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008.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5)
* * *
“[오빠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복잡하다.]”
“[말투는 원래 그렇게 딱딱해요?]”
“[내가 딱딱하게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영어는 어설프게 배웠다.]”
걸어가며, 꼬마아이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사용하는 어휘는 분명 한국의 중학교에서도 배울 수 있을 법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억양이 이상하게 꼬여 있고 간혹 알 수 없는 단어를 섞어댔다.
느낌적으로는 아랍어 같았는데 실제로도 그런 모양이었다. 꼬마는 부모님은 없으나 함께 살아온 ‘가족’이 있다며, 그들에게서 말을 배웠다고 한다.
아랍권 난민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가 이 녀석을 내쳤고, 비슷하게 고아가 된 아이들끼리 뭉쳐 다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 고아 집단이 녀석의 지금 가족이고.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특별히 굳어진 이름은 없는 듯했다. 자기는 머리카락에 금색이 많이 섞여 있다고 주로 ‘아스페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이 아스페르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여기에도 추측을 가하기 위해 몇 가지를 더 물어보니, 아스페르를 비롯한 고아집단은 아스페르라는 단어 자체를 ‘노란색’이라는 의미로 쓰는 것 같다.
뭐 그냥 납득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아스페르는 곧 있으면 11살이 된다고 자랑스레 떠들었다.
“[제가 가족들 중에서는 세 번째로 나이가 많아요.]”
“[세 번째? 몇 명이 있나?]”
“[총 여덟 명이요. 15살인 아크디르 언니가 제일 많구요, 저보다 한 살 많은 아흐마르 오빠가 그 다음이에요.]”
아크디르와 아흐마르도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분명 영어는 아니다. 어감으로 봤을 때 아스페르보다 훨씬 아랍어처럼 느껴지는데, 아마 자기들끼리 그렇게 이름을 짓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내셔널 갤러리(폴트와 나, 랑이 있던 곳)를 뒤로 돌아 직진해서 나아갔다.
가급적 위험을 회피하고 숨어 지내자고 결심했던 내가 억지로라도 이 녀석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이유가 여기 있었다.
아스페르가 말하는 자기 가족들의 집은 여기서 고작 걸어서 5분에서 10분 거리라고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녀석을 업고 도망치는 것 또한 가능하니, 사실 위험부담은 제로라고 할 수 있겠다.
길을 앞서는 아스페르를 보며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어린아이들끼리 사는 건 어렵지 않나?]”
“[으음, 그럴 때도 있어요. 예를 들면 저희는 엘키바르를 만나지 못해요.]”
또 이상한 단어.
“[엘키바르?]”
“[그러니까, 큰 사람이요.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어른?]”
“[아, 그랬던 것 같아요. 맞아요. 저희는 어른을 만날 수 없어요. 아크디르 언니가 못 만나게 해요. 무서운 어른이 많다고 하면서요.]”
“[어째서?]”
“[어른들은 자주 저희 같은 고아들의 물건들을 빼앗아가요. 그렇지만 빼앗기면 저희는 죽을 수도 있어요. 굶거나, 병에 걸려서요. 그래서 절대로 뺏기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해 다녀요. 그나마 아크디르 언니가 나이가 많아서 다행이에요. 언니가 하라는 대로 하면 보통은 안전해요.]”
“[그렇지만 오늘은 위험에 처했다.]”
“[구호물품을 구하러 다녔어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아스페르에게 물었다.
“[어디서 구했나?]”
“[어디에 있을지는 몰라요. 보통은 헬기에서 밑으로 뿌려요. 절반은 국제단체에서 뿌리고요, 나머지 절반은 흉물이 줘요.]”
“[그렇군. 그런데 이상하다. 구호물품은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네. 엄청 모자라요. 그래서 여덟 살이 넘은 아이들은 각자 물품을 구해와요. 저는 도망치다가 다 잃어버렸지만요.]”
아크디르에게 혼날지도 모른다고 아스페르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폴트에 관해서.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폴트의 건물 안에는 풍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원이 넘쳐났다.
오죽하면 식객인 나와 랑에게 제한 없이 이런저런 식량과 생필품을 나눠줄 수 있을 정도였다.
폴트는 여기에 관해서 흉물이 갖다 준다는 식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아스페르의 말과 다르다.
물론 흉물이 ‘아무 곳에나’ 갖다 주면 폴트가 그걸 주워 다닌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다.
같은 양의 물자를 발견해도 어른인 폴트가 훨씬 더 많이 소비할 터였다. 그 와중에 어린아이들이 모자람에 겨워 여기저기 쏘다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곳의 난민이나 고아 중에 백인도 있나?]”
“[네? 없어요.]”
“[없다고?]”
아스페르가 너무 깔끔하게 대답하자, 나는 조금 당황해서 되물었다.
“[전혀 없다는 뜻인가?]”
“[네. 한 사람도 못 봤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야 백인은 런던 바깥으로 나가도 생활할 수 있잖아요. 굳이 여기 머무를 이유가 없겠죠.]”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과정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나와 랑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런던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런던 안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조차 그리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이 아이들은 파계종에 의해 갇혀 있는 것보다는…….
“[아크디르 언니는 예전에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요. 이곳에서는 움직이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지만, 런던에서는 움직이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그렇다면 폴트가 안락하게 생활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나가서 물자를 구해다 온 것이다.
어째서 흉물이 가져다준다고 의미도 없는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군.
뭐 아마 농담으로 했던 소리겠지.
오히려 그보다는.
“[이해했다. 더 말할 필요 없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영어로 바꾸는 그 복잡한 과정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을 때, 나는 솔직히 후회스러웠다.
“[내가 해야 할 일만 끝났더라도 어떻게든 도움을 줬을 텐데.]”
그건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놀리는 듯한 말이었다. 만약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어떻게든 뱉어버린 것을 수습하려고 입을 벌리고 있을 때였다. 아스페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야 저는 여기가 좋은걸요. 가끔은 오늘처럼 무서운 일들도 있지만, 아무튼 제 가족은 여기에 있잖아요.]”
마침내 아스페르의 인도에 따라 그녀 가족의 거주지에 도달했을 때, 아스페르가 방금 뱉은 말은 거짓말이 되었다.
아스페르의 가족은 그곳에 없었다.
아니, 관점을 달리하자면 지금 말한 문장마저 거짓명제였다.
더 명확하게 말하건대 아스페르의 가족은 그곳에 있었다.
그저, 죽어서 있었을 뿐이다.
나는 아스페르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어린아이였다. 랑보다 어렸다. 제대로 공부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는 랑보다도 배운 게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스페르는 누군가의 죽음을 수용할 나이가 되지 못했다.
지금의 아스페르에게 어울리는 것은 키우던 개가 죽는 정도의 슬픔이지 온가족이 몰살당하는 그런 형태의 슬픔이 아니었다.
아스페르는, 천천히 난자당한 시신으로 다가갔다.
완전히 정지했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내가 아스페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소녀는 마른 나무처럼 뻣뻣하게, 그리고 가볍게 정지했다.
아스페르는 살며시 나를 돌아보았다.
아직 무엇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물 없는 얼굴로 물었다.
“[아흐마르가 없어요.]”
아스페르는 호소했다.
“[오빠, 아흐마르 오빠가 없어요. 아흐마르 오빠가 여기에…….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니에요. 그렇죠? 아니죠?
여기 있는 사람들, 아크디르 언니도 아니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보세요, 여섯 명이잖아요. 근데 우리 가족은 여덟 명이고…… 아흐마르 오빠는 없으니까…… 응.]”
아닐 거야.
아스페르는 거기까지 말하고 쓰러졌다.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그것이었다.
***
“사람이 그랬어.”
목구멍을 긁어내리듯 나도 모르는 나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터들이었다면 그냥 먹어치웠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목이나 배를 그었고, 그렇게 죽인 거야. 스컬터도 그런 부위만 의식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아. 이건 파계종이 저지른 짓이 아니야.”
“그렇군요.”
폴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모르겠어.”
나는 머리를 감싸 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짓을 저지른 놈들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어. 그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야. 적어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됐어. 거기 있는 아이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녀석이 15살이랬는데.”
“그게 문제였던 겁니다. 최고 연장자가 15살이라는 건, 그만큼 약하다는 뜻이지요.”
“폴트, 정말 미안한데 네가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도 듣기 싫을 정도야.”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이 내셔널 갤러리의 이성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와는 다르게 단정하게 앉은 폴트가 그렇게 말했다.
“저는 현재 매우 지저분하고 문란한 상태로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성적입니다. 영국 틀딱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브렉시트에 찬성했을 정도로 이성적이지요.
뭐, 파계종들이 갑툭튀해서 브렉시트고 나발이고 다 엎어졌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요지는 난민이라고 다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어떤 의도로 하는 충고야?”
“한나진 씨와 제갈랑 양은 현장 진행요원이 아니고 결정권자라는 겁니다.”
폴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가계신 동안, 말씀드린 영국지사를 모시는 친구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사실을 들었습니다.
한나진 씨와 제갈랑 양 두 분께서는 현재 영국지사에서 펼치는 구호물품 구입을 틀어막기 위해 오셨다지요.”
“폴트, 그건 총수님의 의사야. 우리의 의사는 달라.”
“그러니까 결정권자라는 겁니다. 총수님께서 말하는 그대로 받아 적을 거였으면 영국지사의 도움은 끊겨도 총수님과의 연락망은 남아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겁니다. 결정권을 당신들이 마음대로 휘두를 것이다, 라는 것.”
폴트는 앉은 채로 나를 직시했다.
“총수님의 의사에 반하듯 말든 그런 것은 이제 제 알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의 영국인으로서 당신들이 영국의 이전 수도를 살릴지 죽일지 판단하는 데에 참견할 자격 정도는 있습니다.
아니, 사실 이런 대의명분보다도 한나진 씨가 여기서 찌질거리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따름입니다.”
“폴트.”
“당신들은 거대합니다. 한나진 씨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모시고 계신 아가씨와, 그리고 그 아가씨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당신은 거대합니다.
그러나 한나진 씨께서는 아직도 자신이 작은 줄 아시지요.”
“네 말은…….”
“눈앞의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데에 골몰한단 말입니다.”
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는 흉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 작자는, 뭐하는 인간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게 당연도 합니다마는 당최 이해가 안 갑니다.
뿌려대는 물자의 금액을 따지자면 상당한 권력이 있을 텐데도 직접 나서서 사람을 구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영웅이 살릴 수 있는 숫자는 아무리 많아도 하나의 시스템이 살릴 수 있는 숫자보다 적습니다.”
“네 말이 맞아.”
“그런데도 한나진 씨께서는 왜 흉물이 걷는 루트를 따라 걷습니까.
혹시 뭐, 그런 포지션이 부러웠습니까? 박한월 군처럼 소녀 하나 지키겠다고 달려드는 히어로가 동경의 대상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나는 재인을 봤고,그 아이의 말에 반박했다.
정면으로 돌파하지는 못했을지언정 후면으로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렇지만 그건 내가 걸어갈 길도 아니고 걸어갈 수 있는 길도 아니야.”
“그렇군요.”
폴트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 지점은 화내시는 타이밍이었습니다. ‘내가 부러워하긴 누굴 부러워해! 나 놀려?!’ 하고 따지셨다면 좋았을 것 같군요.”
“그런 랑이랑 끝난 얘기잖아. 나중에 의논하자고.”
“지금 하면 안 됩니까?”
“곤란해. 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결정권자라서 여유시간이 없어.”
“그 말을 납득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납득했어.”
나는 상쾌하게 말해줬다.
“내가 잠깐 미친 소리를 해도 좋을까?”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영국 틀딱이라 미국놈들 애니메이션은 싫어합니다만. 그러니 미친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아냐. 할게. 한번 안아 봐도 될까?”
“싫습니다.”
“그런 컨셉이라고 생각했어.”
나도 지금의 너는 땀 냄새가 심해서 별로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자 폴트는 다시 가볍게.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우선 아스페르를 좀 맡아줘. 엄청 상처받았을 텐데, 나는 어린애 돌보는 걸 잘 못해.”
“또 부탁이군요. 애초에 가족을 다 잃은 어린아이를 내칠 정도로 모진 인간은 아닙니다, 저는. 그러니 본인 청사진이나 말씀해보시죠.”
“그 지사장을 모시고 있다는 친구, 당장 만나게 해줘.”
“갈 겁니까?”
“응, 가야지.”
“그렇군요.”
폴트는 묘하게 탄식 섞인 듯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 친구라면 이미 왔습니다. 한나진 씨가 모시는 분과 놀고 계시지요.”
“어, 진짜?”
“옆방으로 가보시는 게.”
“알았어, 진짜 고마워.”
“뭘요.”
방문을 열고 나가자 싸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두런두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처음 듣는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어 있는 듯했다.
***
저는 어차피 주인 등쳐먹는 년 아닙니까.
시녀였던 년은 중얼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