐주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인격자가 아니었을 뿐더러, 만일 그랬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 여유가 없었다.
나는 폴트의 턱을 들고 나지막이 말했다.
“사과해.”
“죄송, 합니다아……!”
“나한테 하지 말고. 랑한테 해.”
푸른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네가 말한 이야기 다 알아듣겠어. 나도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거지. 나는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후회했고, 너는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잘못했다고 생각한 거야.그 애매한 태도가 우리 둘의 문제야.
하지만 나는 솔직히, 네 덕분에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해.”
뺨을 확, 붙잡았다.
“이제 동등하게 딱 한 번만, 해결할 기회를 줄게.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서 랑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해. 아니면 네가 응어리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해.
그렇게 해서 네가 이제는 자기 과거를 똑바로 노려보고 말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내가 너를 용서해줄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지금은.”
이것이 다른 모든 일들을 제쳐놓고 폴트부터 찾아온 이유였다.
“지금만큼은 나를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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