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52화 (52/112)

〈 52화 〉 009. 그래서는 안 되는데 (3)

* * *

그날 밤.

게스트하우스는 포기하고 외박했다. 안전상의 문제였다.

카드는 아직까지도 정지돼 있었으나 어떻게 잘 설명을 해서 영국지사 직원에게 숙박비를 빌릴 수 있었다.

랑의 애교가 도움이 컸다는, 수행인으로서 부디 감추어주어야 할 비하인드 스토리는 말하지 않기로 하고.

“아까 그, 뿌잉뿌잉 다시 해보면 안 돼?”

“시, 싫어!”

둘만 있을 때 얘기하는 건 괜찮다.

랑은 여러 의미에서 쇼크 상태였다.

일단 남한테 돈을 빌리는 구차한 경험이 난생 처음이었겠고. 그나마도 뿌잉뿌잉은 생각도 안 해봤겠지.

정말 놀라운 것은 뿌잉뿌잉이 영국에까지 통용된다는 사실이다. 혹은 랑이 해외에서도 먹히거나.

배터리 아낀다고 동영상 촬영을 하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으로 맺혔다.

“다시는 그런 거 안 해! 다시는 안 해!”

“그러지 말고 한번만.”

“안 한다니까!”

재벌 2세의 뿌잉뿌잉은 귀하다.

“그럼 일 더하기 일은 귀요미는?”

“그건…… 뭔데?”

다행히 이곳 호텔에는 충전기구가 있다. 내 휴대폰은 인터넷이 된다. 따라서 유튜브도 된다.

일련의 과정 끝에 랑에게 영상을 직접 보여주자 한참을 들여다보던 랑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소리쳤다.

“누가 이런 걸 해!”

의외로 남자의 로망이다.

세계정복. 거함거포. 카고바지. 폭발 현장에서 등 돌리고 탈출하기. 액체질소 퍼부어서 냉각시키기.

그리고 일 더하기 일은 귀요미를 직접 보기.

차마 부끄러워서 모든 남자들이 함구하고 있지만 실상 속으로는 누구나 바라는, 술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에 담아버리는 남자의 로망이야.

물론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함구하겠다.

“그래, 됐다. 그거 봐서 뭐하겠어.”

“벼, 별 이상한 걸 자꾸 해 달래. 뭐하는 것, 도대체에…….”

랑은 몸을 비비 꼬면서 그렇게 투덜거렸다.

거기까지 관찰한 나는 등을 돌려줬다. 서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호텔이라고 거창한 이름이 붙긴 했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여행객들을 위한 값싼 유스호스텔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여러 방은 없었다.

화장실이 있긴 했지만 넓지 않은 데다가 바닥에 물이 있어서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고.

어차피 하룻밤 자고 가는데 굳이 왜 갈아입느냐고 하면, 랑이 드레스에 가까운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랑은 잠옷이 아니면 특히나 잠을 못 자는 타입이다. 이것도 언젠가는 교정해줘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해외지사에 시찰을 왔는데 카드는 정지됐고 통신기능은 망가졌으며 지사에서는 내빈을 적대하고 있는 일상적인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지.

아무튼 다시 본제로 돌아와서, 랑은 침대 중앙에서 이불로 몸을 가리고 드레스를 벗은 뒤 꾸물꾸물 움직여서 잠옷을 입는다.

이쪽은 그러는 동안 뒤를 돌아보고 있고, 다 입었다고 하면 순서를 바꾼다.

얼마 걸리지 않고 랑은 옷을 다 갈아입었다. 암만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그러긴 창피했는지 뺨이 상기돼 있었다.

괜히 뭐라고 하면 민망할 것 같아서 말없이 나도 셔츠를 벗었다.

랑은 후다닥 침대 바깥으로 벗어나서 등을 돌렸다.

이쪽은 아래에 입은 슬렉스와 위에 입은 셔츠만 갈아입을 예정이었다.

상의부터 저렇게 도망갈 것은 없지 않나, 싶었다.

아무튼 도망까지 쳐주었으니 상의까지 갈아입기로 했다.

가벼운 티셔츠로.

그렇게 해서 윗도리는 완벽하게 편한 복장을 갖추었고 이제 바지를 벗으려는데.

“저기, 공익.”

랑이 나를 흘깃 불렀다. 내가 “왜?”하고 되묻자 랑은 깜짝 놀라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생각해보니까 그냥 화장실에서 기다리면 됐던 것.”

“어?”

그걸 몰랐네.

“어, 그럼 들어가 있어. 근데 거의 다 갈아입었는데.”

그렇게 말하거나 말거나 랑은 듣지도 않고 우다다 뛰어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옷을 다 갈아입었다고 부르자 랑은 우물쭈물 기어 나왔다.

랑은 오늘 있었던 중에서 최고조로 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갈아입었을 때보다도 더 민망해 하는 것 같았다.

녀석이 부끄러워하는 건, 솔직히 하루이틀 일도 아니건만 이번은 좀 유난스럽다.

이유를 묻자, 랑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운동해?”

“응?”

“그, 뭐냐, 운동 같은 거 해?”

허어?

잠깐 생각을 해보다가 대답해줬다.

“어…… 헬스장은 계속 다녔어. 파계종 때려잡는 게 이게, 체력적으로 엄청 힘들거든. 운동신경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 문제고. 그래서 생존형 운동을 했다고 할까. 그런데 그건 왜?”

“저기, 저기, 창문 쪽에 비쳐 보였어.”

랑은 그러면서 아까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때 바라볼 수 있었을 방향을 가리켰다.

그 말대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 그, 그그그, 공익, 그, 배에, 복근, 복근 있어서, 그래서…….”

“허어.”

“사, 살면서 처음 봤어, 남자 배, 근데, 근데 되게 괜찮았어. 막막, 연예인만큼은 아니었는데, 신기해서, 우, 우와아…….”

그렇게 꼭 펑!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던 끓어오르는 랑이 제정신을 차리기까지는 한 30분 정도가 걸렸다.

다만 다시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쪽팔렸거든.

잠시 두 사람이 말없이 휴대폰만 만지작거릴 때 특유의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같이 방을 쓴 적이 없다뿐이지 며칠이나 같이 생활을 해온 녀석인데도 불구하고 뭐랄까, 민망했다.

그러게 괜한 소리를 해 가지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40분이 지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벌써 새벽 1시. 무난하게 잠들기 위해서는 분위기를 풀어야 했고, 그 까닭에 나는 TV를 틀고 떠들어대야 했다.

“영어 뉴스네.”

랑이 움찔 떨었다가, 이쪽을 내려다봤다.

잠옷을 입은 채로 녀석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물론 바닥에 있고.

“공익은, 그, 밑에서 자?”

“너 일부러 사람 어색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랑이 이불 속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짧게 정리했다.

“그냥 TV나 보자.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고.”

“그렇지만 나 영어 모르고.”

“뉴스 앵커의 영어는 엄청 쉽지 않아?”

“전혀.”

“아니, 완전 또박또박 발음해 주잖아.”

“암만 또박또박 해도, 모르는 건 모르는 것.”

“그러냐.”

그렇지. 앵커건 아나운서건 무슨 소용이겠어.

아무튼 이번 사건이 잘 풀리고 돌아가면 무조건 영어 교육부터 시작하겠다.

결심하고 있는데 랑이 입술을 삐쭉 내밀고 중얼댔다.

“공익, 의외로 머리 좋아.”

“의외라니 무슨 뜻이야…….”

학벌부심을 부리는 것 같아서 좀 뭐하지만 이래 봬도 문과 대학 순위 거론할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 나왔거든.

주입식 교육의 승리자거든.

아직까지도 수능 영어듣기에서 어떤 유형으로 문제가 출제되는지 줄줄 외울 수 있거든.

“그치만 신기하구. 저기, 그럼 지금은 무슨 기사야?”

랑이 그렇게 말하며 화면 속을 가리켰다.

나는 잠시 가만히 보도를 들으며 자막을 읽어 내렸다.

“의로운 유치원 선생님이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화재현장에 뛰어들었대.”

“좋은 기사네.”

랑이 짧게 평가하는 순간 다음 기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랑은 ‘이번에는?’하고 묻는 표정을 했다. 다시 주의 깊게 듣고 읽었다.

“맨체스터의 시장이 자기 봉급을 남몰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줬다는, 그런 내용이야.”

“이번에도 훈훈해.”

“그러게.”

잡담을 나누는 동안 화면은 전환되었다.

그때 앵커의 표정은 아까보다 다소 굳어 있었다. 앵커는 영국 특유의 끊어지는 듯한 억양으로 속보를 읽어나갔다.

랑이 내 쪽으로 슬쩍 다가와 소리를 내어 “이번에도 좋은 소식?” 하고 물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랑이 내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저기, 휴대폰 떨어졌어.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겨우 입술을 뗐을 때는 그 기사가 나오고 몇 분이나 지난 뒤였다.

“런던에서 300명의 난민이 살해당했대.”

***

전화는 저쪽에서 먼저 왔다. 폴트였다.

­속보 보셨습니까.

무슨 속보를 말하는 것인지 서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뭐라고 답할 자신이 없었다. 수많은 물음들이 쏟아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너는 안전한 것인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느 하나도 나의 입에 오르는 일없이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폴트가 어렵사리 그 침묵을 깨뜨렸다.

­이걸 어떻게 말씀드리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살해당한 사람들은 전부 범죄자들입니다.

“무슨 말이야.”

그 질문에도 여러 의미가 있었다.

뉴스에도 나왔던 그 ‘살해’라는 표현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 범죄자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를 나는 묻고 있었다.

폴트는 양쪽 의미 모두를 알아듣고 각각을 답했다.

­오늘밤 이곳에 파계지점은 없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지정능력자들이 확실하게 느꼈고, 그 외에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가령 아스페르도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맞아, 그 아이는 괜찮아?”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아무튼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폴트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도 살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집단적으로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나진 씨의 말씀에 담긴 두 번째 물음의 답도 있습니다만, 살해당한 이들은 난민들 사이에서도 용납 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고 자치 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입니다.

그들 300명이 죽었습니다. 형무소 안에서.

폴트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사법기관의 손이 닿지 않는 할렘가라고 해도 모든 것이 용인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소간의 약탈은 수시로 벌어지고 그런 것은 처벌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쇄살인이나 강간, 방화 같은 강력범죄는 난민들끼리 자체적으로 조치를 취해 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밤, 형무소에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이 죽었습니다. 살해당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뉴스에서는 이런 자세한 소식이 첨부돼 있지 않았겠지요. 그들에게는 정보가 없습니다.

런던 바깥과 안은 격벽이라도 서 있는 것처럼 분리돼 있는데, 외교공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니 정보가 차단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요.

누군가가 내부에서 외부로 알려주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폴트는 제대로 확인하고 내게 전달하는 거야?”

­물론입니다. 제 지정능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상황만 갖춰진다면 그녀는 대부분의 지역을 원격으로 감시할 수 있다.

그녀보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 그런 건 모르겠어?”

­모릅니다. 현장이 너무 기괴해서 감이 잡히는 게 없습니다.

“기괴?”

­파계종이 저지른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아까의 말과 모순되었다. 그녀는 분명 파계지점이 없다고 했다.

내가 그 사실을 상기시키자 폴트는 꼭 고개를 끄덕일 것처럼 수긍하는 말을 내놓았다.

이윽고 이어나갔다.

­분명 그렇습니다. 파계지점은 없었고 육안으로 관측된 파계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체는 마치 몽둥이에 얻어맞고 짐승에게 베이고 찔린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유적 의미에서, 파계종이 저지른 것 같다고 한 겁니다.

“응. 알겠어.”

­알겠다니요?

“아니, 그냥.”

내일이면.

아마 내일이면 모든 게 끝이 나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짐작가시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나중에 말해줄게. 미안, 오늘밤은 너무 늦었고…… 잠도 제대로 못잘 것 같아서.”

­혼자 부담하실 필요 없습니다.

“혼자가 아니야. 랑도 있고, 또 위급하면 연락할 사람들도 많아. 게다가 폴트도 근처에 있고.”

이후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는 짧은 인사만 돌아왔다.

그 말의 의미가 머리까지 와 닿았을 때에는 이미 전화가 끊어진 뒤였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마 이런 식이었다. 미안, 거짓말이야, 연락처는 다 지워버렸으니까.

그리고 나는 늘 혼자 행동했어.

***

그리고 또 누군가가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존귀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천박하고 더러운 것들이야 얼마든지 세상의 덩어리로부터 도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

나는 그들에게 하루말미를 줬다.

영국지사에 연락처를 남겨놓았으므로 그들이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늦은 저녁에 버밍엄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보자고 했다.

그때까지 나와 랑은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할 일이 없으니 관광이나 하겠다는 심보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러 복잡한 사정을 종합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 사정이란, 우선 첫째로 우리가 사람들 틈에 껴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랑의 안전에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우리는 공공연히 돌아다니고 있어야 했다.

둘째는 그보다 간단하다. 지난밤의 참사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알고 싶었다.

도시 전체가 논쟁에 휩싸였다.

일일이 확인해보진 않았으나 말싸움이 오가는 범위는 영국 전역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300명의 사람들이 하룻밤에 떼죽음을 당했다는 점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한 보도당국은 이번 사태가 파계종의 소행이라 미루어 짐작했다.

이어서 침통한 표정의 앵커는 런던참사 당시를 제외하면 단 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지난밤 전까지 런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태어나는지 거론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이제까지 난민을 무시하고 있던 스스로와 정부 당국을 비난하는 말과 옹호하는 말을 쏟아내며 싸워댈 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아직까지 싸움보다는 평화와 추모를 원하는 목소리가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한국인인 나는 이런 형태의 재해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봤다는 것이다.

외출하며 짐을 몇 가지 챙겼다.

하나는 바롱의 눈알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장 난 건틀릿이었다.

기념품 가게를 들르다가도 내 눈치를 살피는 랑을 보며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오늘밤이 지날 때까지 나한테서 떨어지지 말라는, 그 경고만 되새기고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혹여 랑이 이렇게 입을 열 때는.

“저기, 있지, 흉물이라는 거…….”

“말하지 마.”

그만두게 했다. 랑은 움찔 떨고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밤은 머지않았다. 간단한 준비가 끝났을 때 우리는 이미 레스토랑에 있었다. 그곳을 전세 낸 윌리엄은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우릴 맞이했다.

그는 우리를 옥상에 있다는 근사한 테라스에 모셨다. 옥상에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점원은 테이블을 세팅하고 미리 주문된 음식만 배치한 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다.

티본스테이크와 음료가 나왔다. 모두가 논알콜을 마시게 된 것은 윌리엄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던 윌리엄은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운을 뗐다.

“[내가 시간을 벌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인가? 이렇게 서두르는 거?]”

그 말을 랑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랑은 뭐라고 지시하지 않고 나에게 맡겼다.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시간을 비틀어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대답할 걸세.]”

윌리엄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없었던 거 아닌가?]”

“[무슨 말이지?]”

“[과거형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내 영어에 문제가 있나?]”

윌리엄은 잠시 음료를 마셨다가.

“[영어에는 문제가 없지만 의도에는 문제가 있군그래. 과거형이라니?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이래도 되는 건가?]”

나도 모르게 호흡을 흐트러뜨렸다.

그 질문은 스스로도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내가,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게 물었다. 물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먹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이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그렇게 저질러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외치고 말았다.

그러니 뒷수습을 해야만 했다.

나는 큐브 형태의 건틀릿을 윌리엄에게 던졌다.

기계적인 소리를 내며 건틀릿은 윌리엄의 양팔에 휘감겼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엎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찾아올 점원들이 없었다. 윌리엄은 비명을 지르며 건틀릿을 뜯어내려 했다.

사용자의 의사에 따라 탈부착되는 기능이 있음을 고위간부인 그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건틀릿은 해제되지 않았다.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그 건틀릿은 고장 나 있었다.

장착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상태에서 해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제하려면 본사의 기술자들에게 갖고 가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나는 랑을 내려다보았다. 녀석도 나의 행동에 의문점을 품지는 않았다. 그녀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억울함을 외치는 것은 윌리엄 혼자였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윌리엄의 얼굴이 적색으로 달아올랐다.

“[내 자네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약간의 시간만을 달라 그렇게 구했는데!

그것조차 깡그리 무시하고 나의 친구를 이용해 나를 협박하더니 이제는 아예 폭력을 휘두르겠다는 건가? 자네들을 경멸한다고 할 수밖에 없겠네, 독사의 자식같으니라고!]”

“[윌리엄.]”

“[아무리 자네들이 본사에서 파견을 나왔기로서니 어떻게 이런 망령된 행동을 저지른단 말인가. 나는, 나는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하겠군.]”

“[윌리엄 맥걸린.]”

정적이 테라스를 휘감았다. 윌리엄의 충혈된 눈이 정지했다.

그것까지 확인한 나는 테이블을 바로 세웠다. 엎지른 스테이크와 음료를 어떻게 할 수는 없고, 또 마찬가지로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래도 나는…….

“[당신, 흉물이지 않은가.]”

직후 노신사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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