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007. 난리들 났네 (2)
* * *
“흉물?”
“나도 어제 들은 소식이야.”
딱딱하게 굳은 턱 근육을 손으로 주물러 풀어가며 말했다.
비행기 자체를 몇 번 타보지도 못한 신세였다. 퍼스트 클래스를 타려니 긴장이 몰려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랑 또한 제법 긴장해 있었다.
물론 나와 같은 의미의 긴장은 아니었다. 녀석은 비행기에 익숙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전용기가 아닌 비행기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업상 이동에는 항상 전용기를 동원했댄다. 뭔 사업인가 하니, 더 어렸을 때는 어머니 손을 붙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
그러는 동안 스튜어디스에게 음료나 기내식을 넘겨받는 건 전부 총수의 손을 거쳤던 탓에, 랑은 스스로를 극진히 대접하는 스튜어디스의 태도를 매우 난처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나도 좀 난처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극진했고.
반쯤 무릎을 꿇던데 그럴 필요까지 있는 걸까.
암만 젊고 예뻐 보인다지만 어엿한 사회인이니 나보다도 몇 살은 많을 텐데. 랑에게는 큰 언니 내지 이모뻘이고.
언젠가 이 상황에 익숙해지는 날이 올까 두려움을 느낄 즈음.
“흉물이라고 해봤자 자칭이지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민 혹은 빈민만 남은 런던에서 파계종을 처치하고 있는 모양이야.
본래 거주하던 사람들은, 솔직히 거기 다시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고 영국이 딱히 인구가 미어터지는 나라가 아니라서 방치하는 모양이야. 그렇지만 그 흉물이라는 사람인지 뭔지는 여전히 런던을 지키고 있고.”
랑에게 관련 기사 링크를 카톡으로 넘겼다. 대강 훑어볼 때까지 기다렸다. 오래 걸렸다.
랑은 냉랭하게 말했다.
“혼자서는 무리.”
“그렇지, 무리지.”
런던이 조그마한 도시도 아니고, 거기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한두 명이 아니다.
분명 흉물이라는 괴인은 A등급 지정자에 준하는 혁혁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영국에 그 정도의 지정능력자가 없어서 런던을 수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파계종의 출몰 빈도는 나날이 줄어서 몇몇 국가와 연계하면 당장이라도 런던에 잔존하는 파계종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라고 봐야 한다.
“런던의 시설은 다 망가졌고, 따라서 그 지역을 다시 손에 넣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오히려 거기 수용돼 있던 난민들이나 빈민층이 설자리를 요구하거나 귀찮은 자기주장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곳 사람들은. 예전 같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예전 같았으면?”
“내가 유치원 다녔을 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완전 선진국이었거든.”
“정말로?”
“너, 역사 공부 같은 것도 좀 해야겠다.”
“으윽.”
참고로, 이번 여정이 끝나면 나는 랑에게 기초교육을 시킬 예정이다.
듣자하니 친구가 없는 탓에 학교도 설렁설렁 다니다가 종래에는 아예 안 나가게 된 모양이다.
열다섯이나 먹어서 중등영어나 고차 방정식도 못 풀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자기 나이에 맞는 정도의 공부라도 시켜야지.
다행히 나는 수능 위주의 공부는 제법 자신이 있고.
어찌됐든 때마침 역사 얘기가 나왔으니.
“16년 전의 런던 참사에 대해서는 너도 알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영국은 진짜 잘 나가는 나라였어.섬나라인데다가 유럽 서쪽 끝이라서 냉전 시기에도 아주 평화로웠고, 사회가 일찍 발달한 덕분에 경제력도 최상위권이었지.
지금이야 동구권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전락했지만.”
요는 유럽인들이 태생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가져서 선진적인 의식을 갖추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냥 먼저 쌓아올렸고, 그걸 유지하려고 노력을 기울인 것에 더해서 호재까지 찾아와 여유롭고 폭넓은 사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쌓은 것이라고 해도 결국 쉽게 무너지는 법이다.파계종의 출몰 이후 런던이 무너지고 나니 국력이 극심하게 쇠퇴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와 같이 지극히 환경적인 이유로, 그들은 그냥 런던을 쓰레기처리장 정도로 방치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흉물 같은 이상한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
“응. ………그런데 역사 공부는 안 할 것.”
“혼난다.”
“여, 역사까지 추가하면 다섯 과목이나 돼!”
“수학 영어 국어 사회, 그리고 역사. 사람이 살아가려면 필수적인 거라고. 아, 생각해보니 너는 상법까지 배워야 되겠네.”
“사, 상법은 엄마가 알려주잖아! 그리고 상법대로 돌아가는 게 어딨다구!”
“그 마인드가 기업의 부패를 부르는 거다, 이 녀석아.”
꿀밤.
“아앗! 수행원 주제에! 수행원 주제에! 공익 주제에!”
랑은 양팔을 휘적거리며 투정부렸다.
스튜어디스의 싸늘한 시선은 덤이고.
이 녀석은 평소에는 비교적 착한데다가 내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어쩌다가 공부 얘기만 나오면 엄청 예민해진다.
다시 말해서 정말 순수하게 공부가 싫다는 거지…….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역발상. 랑이 싫어할수록 나는 더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그야, 공부가 너무 좋아! 라고 생각하는 녀석은 그냥 내버려두면 언젠가 공부를 한다. 반대로 공부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녀석은 내버려두면 그냥 안 하거든.
여기에서 네가 얻을 교훈은, 단편적으로 요구를 내뱉기 전에 그걸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감안해보라는 것이다.
지극히 사업가적인 미덕이지. 과외선생 포인트 1점 추가.
“그리고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나 공익 아니다.”
“공익이었잖아. 한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니까, 공익도 영원한 공익이야.”
“해병대와 공익은 너무 다르지.”
“어떤 식으로?”
“공익전우회라는 거 들어봤냐?”
랑은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치명적인 반박을 가했다.
“공익은 싸우지 않는 것! 그러니 전우회(戰?會)는 있을 수 없어!”
“땡. 나는 공익이지만 놀랍게도 목숨을 걸고 싸워왔지. 아무튼 전우는 없지만.”
랑은 볼을 부풀렸다.
“아무튼 공익으로 만났으니까 공익. 그게 편해.”
“그래, 뭐, 네가 좋다는데 내가 어쩌겠냐. 그런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제발 호칭 똑바로 해라. 내가 아니라 네가 창피한 일이야.”
“여, 영국에서 누가 듣는다고.”
“하긴 그렇지. 그러니까 한국으로 돌아가서.”
“내가 알아서 잘 하는 것.”
랑은 투덜거렸다.
어련하시겠어요, 라고 비꼴 수는 없고.
그보다는 그냥 정수리 부근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키가 평균보다 크고 대화의 상대방보다 많이 크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얌전히 좌석에 앉은 상태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고.
그러고 보니 랑은 얼마만큼 크려나.
총수의 경우 제법 큰 키였다.
물론 178cm인 나보다야 작았지만, 아주 작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한 170 언저리일까.
랑의 언니인 유의 경우 한 160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그쪽도 아직 클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쪽 집안은 되게 잘 크겠는데?
160을 넘긴 랑이라. 한 열여덟 살 정도로 치환하면…….
“왜, 왜 빤히 쳐다보는 것?”
“아니, 그냥. 묘하다 싶어서.”
랑은 대답을 듣자마자 고개를 창문 바깥으로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생각은 끊이질 않았다.
‘굉장한 미인이겠지.’
말들.
‘그런데 강제결혼이라.’
총수로부터 들은 말들이 둥둥 떠다녔다.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니, 애초에 인정받은 뒤에도 억지로 결혼을 시킬까.’
계속해서 떠오르는. ‘시키겠지.’ 생각들. ‘시킬 거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랑의 정수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 손길을 치우거나 하지 않고 랑은 다만 좁은 창문 너머의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해주는 것이 옳은 건가. 아니면 함구하는 것이 옳은 건가.
아무리 언니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 녀석은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알량하다고도 할 수 있는 가족애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도려내게 될지도 모른다.
분명 내가 곁에 있어준다면 괜찮다고 쉽게 말하긴 했지.
그렇지만 온전히 납득하고 내뱉은 얘기는 아니니까.
내가 도와서 끝맺을 수 있는 일이긴 한가?
이 녀석들의 이야기 속에서 난 도대체 얼마나 조그마한 존재인지.
나도 창문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생각을 도려냈다.
지금은 지금의 일에 집중해야지.
이제부터 일정이 매우 버겁다.
우선 버밍엄 공항에 도착하면 모든 일을 은밀하게 처리해야 한다.전용기를 선택하지 않고 공용비행기에 섞여서 출국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랑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머즐드독스 후계자도 아니고 총수 또한 당장 자매들의 순위를 바꿀 마음이 없는 상태.
그러니 언론에 ‘둘째딸이 본사를 대표해서 영국지사에 파견을 나가다!’ 같은 기사가 실리지 않기 위해서 파파라치가 따라붙는 전용기를 기피했다.
하지만 동시에 랑의 능력을 입증받기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계획한 대로 일이 잘 풀린다면 귀국하는 길에 ‘충격! 둘째딸이 본사를 대표해 은밀히 영국지사의 문제를 해결!’ 따위의 기사가 나는 것은 두 팔 벌려 반길 일이다.
이 플랜은 총수의 의지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와 랑이 구상한 것이다.
랑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휘둘릴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랑의 인지도가 높아진다면 유와 합의했던 ‘유에 관한 나쁜 소문’도 퍼뜨려야지.
이건 언론에 괜히 흘려서 좋을 게 없으므로 기업 내부에.
실로 무시무시한 작전인걸.
하지만 결정적으로 영국에서 성과가 없으면 이 모든 장대한 대서사시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아니, 물거품이 되는 건 둘째로 치고 속된 말로 랑이 나가리가 되는 수가 있다.
해내면 좋은 작전이 아니라 해내야 살아남는 작전.
사생결단.
“전체 일정은 대략 일주일……. 우선은 시간도 나니까 오늘 일정이나 불러줄까?”
“응.”
다시 기내로 시선을 거두어들인 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선은 공항에서 현지 수행원과 통역가를 만나기로 했고, 현지 호텔이나 영국지사 게스트룸에서 숙박.
이건 도착할 때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니까 그쪽 수행원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고…….
어쨌거나 오늘 하루 동안은 가볍게 회사 시찰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정도.”
“왜 일주일이나 잡혔는지 모르겠어.”
“낸들 알겠냐.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행이야. 여유시간이 있어야 총수와 지사장의 협상테이블에 머리를 들이밀 타이밍이 잡히거든.”
걱정은 산더미 같고 이번 여정의 중요도는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은 편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전면에 나서서 뭔가에 부딪치고 맞서 싸울 필요는 없지.
어디까지나 물밑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이면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전부.
가뿐하다, 가뿐해.
………라고.
멋대로 편하게 생각한 주제에, 공항에서 수행원과 통역가를 만난다는 맨 처음 일정부터 거하게 실패할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어느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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