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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39화 (39/112)

〈 39화 〉 007. 난리들 났네 (3)

* * *

1시에 버밍엄 공항에 도착했다.

퍼스트 클래스 혜택으로 나오자마자 우리를 반기고 있는 수하물 묶음과 한인 2세로 추정되는 직원.

공손하게 인사하고 짐까지 들어주겠다는 것을 안내만 받고 그냥 돌려보냈다.

혹여 한인촌에서 사는 사람이 랑을 알아보고 소문이라도 내면 어떡하냐.

게다가 수하물이라고 해봤자 고작 캐리어 세 대 분량이다. 그것까지 들어달라고 낑낑거릴 정도로 부실한 사람은 아니라고 자부하고 싶어서.

“지금부터 일정을 다시 밝히자면, 여기서 또 리무진으로 외부 라운지까지 운전을 해준다는데.”

“눈에 띄어.”

“그래도 버스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니면 걸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긴 코스고.”

랑은 잠깐 고민하다가 리무진을 선택했다.

좋겠군. 리무진을 탈 수 있다는데 고민에 빠지는 멘탈이란.

어쨌거나 또 요란스러운 환대를 받으며 리무진에 탑승.

거의 10분 안에 공항 입구의 라운지까지 도착했다.

이윽고 라운지 바깥으로부터 들리는 독특한 억양의 영어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다.

수능과 토익 시험장이 잠시 머릿속에서 오버랩됐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 기억하고 싶지 않아.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

“아니, 아무것도.”

토플하고 아이엘츠도 쳐야 하는데…….

아니 생각해보면 이미 취직했으니 의미가 없나…….

하지만 이 녀석하고 붙어 다니면 이런 식으로 수시로 영어를 듣겠지.

어쩌면 불어나 일본어, 중국어 같은 제2외국어도 필요할지 몰라.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물론 이번 여정 동안은 통역사가 달라붙을 것이다.

하지만 화장실 위치 찾기 따위의 정말 기본적인 것들까지 맡기는 것도 좀 그렇다.

나로서도 기초적인 회화능력은 필요하겠지.

다행히 그간 배운 것들이 있어서 듣고 해석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암만 그래도 말로 내뱉는 건 어색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는데,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던 랑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언제 온대?”

“통역사랑 파견인이라면 2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늦어도 30분 안에는 올 것 같은데.”

“심심해. 게임해도 되는 것?”

슬슬 알겠군. 이 녀석은 이것저것 먹으러 다니는 걸 제외하면 그 다음 우선순위가 모바일 게임이다.

“안 돼.”

“아앗, 왜애, 왜애, 와이파이도 잡혔는데!”

“또 과금할 거잖아.”

“어, 얼마 안했어!”

“무슨 기준으로 따지면 360만 원이 얼마 안 쓴 거야! 대기업 대리급 월급이잖아!”

“지지난 달에 비하면 반으로 줄인 거야!”

원래는 과장급이었냐!

“하, 하지만! 하지만 공명 5보구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어! 길가메시 픽업까지 진행했고!”

“우선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라.”

정수리를 툭툭 때려줬다.

“뭘 어떻게 하려고 했건 아무튼 그렇게 팡팡 써대는 건 나쁜 버릇이야.”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용돈 아껴쓰면 되는 거엇…….”

확실히, 랑의 경제관념과 배경을 감안하자면 엄청난 지출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나를 고용하며 용돈 쓰듯이 연봉 8천을 제안했던 것을 보면 정말로 푼돈 만지듯이 아무렇지 않게 결제한 것일 수도 있다.

“너는 그냥 맞고 시작하자.”

그 말마따나 계속해서 정수리를 타격. 물론 아프지는 않게.

돈이야 자기 돈을 쓴다니 뭐 어쩌겠냐만.

나는 액수보다도 사용처를 바로잡아주고 싶다. 수백만 원을 다달이 소모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으면 조금 더 특별하고 외향적인 취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성격상 그게 어렵다면 차라리 재벌 컨셉답게 아쿠아리움 같은 거라도 꾸미지 무슨 가챠게임에 과금이나 쏟아 붓고 앉았나 싶다.

“게임만 하면 사람 성격 망가진다.”

“그건 날조야.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것.”

글쎄, 지금 내 눈앞에 15살짜리 소녀의 사례가 있다는 생각이 치솟는데.

물론 이렇게 해서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끝이 없고.

“날조건 뭐건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잖아. 네가 성격 나쁜 아이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상관없는 것. 수고.”

“내가 상관있어.”

랑이 정곡을 찔렸다는 듯 ‘윽’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가 한심한 사람으로 여겨지면 그건 널 관리하고 보조하는 내가 한심한 사람이 되는 거야. 이건 내 자존심 문제라고.”

“아, 알았어……. 안 할게.”

풀이 죽어서 휴대폰을 집어넣는 모습을 보자니 여러 의미에서 씁쓸하다.

갑자기 내가 애 아빠가 된 기분인데.

아니지. 나하고 얘가 부모자식뻘로 나이차이가 나는 건 절대 아니니까.

그런데 정신적인 측면에서 따지자면 그 정도 관계가 맞을지도.

어쨌거나 이렇게 떠드는 동안.

“저기, 공익.”

“공익 아니라니까.”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왜 이렇게 늦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뭐, 사람이 약속장소에 늦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도 자주 겪는다.

하지만 오늘의 손님인 랑은 영국지사 입장에선 매우 귀중한 존재가 아닌가.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찍부터 대기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만일 늦을 수밖에 없게 됐다면 연락을 해서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몇 분 오버하는 지금까지 휴대폰은 한 차례도 울리지 않고 있었다.

분명 로밍으로 국제전화 전환을 한 직후 영국지사에 나와 랑의 연락처를 보냈다.

마찬가지로 귀한 손님이므로 연락처를 함부로 다루다가 잃어버렸을 개연성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건, 배짱을 부리고 있다는 건데…….

“일단 내 쪽에서 연락을 해볼게.”

상황을 신속히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그래서 미리 저장해둔 번호로 통화를 걸었고.

단절음.

잠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점멸하는 불빛과 떠오르는 메시지 ‘통신이 가능한 지역이 아닙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라운지 바깥으로 나가 직원을 찾았다.

더듬더듬 한국어를 내뱉는 걸 저지하고 간단하게 영어로 물었다.

“[여기 원래 통화가 안 되는가.]”

직원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아뇨, 가능합니다만.]”

다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파계지점이 나타나면 통신에 장애가 생길 수 있다.

“[재해 경보가 발생하지는 않았나?]”

이번에는 잠시 당황한 직원이 무전기로 다른 직원들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시 대기 중인 요원들이 확인했습니다.]”

다시 라운지로 돌아왔다.

“너 휴대폰 좀 줘봐.”

“무슨 일?”

“모르겠어. 통화가 안 되네.”

휴대폰을 건네받고 같은 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단절음이 들려오고 ‘통신이 가능한 지역이 아닙니다.’ 하는 상투적인 문구만 떠올랐다.

뭐가 어떻게 꼬인 걸까.

잠시 고민하다가 인터넷을 켜서 머즐드독스 영국지사의 대표번호를 찾아냈다.

다시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음이 가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단절음이 흘러 나왔다. 통신불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휴대폰도? 싶어서 라운지 바깥 직원의 휴대폰을 빌렸다.저장된 직통번호로 걸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신호음이 갔다.

그러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어서 영국지사 대표번호도 마찬가지.

정중하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감사인사를 한 뒤 라운지로 돌아왔다.

미쳐버리겠네.

총수에게 전화를 하자니 실망감을 갖게 할까 걱정스러워서 번호를 누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옆에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랑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해결해야 한다.

우선 두 가지 판단이 가능하다.

첫째로 휴대폰이 통신불가 상태라는 것. 그렇지만 라운지 직원의 휴대폰에서는 단절음이 없었던 걸로 보아 우리 둘의 휴대폰만 무슨 문제가 생겼다.

또, 인터넷은 가능한 걸 보니 문제가 발생하는 범위는 통화에 한정되는 것 같다.

둘째로 저 빌어먹을 영국지사에서 고의적으로 통화를 거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공항 직원의 휴대폰으로 걸었을 때 단절음은 들리지 않았으나 저쪽에서 받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물론 여기까지는 어디나 추측. 우연히 타이밍이 안 좋아서 두 차례의 통화를 모두 받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만일 이게 영국지사의 견제방식이라면 아예 예상을 벗어난 방식이었다.

견제를 받을 거라고는 분명 생각했지만 이런 단순무식하고 무모한 거부를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다.

안정을 위해 이런 온화한 해석을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 랑에게 전달했다.

그럼에도 랑은 패닉에 빠졌다.

“어, 어떡해?”

“약속시간도 꽤 지났고 그냥 나가서 직접 찾아가든지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기, 길은 알아?”

“일단 지도는 인터넷으로 보면 되니까 택시를 타서라도……. 차타고 한 시간 정도만 가면 돼.”

“하지만 가도 그쪽에서 협조를 안 해준다면 의미가 없어.”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또한 솔직히 이럴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영국지사에서 아예 나와 랑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면?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지사에 도착했는데 역으로 죽이려고 든다면?

아니. 정말로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없는 시나리오임은 안다.

하지만 개연성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접견거부도 충분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무엇보다도 통신을 두절시킨 이 상황 자체가 굉장히 께름칙하고.

물론 으레 불안한 생각이라는 게 일단 떠오르면 끝이 없다.

나중에 가면 ‘대체 그런 생각을 왜 했지?’하고 스스로로서도 터무니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 불안감이다.

즉 지금의 감정은 실제에 비해 과장된 것.

그래. 생각을 해봐라.

앞서 말했지만 영국지사에서 우릴 거부하고 있다는 것조차 일종의 착각인지 모른다.

만일 정말로 거부하고 있다고 치자. 해도 우릴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총수의 딸이 현지에서 죽는다면 그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게다가 우리에게는 아직 돌아갈 수단이 남아있다.

“카드는 잘 갖고 있는 것?”

“물론이지.”

랑의 명의로 된 카드가 수중에 있다.

따라서 수틀렸을 때 귀국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다만 그렇게 되면 이번 일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 오히려 빈수레만 요란하게 굴려댔다는 평가를 받게 되겠지.

따라서 이 카드는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돌아갈 방도가 있다는 건 중요하다. 안심이 되잖아.

“일단은 영국지사로 가자. 가서 확인하면 되니까.”

“으응…….”

그렇게 미래를 낙관했다.

그리고 여기서 두 번째로 계획한 일정이 틀어졌다.

카드는 정지돼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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