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006. 쪼그마한 게 발랑 까져서는 (5)
* * *
경인고속도로를 타면 인천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 남짓이다.
조선시대에는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문명의 이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떤 현대인은 그러한 비약적인 발전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현대인은 인천시에 거주하는 어떤 대학생이다. 근래 지나치게 일찍 취직에 성공해서 부모님으로부터 갖은 의심과 추궁을 받고 있는 정도의 일반인이다.
취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취업자는 현재 본사로 찾아가고 있다.
더 어울리는 표현을 찾자면 ‘본가’일 것이다.
자신의 일을 타자처럼 말하는 것은 그만두자, 비참해지는 건 나니까.
우리는 벌써 서울 서초구에 도달해 있다. 대낮이다.
아, 여기서 그나마 다행인 것을 일러두자면 어젯밤 바로 출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랑이 이르길 ‘내일 오랬어.’ 그리고는 ‘같이, 아마 점심시간 전까지.’
결국 하룻밤의 여유시간은 벌었는데…….
당연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랑은 방이 춥다고 같이 잔다고 보채질 않나. (확인 결과 난방에는 이상 없음.)
겨우 잠드니 내일 입고 갈 정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장이 조이는 듯한 느낌이 찾아오질 않나. (최대한 타협해서 가장 점잖은 셔츠와 슬렉스, 코트)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은 찾아왔고.
운전하라고 내게 주어진 새카만 세단은 집 앞에 주차돼 있었고.
수능 끝났을 무렵 여유시간 내서 따둔 면허는 사실상 장롱면허였고.
어쨌든 며칠간의 연습 덕분에 어떻게 고속도로 타는 것까지는 무리가 없었고.
내 몸은 어느새 서초구에 있고.
“긴장해?”
“긴장 안 되겠냐 그러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라.”
뒷좌석의 랑은 잠깐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공익네 어머님을 만나게 된다면 긴장할 것.”
“이제 공익 아니거든. 그리고 그거랑은 상황이 좀 다르지.”
너한테 우리 어머니는 하급자의 부모님이 되는 거고, 나한테 너희 부모님은 상급자의 부모님이 되는 거거든
또 덧붙여서 말하자면 그 상급자의 부모님이란 사람은 상급자의 상급자의 상급자의 상급자 정도 되는 위치에 있고.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고 있던 랑은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직선으로 연결된 거 아냐. 너는 내 소속이고, 엄마는 지금 머즐드독스 총수가 아니라 그냥 우리 엄마로서 관여하는 것.”
“말만 듣자니 무슨 딸이 구해온 과외선생이 쓸 만한가 어떤가 알아보겠다는 느낌인데…….”
하지만 지금 내 포지션은 과외선생이 아니라 전속 집사 겸 경호원이며, 그 딸과 엄마의 캐릭터가 재벌 2세와 재벌 본인이라는 진중한 사실을 놓치고 넘어가면 안 된다.
과외선생은 잘못 가르치면 문제 하나를 더 틀리게 할 뿐이지. 나는 세계를 경영할 미래를 지닐지도 모르는 여자아이의 목숨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충할 생각이었으면 고용을 수락하지도 않았다.
암만 그래도 말이지.
딱 생각했던 만큼 일이 복잡하고 거대하게 굴러가는 것 같아 슬픈 마음이 든다.
“괜찮아. 수행인 섭외권은 나한테 맡긴다고 했으니까. 폴트를 뽑았을 때도 엄마는 특별히 개입하지 않았던 것.”
“그랬으면 좋겠네.”
하지만 상황은 별로 낙관적이지 못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뒷좌석에 타고 있는 꼬맹이는 재벌 그룹의 차녀.그녀를 지킬 보좌진의 역할은 대통령 경호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우연찮게 B등급 방어형 지정능력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나에게조차도 모자라면 모자랐지 여유가 생길 직위는 아니다.
게다가 유의 묘사를 들어봤을 때 총수라는 사람은 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 같지도 않다.
더불어서 폴트가 감정 숨기는 데 뛰어나다는 걸 감안해보면 폴트는 실제로는 불려가 놓고도 랑에게만 언질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너는 그냥 내가 편해서 일을 맡긴 건지 몰라도, 너희 어머니께 나는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이야. 값어치는 해야 해.”
“그렇게 큰 돈은 아닌데.”
연봉 4천이 말이지.
하긴 그때 분명 용돈하고 세뱃돈 합친 거랬지…….
이 실물경제적 격차에 관해 언급하는 건 넘어가기로 하고.
“너한테는 그런 돈이어도 나한테는 엄청 커. 그러니까 제대로 하는 건 당연해.”
“으음…….”
랑은 복잡하게 신음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액수를 받아들이는 관점에 대한 불이해가 아니라, ‘제대로 한다.’가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듣자하니 랑에게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진 것은 바롱의 경우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계승 순위에서 밀려난 차녀였고, 또 성격까지 냉철한 기업인에서 거리가 있었다.
누구도 나서서 랑을 압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랑은 인식 속에서 바롱의 습격은 그저 딱 한 번 일어났던 일.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생각하질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랑과 유는 분명히 약속했다. 정의로운 머즐드독스를 만들자고.
그건 관점을 다르게 해서 보면 가업 계승의 순서를 뒤바꾸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랑이라는 인물의 중요도가 급증한 상황.
그럼에도 랑의 주변에는 유와 달리 뛰어난 팀원들이 없다.
결국 유사시에 지켜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러니, 랑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독이듯.
“뭐가 어떻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지켜줄게.”
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 바깥을 보고 있었기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채로 어느새 우리는 ‘본가’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
“어울리는 단어가 있죠. 사회초년생.”
홍차의 냄새가 감미로웠다.
“스물셋이라. 그때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딱 나진 씨처럼 대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워낙 대충 다녀서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네.”
어딘가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머즐드독스 총수의 나이는 이제 서른아홉
그러나 얼마나 관리를 열심히 했는지 넉넉잡아 10살은 어려 보였다.
균형 잡힌 몸매와 말끔한 정장 차림, 얼굴 피부에 달라붙은 장난기 어린 웃음.
연하게 보이는 팔자주름만 제외하면 재수해서 대입한 4학년 선배 몇몇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어머, 미안해요, 다짜고짜 내 얘기만 읊으면 조금 웃기려나.”
총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집 구경은 잘 하고 왔어요?”
잘 하고 왔다.
얼마나 잘 하고 왔냐면, 난생 처음 사람이 사는 집에 ‘광활하다’라는 묘사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잘 하고 왔다.
검은 벤츠와 리무진이 몇 대나 들어선 차고. 정원사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정원. 실내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당신들이 얼마나 만화적인 세계관 속에서 사는지 잘 알겠다.
물론 이렇게 말해줄 수는 없지요…….
나는 이 저택과는 다르게 협소한 인간이라서 협소한 어휘만 선택한다.
그러니, 이렇게.
“물론입니다.”
그러자 총수는 미소를 조소로 갈아 끼웠다.
“말투가 너무 굳으셨다. 긴장할 것 없어요. 내가 상급자도 아닌데, 뭘.”
모녀가 쌍으로 긴장 타령이군.
가해자는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법이긴 하지.
“상급자라고 생각하고 임하고 있습니다.”
“어머, 고마워요.”
싱긋. 조소는 다시 미소로 돌아왔다.
웃음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뭐, 여기까지 당도하니 오히려 마음이 풀린다는 느낌이다.
머즐드독스의 총수 제갈무는 특유의 직설적이면서도 나긋나긋한 화법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유한 기업의 규모 때문에) 온갖 언론에 얼굴이 알려져 있었으니까.
TV에서 종종 보던 얼굴이라고 생각하면 의외의 차분함이 솟아나는 것이다.
도리어 나보다는.
“우리 딸은 또 왜 이렇게 굳어 있을까?”
“그, 그게…….”
“제법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은데에.”
나도 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시종일관 존대없이 엄마엄마 편하게 부르던 녀석이기에 모친의 성격상의 문제를 제외하곤 모녀관계가 원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의 망부석처럼 나와 총수가 대화하는 걸 지켜보고 있을 뿐이니.
“저기, 그게, 어, 엄마? 나는 있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업무 얘기 해야지?”
끊어냈다.
그러더니.
“너희 언니가 또 그새를 못 참고 엄마 속을 썩여서 네가 대신 가게 됐잖니? 그러니까 오늘은 깔끔하게, 일에 관해서만. 자세한 건 나진 씨한테 듣도록 할게. 그게 저쪽 일이니까?”
“으, 응…….”
뭐야. 이 모녀 무서워. 막 지들끼리 편집하고 지지고 볶고 다 하려고 그래.
게다가 은근슬쩍 나랑 독대를 하겠다는 복선 같은 것까지 깔아놨고.
“아~아~ 진짜 힘들네에. 아무튼 이건 나진 씨도 들어야 하는 이야기에요. 솔직히 우리 꼬마가 아직은 너무 어려서, 물론 나진 씨도 어리다고는 생각하지만, 대부분 나진 씨에게 맡길 수밖에 없잖아?”
“최대한 돕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요.”
저도 정말 기쁘네요.
반어법입니다, 하핫.
“얘기는 적당히 들었을 거라고 믿어요. 영국에 있는 빌이라는 친구가─아, 본명은 윌리엄 맥걸린이랍니다?─재난구호에 지나치게 열정을 보여서 말이죠.
물론 제게도 이타심이라는 게 있고 도의적인 선에서는 영국인들을 돕고 싶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두는 기업인이라서요.
자, 일단 여기 서류.”
낮은 탁상 하나를 건너뛰고 종이뭉치가 날아들었다.
눈짓으로 허락을 받고 펼쳤다.
“정산서 같은 거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총수가 장난스럽게 중얼댔다.
“공무수행하면서 자주 봤습니다.”
날카롭지 않게 받아쳤다
“공익?”
아니 이 모녀가 아까부터 쌍으로 진짜.
됐다. 공익 맞으니까.
맞았으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장부를 읽어 내렸다.
“사용처가 불분명한 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과반이죠. 진짜 곤란하다니까.”
곤란하다, 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기업의 장부를 본 경험은 아마 없다고 해도 좋을 테지만, 직관적으로 봐도 해괴하게 꼬여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머즐드독스는 근본이 군수업체이다. 파계종과 관련한 물품을 제조해 각국의 정부와 민간 경비시설에 납품하는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한다.
그런데 이 장부에는 뭘 어떻게 구입해서 또 어디에 어떻게 판매했다든지 하는 정보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보다는.
[구호자금 구매]
[구호시설 확충 일부 재판매 및 구매]
[모금 관련 언론통제 다섯 군데 선정]
이런 식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무슨 가면무도회라도 하듯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려놓고 쑈를 벌여 놨다는 것이다.
구호자금이면 어떤 형태의 무슨 구호자금인지가 기록돼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시설과 모금 관련도 마찬가지였다.
이마저도 구매 판매 관련 기록이 지워져 있었고.
그나마도 남아있는 것은 심지어…….
“이거, 도대체 뭘 구매한 겁니까?”
[구호물품 구매단가 금속 70,000£]
숫자 뒤의 단위는 파운드. 그런데 1파운드는 대략 1500원이다.
따라서 7만 파운드면 대충 계산해서 1억 원을 넘는 금액인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 금액으로 정체불명의 금속을 샀다는 것이다.
난장판이다.
구호물품에 왜 이렇게 큰돈을 쓰며. 구호물품으로 왜 금속을 사며. 무슨 금속을 뭐 얼마나 샀길래 1억이 넘는단 말인가.
“글쎄요, 모르죠, 미쳤는지 어쨌는지.”
“본사로 송환은 못 시키나요?”
“그러고는 싶은데, 해외지사는 그쪽에서 따로 움직이는 거라 엄청 복잡하거든요.
결과적으로는 국제법에까지 발을 들여야 하는데, 그럼 저쪽에서는 불쌍한 런던시민들 살려내겠다고 발품 파는데 왜 갈구냐고 변명할 거고오?국제단체는 신나서 우리 회사를 물어뜯을 거고오?
눈에 선하죠?”
“결국 직접 가서 직접 말려야 한다는 거군요.”
“그런 꼴이 됐답니다.”
총수가 히힛 거렸다.
“물론, 내가 직접 연락을 넣어놔서 향후 일정은 다 잡혀 있어요.그러니까 우리 예쁜 큰딸이 나서서 대행을 좀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장녀라고 낳아놓은 건 도저히 말을 안 들어서. 우리 꼬마한테 맡기게 됐네요?”
잠시 침묵했다가, 가급적이면 목소리를 낮추어서.
“지금 이런 질문 드리기 죄송스럽지만, 직접 가시지 않는 이유를 여쭈어볼 수 있겠습니까?”
“별 건 없어요.”
총수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뭐어, 기본적으로는 국내에서의 일이 바빠서지. 나진 씨도 잘 알겠네. 파계지점 따위의 징조도 없이 고등급 파계종이 둘이나 나타났으니까, 그걸 연구하는 랩을 통솔하고 있어야 해서.”
다시 조소.
“그리고 굳이 하나 더 계산에 집어넣자면, 그래요, 우리 꼬마가 이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요.”
도전적으로. 그 꼬마의 면전에서.
들으란 듯이.
그 독기를 융화하듯 총수는 온화한 얼굴로 랑을 돌아보았다.
“물론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암만 그래도 찝찝할 수밖에 없잖니? 수학여행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면 이해가 갈까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어머, 기쁘네요.”
눈웃음.
저의가 담긴 웃음이었다.
“이해가 됐으면 잠깐 담배라도 태우고 오지 그래요?”
“어어…… 아, 아셨습니까?”
“그이가 흡연자라서. 피우는 사람들은 티가 나는 부분이 있으니까.”
창피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괜찮다고 사양하려다가,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냥 수긍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얘기가 거기까지 돌자 뒤를 돌아보니 웬 메이드.
당황해서 긴 치마를 가만히 훑어보고 있는데 메이드는 반응도 없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뒤늦게 따라오라고 알려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긴. 어디서나 피워도 되는 분위기가 아니긴 했지.
그런데.
“따라가려고?”
총수가 지적한 대로 랑은 조용히 일어나 이쪽으로 종종걸음을 걸었다.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왜 이러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표정이 좋지 못하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기울었다.
이 녀석도 총수의 말들에서 이런저런 의도를 느꼈나?
그런 눈치가 있는 녀석이 아닌데.
잠시 내려다보았다가, 총수 쪽으로 목소리를 냈다.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아, 올때는 나진 씨 혼자 오는 게 낫겠네요. 아까 말했지만 따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알겠습니다.”
“담배 태우는 데는 데려가지 마요.”
웃음을 지어줬다.
“너무 어리죠.”
“맞아요, 너무 어리지.”
웃음이 걷혔다.
미팅룸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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