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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42화 (42/112)

〈 42화 〉 007. 난리들 났네 (6)

* * *

검문소가 두 곳이나 마주쳤지만 특별히 제지받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알아듣기 어렵게 영어로 된 자랑을 늘어놓았다.

택시고 뭐고 자비없이 세우는 그들이 오늘따라 융통성 있게 굴어 줬다는 수다가 이어졌다.

나는 길게 들어줄 용의가 없었다.

말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랑을 깨웠다.

“으응…… 한 시간만 더어…….”

여전히 잠에는 약하다.

이런 타입에게는 알아서 깨도록 시간을 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지. 그냥 어깨만 툭툭 흔들어가며 가벼운 재촉만 이어갔다.

그리고 그 대신, 진짜로 어떻게 깨워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녀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너도 여기 있었지…….”

말 많은 택시기사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게 수다를 떤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원래 수다 상대가 없어졌다는 것.

그러나 우릴 안내해준다던 바니걸이 잠든 사이 어딘가로 사라졌을 리는 없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함께 잠들었던 것이다.

“허어.”

나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바니걸의 뺨을 쳐서라도 깨울 작정을 하고 앞좌석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뭐랄까, 자는 모습은 그냥 여자구나, 싶어서 감탄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체불명의 인터넷 용어를 마구 섞어가며 떠들어대던 경박한 변태는 어디로 가고 새근새근 잠든 소녀만 남아 있었다.

멍하니,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습윤한 빛깔의 입술과 위로 올라오는 하얀 볼. 어느 지점부터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음침하기는 하지만, 또 그게 매력이 된다고 반박할 수 있게 만드는 긴 속눈썹.

오르내리는 숨결의 냄새가 끼쳐오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곳에는 나와 잠든 소녀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인 남성도 하나 껴있다.

“[여기서 세우면 됩니까?]”

“[예, 예.]”

조심스러운 어조. 슬슬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건 파악한 모양이다. 좀 쉽게 물어주는군.

그 친절함만큼이나 길을 읽는 실력도 뛰어난지, 우리는 어느새 트라팔가 광장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야. 런던으로 향하는 승객도 많이 없었을 테고, 그보다도 자기 스스로가 런던으로 들어오기 싫었을 텐데.어떻게 이렇게 흔쾌히 차를 몰아주었을까.

그 호의는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하고.

“[우리는 내리겠다. 이 여자가 지불한 것으로 안다. 감사한다.]”

아, 영어 더럽게 어렵네.

그러거나 말거나 친절한 택시기사는 불평도 불만도 없이 으쓱 목례했다.

이어서 소녀 둘을 깨우려는 것을 만류했다. 내가 먼저 내려 반쯤 깬 랑을 업고 내렸다.

그러는 동안 뒤를 돌아보니 바니걸은 벌써 정신을 차리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택시는 머지않아 떠났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거리!”

“16년 전에는 그랬을지 모르겠네.”

한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언젠가 가득했던 문명의 열기가 식어 내린 듯한 시가지의 잔해.

몇몇 건물은 부서져 내렸고 다시 몇몇은 간신히 뼈대를 유지하거나 멀쩡하다.

그 멀쩡한 것들이 주는 이질감이야말로 이곳이 버림받았다는 내용의 비문처럼 남아, 돌아가라는 경고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16년 전에는 이곳이 번화가였을지 모른다는 표현은 수사법이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런던은 세계 3대 도시로 불렸고, 당시 런던의 경관은 아직까지도 사진으로 남겨 있으니까.

“딱히 여기서 관광을 하고 싶은 건 아니야.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 거처를 구하고 싶을 뿐이지. 말했던 대로 폴트나 만나게 해줘.”

“여유가 모자란 사람 같으니☆ 하지만 뭐, 저라고 해도 이딴 곳에서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런 복장으로는 30분 안에 임신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구요!”

“어린애 들으니까 하지 말랬지!”

아직 비몽사몽간이기에 망정이지!

내 배에 얼굴을 묻은 채 꾸벅꾸벅 조는 랑의 귀를 막으며 소리 질렀다.

“농담입니다, 농담. 어차피 더럽혀질 순수니까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끼면 아낄수록 닳아 없어질 때 슬픈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제가 생명을 사랑하는 만큼 함부로 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괴롭다, 괴로워…….”

“핫핫핫. 너무 고통받지는 마십시오! 이제부터 폴트 양에게 갈 거니까요! 준비는 되셨습니까?”

“준비고 자시고 무슨 필요가 있겠어.”

“에엥?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제 생각에는 이거이거 상당히 껄끄러운 만남입니다만? 해고된 폴트 양이 그간 당신들을 원망했을지, 어쩌면 당신들을 싫어하게 되었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런 성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생명에게 본성이란 없습니다! 수많은 자질을 갖추고 있다가 때에 맞춰 하나둘씩 꺼내 집어들뿐이지요.

뭐어, 그렇게 빼들 칼을 선별하는 과정이야말로 본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실 한 사람에게 수많은 칼이 있는 경우는 없지요!

모두 각자의 상황에 맞추어 간신히 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에서 선택할 뿐입니다! 궁지에 몰려 폴트 양에게 기대게 된 당신처럼요!”

또 복잡하고 장황한 얘기네.

그런데 이번에도 뭔가, 형언하기 힘든 이질감이 찾아왔다.

“저기, 있잖아. 우리 어디서 만났던가?”

“네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근데 뭔가 이상한데. 내가 너한테 폴트에 관해, 우리에 관해 설명을 해줬던가?”

“해주셨습니다만?”

“정말로?”

“정말로.”

머리가 아프다.

아니, 뭐, 해줬겠지.이렇게 실컷 떠들어대는 통에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 리가 없고.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 녀석이 아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 녀석은 그냥 폴트를 만난 이후로는 내 시야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는데.

“흐음, 그럼 이제부터 안내를 시작할까요?”

“어디로 가는 거야?”

“한때 미술관의 회랑으로 쓰였던 곳으로 갑니다. 그때만 해도 ‘내셔널 갤러리’라고 불렸습니다만, 이제는 그냥 난민촌입니다. 난민촌이라는 이름도 아깝지요. 사용자가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바니걸은 광장 중심부에서 정말로 가까운 건물을 가리켰다.

내셔널 갤러리라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게 커다란 석조기둥이 잔뜩 선, 박람회장 같은 구조물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거의 망가져 있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자, 의외로 정돈된 분위기가 튀어나왔다.

묘한 생기가 느껴져 미묘하게 감탄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넌 폴트랑 무슨 사이야?”

“헛? 글쎄요, 특별히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만?”

“친한 거 같은데, 거주지까지 안다는 건.”

“저는 영국의 거의 모든 사람과, 아니 세계의 모든 이들과 친합니다! 그야, 큐티! 러블리! 프리티! 모두의 바니걸 소피이니까요!”

어련하시겠어요.

“그래? 그런데 이것도 조금 궁금한데, 폴트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아앗, 그러고 보면 그 설명도 드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걸 과연 제가 말씀드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당사자에게 들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당사자?”

2층으로 들어서자 마치 가정집처럼 꾸며진, 그러나 쓰레기더미로 가득 찬 공간이 튀어나왔다.

안내하듯 먼저 달려 나간 바니걸은 문 하나를 덜컥 열고 들어가 나와 랑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내부에는 여전히 쓰레기투성이였다. 정확히 뭐가 특별하다고 이곳으로 이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특이한 것을 추려 보자면, 전원이 켜진 채 예능 채널을 틀어놓은 텔레비전이 하나 놓여 있었다는 것과 그 곁에 배치된 소파가 비교적 깨끗하다는 것 정도.

그럼에도 바니걸은 계속해서 나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따라가던 내 발목에 무엇인가가 툭 채였다.

내려다보니 맥주 캔. 아직 차가운 액체가 잔 바깥으로 주륵 흘러내렸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탄성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맥주입니다만.]”

아는 목소리.

소파 위로부터.

“[으응?]”

푸른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소파 위에서 뒹굴고 있던 메이드는.

아니 정정. 이제 메이드라고는 도저히 불러줄 수 없는 몰골이었다.

아무렇게나 길러서 뒤로 묶은 금발 밑으로 배꼽이 드러나는 탱크톱과 또 같은 원리로 허벅지가 드러나는 돌핀팬츠.

맨발의 20살 여성은 멍한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깜빡깜빡.

잠시 스스로의 눈가를 비빈다.

그러고도 특별한 변화가 없자, 이번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의 형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금발의 폴트는 체념한 채 중얼거렸다.

“[글쎄요. 약을 한 경험은 아직까지 없는데 말입니다…….]”

***

“[환각이라니, 어떻게 된 걸까요. 보드카도 아니고 맥주만 조금 마셨는데. 게다가 정신이 말짱한 걸로 봐서는 딱히 많이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몇 캔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를 멋대로 환각으로 여기지 마라.]”

폴트는 소파에 누운 그대로 뒤척였다. 그러나 일어나지는 않았다.

“[뭡니까, 영어 가능하다는 컨셉이었습니까? 그런 것치곤 말투가 이상한데요.]”

“[길게 말할 재주가 없다. 아무튼, 어떻게 된 건가.]”

“[말만 들으면 괜찮은데 어조가 엉망이네요.]”

“[한국어로 해줄 수 없나?]”

“[하고 싶은데, 영 생각이 안 나는군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주절거렸던 주제에?

폴트는 누운 채로 헛기침을 했다.

“암만 확실하게 배워도 금방 까먹는단 말이지요, 언어라는 건. 게다가 술에 취하면 그런 쪽으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체질입니다.”

“엄청 멀쩡하게 말하고 있는데요.”

“겉으로만 그렇습니다. 지금 뭔가 문법적인 실수라도 저지르게 하게 되어지고 있지 않은지 걱정스럽군요.”

“이중피동은 농담으로 섞은 거죠?”

“영국식 조크입니다.”

웃음기가 없는 고백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폴트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줄곧 소파에 드러누운 채였다.

속옷이 흘끔흘끔 드러나는데도 별로 아랑곳않고 TV와 나 사이에서 시선만 바꿔가는 금발의 미녀, 라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음흉한가.

금발의 소녀, 라고 하기에는 벌써 20대고…….

금발의 여인 정도로 해두자.

“아가씨께서는 안녕하셨습니까?”

“으, 응…….”

혹시라도 폴트는 남들이 없을 때 원래부터 이러고 살았던 거 아닐까. 그래서 랑만큼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나 싶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전혀 아니었다.

랑은 아까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겨누고 있었다. 자신 앞에 떡진 머리를 한 채 누워있는 여성이 폴트가 맞는 건가 어떤가. 그런 느낌이다.

하긴, 애당초 폴트는 편할 때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풀어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하긴 했지.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지금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근간을 다 잃어버렸다고 해야 하나…….

속으로 놀라고 있는 도중에도 폴트는 통통한 엉덩이 아래나 허벅지를 긁적거리며 늘어지게 하품할 뿐이다.

“원래 이렇게 지저분하게 하고 살았어요?”

“뭐, 이러면 안 됩니까, 저는?”

“아니 그냥…… 캐릭터랑 좀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러자 폴트는 나의 말을 비웃듯이 어울리지 않는 코웃음을 쳤다.

“잠깐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행?”

“제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 같은 식의.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교육 탓에 뭐든지 깨끗하고 정갈하게 치워놔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그걸 얼마만큼 깨뜨릴 수 있는가 하는 수행이었습니다.”

“글쎄요, 수행치고는…….”

“예에, 사실 제 내면에는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담겨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번 리미트를 해제하니 이렇게 상쾌한 것을. 지금까지 왜 착실하게 생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안 나오는군.

이 수행의 황당무계함에 대해서는 더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굳이 런던으로 온 건?”

“영국인이 런던으로 온 데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런던은 이유가 필요하죠.”

“음, 하긴 그렇군요.”

폴트는 확실히 취기가 오르긴 올랐는지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별 이유는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사람이 없는 게 좋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건 정말 핑계 같군요.”

“여긴 위험하잖아요.”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안전합니다. 더군다나 사람이 많이 없으니 이런 곳에 틀어박혀 있으면 아무도 모르고요.

그리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오신 분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어색하군요.”

“그것도 그렇네요. 아니, 근데 저희도 평소 알던 것만큼 위험하지 않단 걸 알고 온 거라서.”

자연스럽게 화제가 이쪽으로 넘어왔다.

폴트가 우리를 꺼리는 기색이 아니라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사정이 생겨서 거처를 좀 빌리고 싶어요. 당분간만 여기서 생활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지요.”

“어디든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요.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머무를 장소랑 먹을 음식만 있으면 돼요.”

폴트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랑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래 마주치지 않고 이쪽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한나진 씨라면 괜찮을지 몰라도, 저분께는 걸맞지 않는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그래요.”

“여기는 얼어붙었거나 팔팔 끓어오르고 있습니다만.”

“부탁할게요.”

폴트는 그제야 슬며시 일어났다.

그러나 일어났다고는 해도 완전히 일어서서 자세를 잡았다는 건 아니다. 숙취에 찌든 사람이 늘 그렇듯 벽에 등을 기대고 삐딱하게 앉아서 끄응, 하는 괴로운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튀어나온 호흡에는 맥주와 담배의 냄새가 마구 뒤섞여 있었다.

“어차피 여긴 적법한 저의 사유지가 아닙니다. 같이 머무르며 이것저것 주워 드신다고 해서 제가 뭐라고 따질 명분은 없습니다만, 결코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요.”

“안전하다면서요? 파계종도 없는 분위기인데.”

“버밍엄과 나타나는 빈도 자체는 비슷합니다. 다만 이곳에는 버밍엄과 다르게 제대로 된 지정능력자들이 없지요. 저 또한 간혹 나타나는 파계종이 있으면 다중화면으로 미리 파악해 도망치는 걸 선택합니다.”

“언제 어떤 것들이 나타났는데요?”

“한 일주일 정도 된 것 같군요. D등급 내지 C등급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문제는 없죠.”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뭐,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별로 관여할 마음이 없습니다.

식량은 옆방인지 옆옆방에 잔뜩 쌓아놨으니 필요한 만큼 드시면 됩니다. 수도는 끊겼으니 페트병에 담긴 것만 쓰시길 권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어이없을 정도로 가볍게 협상이 타결되자 김빠진 것처럼 감사인사가 튀어나왔다.

일단 어떻게, 사람이 생활할 침대 정도라도 구해보려고 방 밖으로 나서려 했다.

그때 랑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폴트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소파에 드러누운 여자는 그녀의 옛 주인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반대로 옛 주인은.

“폴트.”

침묵.

대답은 없었다.

“폴트, 묻고 있어.”

“저는 당신의 시종이 아닙니다.”

“시종이었어.”

“그게 중요합니다, 아가씨. 현재 진행형과 과거분사의 차이를 배우는 편이 좋겠군요.”

“폴트, 지금 폴트는 이상해. 원래랑 달라.”

“원래의 저라는 건 없습니다, 아가씨. 사람이 변하는 건 끊임없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아가씨와 한나진 씨께서는 어째서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저에게 거처를 빌려달라는 구차한 부탁까지 하게 되었을까요?”

“그거야, 일이 이렇게 되는 수밖에 없어서…….”

“그렇지요. 그런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람도 이렇게 된다.”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랑의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폴트, 내 말도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고……. 폴트가 엄마 말에 따른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아직까지도 총수를 엄마라고 부릅니까.”

냉랭한 목소리.

랑의 전신이 돌처럼 굳었다.

“언제까지고 주변의 호의에 기댈 수는 없지요. 아가씨, 굶어죽는 것이 두려웠다면 사람에게 아양을 떠는 법 대신 아니라 스스로 먹이를 찾아 사냥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침묵.

기나긴.

누구도 그 침묵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문득 확 열이 받았다. 그러나 되받아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섰다.

폴트는 아직까지도 주취가 섞인 한숨을 푸욱 뱉고는 체념적으로 말했다.

“참, 누가 제가 여깄다는 걸 알려줬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찌됐든 저는 지쳤습니다. 쉬고 싶습니다. 나가주십시오.”

늘 누워있던 폴트는 드디어 일어났다.

그러나 그 기개를 어디 좋은 데는 쓰지 못하고 나와 랑을 바깥으로 밀쳐내 문을 닫는 데에 사용했다.

쫓겨난 랑은 굳게 닫힌 문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의문에 빠졌다. 그것이 나를 쫓아내는 폴트의 손길에 힘으로 버티지 못한 이유였다.

나는 닫힌 문 대신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폴트가 이곳에 있다고 알려준 사람은, 누구였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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