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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34화 (34/112)

〈 34화 〉 006. 쪼그마한 게 발랑 까져서는 (4)

* * *

그날은 짐을 모조리 옮긴 날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양이었다.

구식 노트북 한 대와 전공서적 몇 권. 옷가지와 식기 및 세면도구가 전부.

침대로 사용하던 소파나 책상 모두 사무실에 귀속된 국가의 소유물이었다. 까닭에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캐리어 몇 개에 가득 들어차는 정도였다.

그에 반해서 집의 넓이는…….

평수로 따지자면 50평 내외.

이곳은 ‘본가’가 아니니 사용자는 랑과 폴트 둘뿐이었을 것이다.

무슨 방목해서 키우는 소떼도 아니고 이 넓은 공간을 어떻게 써먹었을까.

전체의 절반의 절반만 줘도 나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거실의 한쪽 전면이 유리창으로 돼 있어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전경이 뭐랄까, 아름답다기보다는 구슬플 지경이었다.

랑의 안내에 따라 내 방에 짐을 풀었다.

원래 폴트가 쓰던 방이라는데, 그 설명이 없었다면 아무도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딸려 있는 붙박이 장롱과 아무런 특징도 없는 회색 탁상과 침대 정도가 놓여 있는 가구가 전부.

사람의 흔적 같은 게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도와주지도 않고 랑은 훽, 자기 방으로 가겠다며 달아나 버렸다.

멍하니 침대에 앉았다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여덟 시. 저녁은 먹지 않았다.

랑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식성을 고려하면 먹었더라도 또 준비해주는 게 좋을 것이다.

성장기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그건 전임자인 폴트가 내게 몰래 전해주고 간 것으로, 기존의 하루일과가 나열된 일종의 시간표였다.

꿀팁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라는 친절한 메시지도 빼곡이 적혀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은 저녁을 내가 ‘직접’ 해줘야 한다는 것인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한 탓에, 그리고 1년 정도 자취를 한 탓에 요리라면 자신이 있다.

하지만 상대방은 가난한 대학생이 아닌 재벌 2세로, 모르긴 몰라도 호텔주방장급의 요리사들을 손짓 하나로 부려먹을 만한 녀석이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뭐, 지금껏 먹고 다닌 모습을 보면 식사의 품격보다는 그냥 자기 먹기에 좋은 걸 골라 먹는 스타일이라는 건 알겠다.

제는 내가 만든 것들이 저 녀석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는 거지.

“허어.”

갑자기 솟아오르는 자괴감.

지금껏 내 눈에 폴트는 랑을 졸졸 쫓아다니며 말상대를 해주거나 같이 맛집투어나 하는 대강대강의 메이드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는지도.

자고로 공짜로 버는 돈이란 것은 없고…….

나는 어쩌면 지독히 어려운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들 무렵.

빼꼼.

후다닥.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은발이 뻗쳐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은발의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랑이었다. 녀석은 몇 십 초 정도 지나서 다시 같은 위치로(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방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빼꼼.

난데없는 머리카락의 출입 이후 그쪽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당연히 랑과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랑은 화들짝 놀라더니, 아까보다 더 재빠르게 도망쳤다.

이번엔 후다닥이 아니라 호다닥이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이쪽에서는 뭘 하고 있는지 다 보이고.

“할 말이라도 있어?”

그렇게 물으니, 문간 너머로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중학생들이 나를 괴롭히는 느낌인데.

“배가 고파서 그래? 마침 그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식사는─”

“어떤 것.”

예?

끊어내는 세 글자의 톤이 매우 이상했다.

흡사 노래방 삑사리처럼 끝의 음이 갈라지는.

자기도 이상하다고 깨달았는지 흠흠 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바, 방은 어떠냐구.”

“예전에 살던 원룸보다 조금 넓은 거 같은데. 엄청 좋아. 근데 너 안 들어오고 뭐하냐?”

“존댓말 써.”

침묵.

“무슨 의미……?”

“존댓말 써. 생각나서 말해주러 왔어. 폴트는 존댓말, 썼으니까.”

“저기, 일단 들어와서 얘기를 좀.”

“얼른 써.”

“예. 됐으니까 들어오세요.”

“우, 우와, 우와우와…….”

원활한 소통을 포기하고 우선 요구에 따라주자 랑은 동물원에 처음 간 어린애처럼 감탄했다.

근데 얘 진짜 동물원 못 가봤을 거 같은데. 사회성이.

어쨌거나 랑은 들어오라는 대로 내 방 안에 들어왔다.

다만 옷이 달라져 있었다. 잠옷. 예전에 사무실에서 한번 봤던 복장이었다.

물론 그때는 비몽사몽간이었던 데다가 지금처럼 비교적 화목한 사이가 아니어서 딱히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지금 보니 프릴이 잔뜩 달린 게 어린애 스타일이다.

저것도 사회성을 깎아먹는 요인 중 하나이겠군.

내 열다섯 살 무렵을 회고하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어, 저도 폴트처럼 말하고 그래야 하는 건가요.”

“으, 응! 오싹오싹해!”

그렇게 말하는 랑의 눈동자에 영 순수하지 못한 감정(=가학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곧 곤란하다는 것처럼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곤.

“그, 근데 이러면 안 되는 것? 친구니까? 친구끼리는 반말이야?”

“글쎄요?”

그러게. 생각해보니까 관계정리가 조금 꼬였다.

떠올리기 창피한 기억이지만 내가 얘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선언한 바가 있다.

그런 주제에 고용인이 됐다.

“폴트는 어땠나요?”

“그, 그게에…….”

시종일관 가학심에 물든 눈빛으로 이쪽을 흘기며 랑은 주춤주춤 다가왔다.그러더니 내 옆에 앉았다.

물론 옆이라고는 해도 상당한 거리를 둬서 거의 침대 끝이었다.

“폴트는, 폴트는 반말을 제대로 못해서 그냥 존댓말을 하게 뒀어.”

“어…… 근데 저는 아시다시피 반말을 멀쩡하게 구사하는데요.”

“그, 그러면 어떻게 하지?”

랑은 베라에서 아이스크림 메뉴를 고르는 듯한 태도로 기대감에 차서 중얼거렸다.

식성을 생각하면 동물원이랑은 다르게 아마 베라 정도는 가봤겠지.

가까스로 사회성 1포인트를 적립한 걸로 하고.

“폴트는 친구였어?”

넌지시 물었다.

지난번에는 자기 입으로 친구를 만드는 게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랑은 폴트와는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고용주를 배려하는 폴트의 기질 덕분도 있겠지.

그래도 둘은 즐거워보였고 또 좋은 친구처럼 느껴졌다.

“……응.”

랑 본인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친구일 수 없는 것. 폴트는 엄마의 명령으로 언니를 다치게 하려 했으니까.”

“독립심을 기르겠다는 의도는 매우 좋은데, 그와 별개로 그 의도 때문에 인간관계를 절단하는 건 바람직하다고만은 할 수 없겠는데.”

“응. 그래서 폴트를 원망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결심했으니까. 언니를 우선순위에 두기로.”

랑은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걸 참았다.

나는 고용인이다. 허락이 필요하지.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고.

그러니 잠시 헛기침을 하고.

“이야기가 딴 길로 샜는데, 나 그냥 반말해도 돼?”

“응. 친구니까.”

그렇게 답한 랑은 다시 조금 헷갈린다는 얼굴로.

“근데 내가 존댓말로 하라고 할 때는 하는 것.”

“그 정도 눈치는 있지.”

신세를 따지자면 집사 같은 신분이다.

격식 있는 자리에서 주인에게 버릇없이 반말을 내뱉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관계정리와 말투정리는 끝났고, 식사만 남은 건데.

“시켰어.”

“예?”

“반말로 하라니까.”

“아, 이건 그냥 버릇. 근데 시켰다니?”

“짜장면.”

허어.

“탕수육도 같이.”

“몸에 안 좋아. 여기 폴트가 주고 간 식단표 같은 거에는 영양가가 떨어지는 건 먹이지 말라고 적혀 있는데?”

“그, 그러니까 시킨 것! 식단 독재자가 사라졌으니까 마음껏 먹을 거야!”

“식단 독재자고 나발이고 너 그런 것만 먹다가는 살찐다.”

“아, 안 찌는 체질이야.”

확실히, 먹어대는 양에 비하면 몸은 마른 편이다.

저 또래에는 오히려 조금 통통한 편이 건강에도 좋고 성장에도 이롭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흠. 얼마나 먹여야 랑을 통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식품영양학적인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넌 어려서 잠깐 안 찌는 거야. 그리고 칼로리가 높은 거랑 별개로 몸에 안 좋으니까 안 된다는 거야. 다시 말하지만 살 찌는 거 한순간이다?”

“살찐 사람은 싫어?”

“누가 살찐 사람을 좋아하겠냐. 너는 내가 살찌면 좋겠니?”

“나,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

“특이취향이네. 근데 나는 싫어. 대부분의 사람들도 싫어할 거고.”

“……그러면 시킨 거 취소할게.”

의외로 매우 순순하군.

하지만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보면 안쓰럽다는 마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됐어. 딱 하루만 먹는 거라면 뭐 문제 생길 일도 없을 거고. 대신 내일부터는 멋대로 이런 거 시켜먹으면 안 된다?”

“으, 응!”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초인종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계산은 랑이 했다.

갑자기 생긴 내 수입에 비해서도 랑의 재산은 비대하다. 그마저도 용돈으로 받은 불로소득이므로 아무런 도덕적 죄악감 없이 계산하게 내버려뒀다.

다만 낯선 사람(=배달원)과 대화할 때 더 특이하고 더듬거리게 변하는 랑의 말투만큼은 죄악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꼭 저 말투나 성격을 교정해주자고 마음 먹었다.

으음. 그러고 보면 마베 꼬마를 대하는 한월이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은데.

몹시 고달프군.

“그렇게 좋냐?”

“그야 이런 건 폴트가 계속 못 먹게 했으니까…….”

고작 짜장면으로 기뻐하는 걸 보면 앞으로 먹여 살리는 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그런 낙관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양판소에 자주 등장하는 ‘우오옷? 뭐지 이 음식은?’ ‘아아, 『김치』라는 거다…….’ 시츄에이션을 보는 듯한.

실상은 불량식품 먹고 좋아하는 어린애의 그것에 가깝지만.

“뭐, 연수기간 내내 그런 음식만 먹게 될 수도 있는데.”

“으응, 그건 좀 어려운 것.”

“어려워? 왜?”

“너, 본가에 가야 해.”

툭, 나무젓가락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뭉툭한 소리를 냈다.

“본가라니 되게 부담스럽네. 거기서 수업을 받는 거야?”

“수업이라고 할 건 없어. 폴트가 전해준 대로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인지 확인을 하겠다고 해서…….”

“확인이라니, 누가?”

불길한 예감.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라는 건 일반적으로 맞아떨어지는 법이다.

“엄마가.”

툭.

이번에는 나무젓가락이 중간에서 부러지는 소리였다.

그렇다.

그날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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