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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51화 (51/112)

〈 51화 〉 009. 그래서는 안 되는데 (2)

* * *

그들은 공손했다.

이것은 편집도 왜곡도 아니고 진실이다.

각 부서의 직원들이 실로 깍듯하게 우리를 대했다. 그들의 친절함에 두 가지 이유에서 놀랐다.

우선은 그들이 대접하는 우리가 갓 스물 넘긴 나와 이제 중학생인 랑으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 총수의 차녀라는 지위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암만 그래도 외면적인 신뢰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 직원들은 멜라니의 통역을 거칠 때마다 진중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곤 했던 것이다.

자. 여기서 이 친절함이 우리에게 있어 당황스럽게 느껴진 두 번째 이유가 드러난다.

그들은 윌리엄 지사장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횡령 관련해서 대강 운을 띄워줘.”

그렇게 멜라니에게 요구하자 멜라니는 “횡령, 무엇?”하고 되물었다.

기억나는 영어 단어로 바꿔서 불러주자 멜라니는 급히 안색이 나빠지더니 한참을 망설였다.

그래도 직원들이 대놓고 보는 마당에 통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멜라니가 내가 결코 구사하지 못할 격식 있는 영어로 내 질문을 바꿔 부르자, 직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몇 마디를 나눈 멜라니가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이 사람들, 아무것도.”

“전혀 몰라?”

“그래요. 당신, 이런 얘기 하지 않는. 직원들 믿고 있어. 윌리엄 경을.”

“그럼 당신은 어떻게 알아?”

“나는, 나는 다른. 이곳에서 일하지 않아. 이것은 사적인 영역.”

“그런 일을 사적으로 나눈다고? 당신들, 흉물을 부리고 있다며.”

멜라니는 인상을 구겼다.

“부리고 있지 않은. 그는 그저, 우리에게 협력해요. 우리와 하나. 뜻이 있어요.”

“아니 그런 사정이야 어찌됐든…….”

나는 둘 사이의 영 좋지 못한 기류를 감지한 다른 직원들을 흘끗 쳐다봤다.

“됐다. 내가 여기서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냥 랑에게 시키는 게 낫겠네.”

랑을 돌아봤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멜라니를 불렀다.

멜라니 또한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랑은 지시했다.

“직원들한테 전해. 당신들 사장, 자금을 빼돌려서 범법자를 지원했어.”

“불가능.”

멜라니가 기겁을 하며 받아쳤다.

그리고 영어만 쓸 수 있었더라도 온갖 욕지거리를 단박에 뱉어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온갖 모독을 한국어로 전환하지 못해 애가 탄다는 것처럼 끙끙거렸다.

분명 하얗게 변했을 머릿속에서 한국어를 끼워 맞춘 멜라니가 나직이 말했다.

“당신, 사과해야 하는. 당신, 나를 정말 화나게 했어.”

“자금을 빼돌린 건 사실이야.”

“그건 아무래도 좋은!”

그 목소리는 문법적인 잘잘못을 막론하고 격앙됐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나, 흉물에게 구원받은. 윌리엄 경, 내 삶 지켜줬지만 흉물도 나를 도와줬어. 그러니, 아니야, 법을 어겼다느니, 제멋대로 지껄이지 말아요.”

그러나 랑은 저런 정의론을 갖춘 언니를 집안에 두고 1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하물며 유가 설파하는 올바름은 지금 멜라니가 품은 그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이었다.

랑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그러나 멜라니의 감정이 더 자극되지는 않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영국, 흉물의 활동을 규제한다고 하고 있어. 당장 체포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불법. 이건 내가 흉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냐. 그냥 불법이라는 거지. 그리고 이건 중요한 일도 아냐.”

“……이해하는. 그러나 나, 정말로 화나는. 흉물에 관해 함부로, 그냥 말하지 마.”

“알았어.”

가까스로 진정한 멜라니가 경고했다.

랑은 잘못했다고는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일단 끝을 맺었다.

슬슬 정체불명의 언어로 오가는 언쟁에 당황한 다른 직원들이 ‘[저기, 혹시 싸우시는 건가요……?]’하고 말을 걸어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랑은 아까의 전언을 그대로 전하게 하되, 멜라니의 의사만 조금 반영해주었다.

“당신들 사장이 자금을 횡령해서 쓸 수 없는 곳에 썼다고 전해.”

결국 멜라니는 그렇게 전했다. 직원들은 얼굴이 납빛이 되어 랑과 멜라니, 그리고 나를 번갈아보았다.

그러나 셋 다 특별히 위로해줄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마저도 랑은 내뱉은 압박을 이어갈 뿐이었다.

“계속해서 전해. 우리들, 당신의 사장을 처벌하기 위해 왔어. 총무과와 경리부, 경영지원팀과 구매부서 혹은 관리부서를 포함한 모든 회계 업무와 관련한 담당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리겠다고 전해.”

멜라니가 이어지는 말을 결코 그러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전했다.

“근 2년간의 지출 및 매매 내역을 전부 갖고 와.”

고압적이고 전문적으로 지시하는 랑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가 겉만 어린애 같고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녀서 그렇지 머리는 좋은데다가 업무적으로는 꽤 괜찮은 녀석 아닌가.

아마 그 생각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어, 어땠어? 나, 나나나 괜찮았던 것?”

직원들 다 빠져나가고 그렇게 묻지만 않았어도 말이지. 이 바보야.

***

2년간 쌓인 서류의 분량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나와 랑을 비롯한 대화의 당사자들이 머무르던 응접실의 벽 한구석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유사공익으로 1년을 일하며 서류처리도 자주 맡아봤지만 이런 광경을 본 기억이 없었다.

굳이 있다면 쓰레기장에서 서류뭉텅이를 보았을 때, 딱 그때가 지금과 비슷한 조망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랑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지시적인 어투였다.

“엄마한테 받아온 서류, 대조해서 날짜랑 관련 문서 찾아.”

“아, 네…….”

직원들이 들어오니까 다시 업무 모드로 돌아왔군.

이쪽도 비슷한 모드를 작동시킬 타이밍이다.

휴대폰에 저장해뒀던 이메일 문서를 쓱 끄집어냈다.

여전히 통화만 안 되는 상태라서 다행이었다.

총수의 이메일 문서에 따르면,재작년 초에 금속을 대량으로 구매한 사실이 있었다.

또 작년 중반부에 금속과 상세불명의 물품을 잔뜩 구매했으며, 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뭔가를 ‘구매’했다고 명시된 것만 따진 것이다.

언론통제나 단순 모금을 비롯한 기록을 포함하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잦은 구매사항이 적혀 있었다.

이 문서를 지사의 실물 서류와 대조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이 부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사 직원들과 함께 자료를 찾아댔다.

거의 10분도 되지 않아서 본사에서 문제 삼는 모든 기록을 대조할 수 있었다.

이때, 지사의 서류에만 희한한 지출 내역이 더해져 있었다.

“사업확장.”

영국지사는 윌리엄이 말한 것처럼 사업수완이 좋았다.

아니, 그보다는 터가 좋았던 것이겠지.

런던참사 이후 국력의 대부분을 파계종 대응에 투자하는 영국이었다. 그곳에서 장사하니 오죽 경기가 좋게 느껴지겠는가.

거기에 윌리엄은 직원 통솔에 있어서는 깔 대목이 없었다. 직원들에게 서류에 관한 어떤 것을 물어도 그들은 상세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오로지 한 가지 항목을 제외하고.

“사업확장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전해줘.”

멜라니는 통역했고, 영국 직원들은 난처하다는 얼굴을 했다.

멜라니는 곧 그들의 답변을 되돌려주었다.

“그들, 모르는. 알지 않아요. 알 수 없는. 이것, 윌리엄 경의 독단.”

“그렇지. 그리고 이 ‘사업확장’의 액수가 우리가 갖고 온 자료의 부족한 액수와 거의 일치하고.”

엄밀히 말하자면 대략 몇 퍼센트 정도씩 차이가 있었다.

일부러 만든 차이인 듯했다. 돈세탁을 했다는 증거 내지 조세회피 시도의 흔적이겠지.

거기에 더해 이 사업확장에서 쓰이는 금액은 지사장이 독단으로 판단해 사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움직였다.

달에 몇 억 정도, 딱 그 정도로 드러나지 않게 운용해 왔다. 수치는 요동치지 않고 잠잠하게 자산을 잠식했다.

랑은 한참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다시 멜라니에게 말했다.

“이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전해.”

멜라니는 또 한참을 고민하다가 전했다.

직원들은 빠른 영어로 억울하다는 의사를 전하고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랑은 멜라니의 말을 듣고서야 다음과 같은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들은 모르는, 이러한 서류, 윌리엄 경이 작성해, 그분, 단 한 차례도 택스를 내지 않거나 피하지 않아. 나쁜 일, 직원들에게 조금도 하지 않아, 그래서 그들,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는.”

“그래? 공익, 어떻게 생각해.”

멍하니 서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이 사업확장 부분 빼면 완벽해. 내가 영국 조세제도는 모르겠지만 세금 부분까지 정확하게 기재를 해놨고 다른 군더더기는 없어.”

“좋아.”

랑은 멜라니에게 돌아섰다.

“야, 흑발 외국인, 여기 사람들이 윌리엄을 믿어?”

흑발 외국인은 멜라니를 부르는 표현이었다. 멜라니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랑은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럼 이제 사장실 가서 책상 까봐.”

그 지시가 이루어지는 것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멜라니가 말한 것처럼 이곳 직원들은 전부 ‘우리 사장님은 정말 대단하고 선량하고 결백한 분이셔요!’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에 오기가 생겨서라도 어디 한번 사장실을 까보자는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정갈한 서재 뒤에 몇 장의 서류가 감추어져 있을 거라고는.

“여기, 이게 원본이네.”

사업확장(Business Expansion)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 대신 금속성 물질(Metallic Materia)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

여기서도 총수로부터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어떤 금속인지 나타나 있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문서 위조는 문서 위조다.

굳이 윌리엄에게 유리한 점을 찾자면 아주 최근에 작성된 문서만 발견됐다는 것인데.

“잠깐 뒀다가 파기한다 이거지.”

“하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윌리엄 경, 당신들이 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도 미리 찢어 없애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내역서는 필요해.”

랑이 말을 끊어먹었다.

멜라니는 얌전히 듣기 시작했다.

간접적인 상급자에 대한 경의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방의 수를 알아야 자신도 맞받아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윌리엄 지사장, 금속을 구매했어, 그리고 가공했어. 그렇지만 회사 명의의 내역서가 없으면 가공품을 통제할 수도 없고 업자와 연결되지도 않아. 이건 이쪽 업계 상식.”

“하지만, 그렇지만.”

“런던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배포된 물건들, 전부 브랜드가 없는 제품들이었어.”

랑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가전기구, 전자장비, 아니면 통신기기, 그런 것들. 삼성이나 다른 데서 구매할 수 있는데도 그게 간편한데도 그렇게 했어. 왜냐하면 정체를 들켜선 안 되니까.

그런데 기업에서 생산한 것은 코드가 남고 그걸 역추적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방금 말한 삼성의 경우, 굳이 흉물의 정체를 숨겨줄 필요가 없으니까 구매자를 공개해달라고 요구 들어오면 그냥 공개해.

하지만 윌리엄이 비밀리에, 사적으로 수주했다면? 그러면 제작자도 윌리엄인 셈이니까 제품 코드 자체를 부착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설령 붙어 있다고 해도 추적이 안 돼.”

랑은 다양하고 복잡한 사실들을 재빠르게 말했다.

인상을 구기고 듣던 멜라니가 대꾸했다.

“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 복잡한 사정 이해하지 못하는.”

“너 얘 무시하면 나한테 맞는다.”

내가 경고했지만 멜라니는 받아쳤다.

“저것, 어디까지나 열다섯 살 어린아이의 사고에 지나지 않는. 사적으로 맡긴 기업이라고 해도 정부에서 공개하라고 하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야.”

“그건 변명이잖아. 어쨌거나 이런 방식으로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과, 금속 구매와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아니, 공익, 아닐 수도 있어.”

랑은 잠시 손을 들어 나를 저지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흉물의 슈트도 금속이니까.”

멜라니가 인상을 구겼다.

랑은 그 반응을 즐기듯 나지막이 물었다.

“지사장, 어디에 있어?”

“쉬고 있는 것으로, 그렇게 아는.”

“오늘 같은 날 사장실을 비우고? 흉물에게 지시 내리고 있지 않아?”

“당신, 함부로 말하지 않는. 이거, 엄청나게 중대한 사안인 것이야. 직원들 중에 이 대화 기억했다가, 집에 가서 한국어 사전이라도 들고 오면, 그러면.”

“그러면 영국 경찰이 당신들 집에 찾아가겠지.”

이상한 협박을 거듭하기에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었다.

“일단 증거는 찾았어. 대화하는 사이 휴대폰으로 찍어놨지.내 이메일 계정에도 첨부했고 구글드라이브에도 저장했으니 없앨 방도는 없어.

그리고 혹시 몰라서 아는 동생한테 내가 2시간 안에 연락 안 하면 영국 경찰에 보내라고 파일까지 보내놨고.

참고로 그 동생이라는 사람은 머즐드독스 총수 장녀인데, 여기 있는 이 꼬마애보다 까다로우니까 뭐 어떻게 해볼 생각하지 말고.”

심지어는 용돈도 언니가 더 많이 받는다 회유가 먹힐 가능성은 더 낮지.

가격차가 차 한 대 값이라는 것은 생략하고.

“어떻게 하겠다는, 그런?”

“그건 비밀인데.”

멜라니는 미간을 좁혔다.

“당신들, 나 멍청이가 아닌. 당연히 신고하겠지요, 지금 당장. 그야, 실적 필요하니까.”

“그렇게 멋대로 생각할 거면 물어보기는 왜 물어봐?”

뭐, 사실 신고할 생각이 맞긴 하다.

하지만 저쪽에서 우리를 어떻게 할 방도는 없다.

나는 정말로 유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까지 받았다.

‘?? 이게 뭐예요?’하는 내용이었다.

굳이 답신하지는 않았다. 파일 열어보면 스스로 알겠지.

다른 가능성을 따져서, 설령 멜라니와 윌리엄이 이성을 잃고 우리를 아예 적대한다면 어떨까.

흉물이 직접 나타나면 좀 불안하겠지만 랑을 안고 도망칠 여력 정도는 있다.

버밍엄에는 나 말고도 지정능력자들이 많으니 아주 기습만 당하지 않으면 괜찮다.

“랑, 좋은 생각이 있는데 다음 지시는 내가 내려도 될까?”

“어떤 거?”

“들어보고 싫으면 철회해도 돼.”

랑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분위기에 웃는 건 나쁜 버릇이라고 일러두는 건 제쳐놓기로 하자.

나는 다시 멜라니에게 선언했다.

“내일까지 빼돌린 자료를 전부 갖고 와.”

“무슨?”

“원본은 어쨌거나 윌리엄에게 있겠지. 없다면 뭐, 이 이야기는 없는 걸로 쳐도 돼. 경찰이 찾아오면 수색이 이루어질 거고 그때 가서는 들통 날 테니까. 그러니 이건 말 그대로 원본이 있을 경우 다 갖고 오라는 얘기야.”

“원하는 것이 무엇?”

“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실적이 필요해.”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총수에게 가서 보고하고 오라고?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 없어. 질질 끌지 않을 거야.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둘게.

우리는 우리의 입맛대로 너희를 처벌하고 그 지점에서 종지부를 찍어버린 뒤에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적당히 귀국하면서 티를 내서, 기자들을 모은 뒤 여기서 있었던 일 전부를 까발릴 거야.

이 사태를 진정시킨 게 전부 랑의 공으로 돌릴 수 있도록.”

“당신, 미쳤어요.”

“미치지 않았어. 이건 랑도 만족하고 총수도 만족하고 나도 만족하는 동시에 유까지 만족하는 최선의 방안이야.”

멜라니는 그 대답을 듣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러면 당신 요구대로 해서 우리가 얻는 것, 그것은 무엇인?”

“우리가 이곳 사법기관과 본사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조치를 취할 거라는 것.”

말했다.

“유와 약속한 게 있으니까 처벌 자체를 내리지 않는 건 말이 안 돼. 대신 아주 조금이라면, 그 녀석도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정선이라면 지켜주겠어.”

“나, 윌리엄을 위험에 빠뜨리는 물음, 그런 물음에 답할 수 없는.”

“답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에 빠져.”

랑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얹었다.

“그러니까 내일까지 기한을 준다는 거야. 둘이 상의를 해도 좋고 멜라니 너 혼자서 문서를 빼오든 뭐 어떻게 하든 좋아. 나는 그냥, 너희에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거야.”

“할 수 있는 일.”

멜라니는 곧 끊어질 것 같은 연약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서는 뭐랄까. 동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결정해도 좋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별로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다시 멜라니에게 몇 마디를 얹으려는데 랑이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

“잘했어.”

“아, 예.”

매달리지 마라. 바깥에서 직원들이 볼라. 뭐라고 생각하겠니.

눈빛으로 압박하자 랑은 헛기침을 하며 떨어졌다.

민망함을 돌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랑은 멜라니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할 것?”

멜라니는 답을 결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피어났다.거의 죽어가는 사람 같았다.

윌리엄에 관해서 나쁘게 말한다든지 혹은 그에게 좋지 못한 무엇인가를 전달한다든지 하는 것 자체가 멜라니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인 듯했다.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멜라니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좋은, 그래요, 당신들 오늘은 쉬고 있어요.”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 답을 내리기는 싫어?”

멜라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리고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그런 이야기.”

멜라니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의 일은 거기까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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