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006. 쪼그마한 게 발랑 까져서는
* * *
그날은 휴대폰의 연락처를 정리하려 마음먹은 날이었다.
퇴원한 이후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소집 해제되었다.
누가 공공기관 아니랄까봐 구차한 어휘를 사용하며 나를 붙잡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그저 써오라던 서류 몇 장을 제출했고, 그것으로 도로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치거나, 혹은 정말로 사망하는 길앞잡이 몇몇을 보며 ‘나도 도망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암만 그래도 의무복무인데.’ 하며 고개를 내젓곤 했다.
그런데 고작 서류 몇 장에 청산되는 관계였다니
이럴 거면 진작 도망치는 거였는데.
이후 며칠간, 랑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말버릇만큼이나 황당한 녀석의 온라인상의 말투에 관한 묘사는 생략하기로 하고, 내용만 요약적으로 진술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너는 채용되었고.
일주일간 연수 기간을 가진다.
그 다음에는 함께 출국할 예정이니 알아두도록.
진짜 이따구로 나왔다.
채용 과정에서 온갖 어려움이 있었다느니.
같이 출국을 하기 위해 연수 기간을 억지로 줄였다느니.
그리고 돌연 출국을 결심한 것은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 위한 노력의 증표였다느니.
그런 기특하지만 사소한 일들도 랑의 온라인상 말투와 마찬가지로 넘어가고.
결과만 놓고 말해,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로 나는 머즐드독스의 직원이 돼 있었다.
이제부터 폴트가 그랬던 것처럼 랑에게 존대를 해야 하는 것인가 어떤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잠시.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폴트는 뭐하고 있으려나.
마지막 병문안을 왔을 때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문득, 그 여자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언젠가 받아뒀던 명함을 떠올려 전화번호를 찾아냈을 무렵.
그 무렵 나는 내 휴대폰 안에 잠들어 있던 몇몇 연락처도 함께 발견했다.
길앞잡이 시절의 관계자들. 날 손짓만으로 부리던 인간들.
물론, 미련 없이 지워버렸다.
뭐,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보지 않을 사람들이니까.
내가 비록 군대는 안 다녀왔지만 군대에서 얻은 인연이 사회생활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유비추리에 근거해 감히 확언하는데, 공익 생활에서 얻은 인연도 내 앞길에 하등 도움될 일이 없으리라.
그래서 정말로 망설임이고 뭐고 없이, 과거의 잔흔 같은 그 연락처 전부를 없애버렸는데.
딱 하나가.
[한월이]
딱 하나가 남게 된 것이었다.
“흠.”
계산적인 머리를 굴려보았다.
랑과의 연락을 통해 듣게 된 사실인데, 앞으로 내가 담당하게 될 임무는 랑의 업무보조와 경호라고 한다.
업무보조는 뭐, 그 꼬맹이가 써재낄 서류 몇 장 다듬는 것이니 기나긴 유사공무원 생활의 경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고 치자.
경호라니. 새삼스레 말하지만 나는 철학과 나왔다.
취업 휴학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지만 아무튼.
경호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월을 비롯한 뛰어난 지정능력자와의 인연은 도움이 된다. 경호원 노릇을 하려면 한월과의 연락처는 살려두는 편이 옳다.
속물적인 인간관계라고? 돈 받고 경호 업무를 맡는 주제에 고용주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에 있단 말인가.
머리 아프네.
이 부분에서 가치판단은 패스하겠다. 철저히 계산적으로 굴겠다면 다른 공무원 전화번호도 신줏단지 대하듯 고이 모셔놔야 했을 테고.
그러니 다음으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적인 머리를 굴려보았다.
한월은 좋은 녀석이다. 녀석과 나의 위치를 감안해보면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그 녀석이 나에게 존중감 같은 것을 보일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한월은 젠틀하게 행동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 동갑이었다면, 그리고 사회에서 만났다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으음, 하고 망설이는 도중.
위이잉─── 진동.
문자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뭐랄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해야 할까.
한월이었다.
형, 저예요.
일을 그만두신다고 하셨기에 연락을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이건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문자 보내요.
저희가 마주한 하젠야크트는, 독일에서 발견되었을 때와 모습이, 외관이 달랐어요.
게다가 휘두르는 능력도 달랐어요. 이번에는 예전처럼 광범위한 피해를 입히지 않고, 아마 형도 보셨겠지만 이상한 가시 같은 걸 불러내는 단순하고 국소적인 공격을 취했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에 뭔가 저지르려고 했지만, 그전에 승도 아저씨가 해치워서 정확히 어떤 식이었는지 알 수 없어요. 어쨌거나 저희가 목격한 모습은 그때의 하젠야크트와는 달라요.
저도 이 이야기는 며칠 전에 들었어요.
추측하기로는, 아마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 증언이 있어요. 또, 승도 아저씨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간단히 처리돼서 찝찝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고요. 어쩌면 완전히 처리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공백.
이 문자를 드리는 건 저희와 함께 일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저도 유한테서 사정은 대강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다만, 알아두셨으면 좋겠어요.
창피한 얘기지만, 저는 파계종 때문에 죽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제 탓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요.
형은 그러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라고, 보내드려요.
공백.
날짜 표기.
잠시 침묵.
계산적으로 생각해보았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마지막으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보았다.
나는 흘끗, 이름 아래에 떠오른 전화번호를 쳐다보았다.
혹여 그것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외워버리기 전에 나는 다급히 한월의 연락처를 지워버렸다.
나는 너와 달리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하지 못하므로.
***
그날은 사무실에서 짐을 빼는 날이었다.
억지로 복무 당하면서도 정이 많이 붙은 사무실이었기에 제법 아쉬웠다.
소유주는 여전히 국가이므로 아마 다른 길앞잡이 대원 혹은 정식 고위지정자들이 사용하게 되겠지.그들이 이 사무실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아주는 날이 과연 올까.
대학 원무과에서 휴학문제로 기나긴 논쟁을 벌이고 돌아와 기절하듯 잠든 일…….
파계지점이 사라질 때까지 밤새도록 일하다가 돌아와 기절하듯 잠든 일…….
같은 건물에 웬 교복 입은 녀석들이 지정능력자랍시고 나타난 날 부러움에 기절하듯 잠든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네, 이런 이야기들.
영 좋지 못한 이야기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짐을 옮겨야만 했다
어디로 옮기냐고 하면, 아마 랑의 집이다.
여기서 집이란 단어가 폴트와 랑이 공유하던 ‘본가’라는 단어를 뜻하는지, 아니면 인천에 소유하고 있던 그 빌딩을 뜻하는지는 랑도 모르는 눈치였다.
본가로 돌아갈지 계속 인천에 머무를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다고.
다만 어느 쪽이든 랑은 내가 그녀의 거주지에 따라가야만 한다고 장황하게 주장했다. 내 신세는 경호원도 비서도 아닌 ‘집사’이니까, 자택 안에서도 이것저것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당장 오늘부터 연수기간을 시작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집에라도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룸을 구할 돈을 아낄 수 있다면 그거야 두 팔 벌려 환영이다.
다만 만에 하나라도 그 본가라는 곳에 끌려가게 되는 거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아마 랑의 어머니, 그러니까 지금 내 최종 고용주가 된 제갈무라는 여자가 거기 있을 테니까.
암만 그래도 그 사람과 함께 숙식할 자신은 없었다.
그런 내 마음과 별개로 일단 나는 고용된 신세고……. 돈에 예속된 노예 같으니…….
“우울하게 있으면 뭐하냐.”
중얼거린다.
상큼한 마음으로 이제는 ‘언젠가 머물렀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된 사무실의 문을 열었고.
떡볶이를 나눠먹고 있는, 신라에 망명했다는 제갈공명의 친척 제갈규의 후손 둘과 마주했다.
“너희들 뭐냐?”
“엇, 오빠! 늦었네요. 항상 늦는다니까.”
“빨랐던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언니 쪽이 먼저 활기차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바리바리 싸들고 온 캐리어와 가방 따위를 내려놓았다.
“언제 왔어?”
“한 시간쯤 전에요.”
“어떻게 알고?”
“다아 방법이 있지요.”
아이고. 그러냐.
딱히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긴 하다.
둘이 화해하는 장면까지 내 눈으로 목격했고 지금은 간식까지 함께 먹고 있잖아. 모르는 새에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봐야겠지.
일단 랑에게는 오늘 짐을 뺄 거라고 언질을 놓아 놨으니까 그게 결국 유에게 전달된 것이다.
“근데 뭐, 너는 사무실이 이 위층에 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동생까지 데리고 왔네?”
나는 둘이 앉은 맞은편 작은 의자에 자리를 잡고, 떡볶이 하나를 찍어 먹으며 말했다.
물론, 랑에게 말한 것이다.
저번 병문안 이후로 랑을 직접 대면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봤자 입원은 닷새인가 했고 그 뒤로 이제 겨우 며칠이 지났으므로 일주일 정도 못 봤을 뿐이지만.
다만 뭐랄까. 실제 기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기분이다.
어째서인지 저쪽에서 나를 피하고 다닌다는 느낌도 들었고.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우선 고용을 취소했겠지. 무엇보다 지난 일주일만큼 적극적으로 카톡질을 해대진 않았을 터였다.
이 일주일간, 하루에 두 시간씩 빠지지 않고 랑과 카톡 수다를 떨었다.
“야.”
내가 흘깃 랑을 부르자, 랑은 어깨를 움찔 떨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허어.
움츠러드는 모습이 15살이라는 실제 나이보다도 상당히 어리게 느껴진다
체감상으로는 한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되는 것 같단 말이지.
10대 초중반에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부쩍 큰다. 이 무렵에 두 살 정도 어리게 보인다는 건 상당히 덜 컸다는 뜻이다.
아니 뭐, 나이에 관한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문제는 지금 랑이 내 목소리를 듣고 저렇게 위축됐다는 건데…….
유에게 시선을 돌리자, 민망한 웃음만 돌아왔다.
유는 망설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오래간만에 봐서 좀 어색한가 보네요.”
랑이 유의 허리를 살짝 움켜잡았다.꼬집는 동작이었다.
나름 몰래 한다고 은밀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중간에 가리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라면 맞은편 사람에게 다 보인다고. 그걸 생각 못 하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인사를 못하면 어떻게 해. 내일부터 연수기간이라며.”
일어서서 랑 앞에 다가갔다.
인기척에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린 랑의 뺨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다행히 시선을 마주치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 단계가 필요하겠지.
“손.”
나는 내 쪽에서도 손을 뻗으며 그렇게 말했다. 랑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강아지가 아닌 것.”
“악수 모르냐, 악수.”
“그러면 악수라고 햇…….”
툴툴거리는 건 여전하구나. 어디 아프지는 않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어쨌든 랑은 악수를 다했다.
정말 대단해~ 하고 칭찬해주기에는 좀 과다하게 가벼운 과제로군.
하지만 이렇게라도 사회성을 길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보호자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언니 쪽에서도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거봐. 내가 밀어준다고 했지?”
“언니, 알아듣겠어…….”
랑은 아까보다도 새빨갛게 홍조를 띄운 채로, 웅얼웅얼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니 쪽에서는 흐흥~ 하며 코웃음을 쳐댈 뿐이었다.
동생 쪽은 약이 오르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들거릴 뿐이고…….
이렇게 보면 정말 평범한 자매잖아.
그런 주제에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서로 투닥거렸지.
다시는 그러지 않으면 좋겠네, 하는 짧은 감상을 남긴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못 보겠네.”
마침 한 자리에 모였겠다, 필요한 화제를 꺼냈다.
방금까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던 유도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영국으로 떠난다면서요?”
“고작 몇 주겠지만, 글쎄, 확인을 해보니까 그쪽 지부 피해복구 때문에 가는 거라며?”
언젠가 말해뒀던 것이지만, 런던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는 파계종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크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시작해 냉전 시기까지 전쟁을 긴 평화가 지속됐던 동네이기에 방호시설이 부족했던 탓이 크다.
물론 영국이 런던 하나 망가졌다고 아예 망할 정도의 소국은 아니다. 게다가 피해가 극심했던 런던도 많이 복구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재해 현장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머즐드독스의 그쪽 지부도 도시 재건을 중점적으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그 책임자가 일단은, 윌리엄 맥걸린이라는 남자라고.
그쪽에서 복구 작업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고 있어) 본사와 조율이 필요한 상태다.
즉, 랑은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기업 내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파견되는 것이다.
물론, 숙련된 기업인과 1:1로 협상해 성공할 만한 능력이 랑에게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실제 협의는 랑의 모친이 하고 대강의 허울만 내세우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표가 되겠지.
“약속은 받아뒀어요.”
유는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상식적인 선에서라면 복구 작업을 돕는 쪽으로 발언을 하겠다고. 동생한테 이런 역할을 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그때 약속했으니까요. 정의로운 머즐드독스.”
“이쪽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볼게.”
“그래요, 부탁드려요. 솔직히, 이 녀석 혼자 보내는 거였다면 못 미더웠을 거예요.”
“어, 언니는 별 소리를 다 해…….”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걱정해서!”
하여간에, 평범하게 투닥이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아무튼 영국이라.
그러고 보면 폴트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영어와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인재는 생각보다도 드물어서.
뭐, 일단은 나도 기초 회화는 된다. 전문 통역가도 구했고.
암만 그래도 자주 보던 사람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간 듣자하니, 폴트는 총수의 명령에 따라 저질러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듯하다.그게 내가 폴트의 대신 고용된 이유라고 랑은 설명해줬다.
석연찮았다. 사람 자체는 매우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고용된 신세에 지나지 않았고.
평생을 누군가에게 봉사하는 메이드로 살아온 대가가 그것이라면 잔혹하다.
그런 식으로 내 맘대로의 정당화를 시도해본다.
마음 속으로만.
“그래도 아직은 일주일이나 남았죠?”
“뭐, 일주일 정도는 진짜 금방 가지. 게다가 연수기간이랍시고 이런저런 수업 같은 것들도 들어야 하는 모양이고. 너도 그런 거 들어 봤어?”
“가풍이죠, 그 정도는.”
나는 너희들 가문 사람이 아니란 점을 주의해줬으면 좋겠고요.
“그런데 오빠, 사무실에서 짐을 지금 빼면 당분간은 어디에서 머무르시게요?”
“응? 그 얘기 못 들었어?”
“네에? 당연히 못 들었죠. 오빠가 어디서 거주하는지 제가 어떻게 아냐구요.”
“아니, 저 녀석 집에서 잘 텐데.”
잠시 침묵.
“저 녀석이요?”
“네 옆에 있는 녀석. 네 동생.”
“제 동생.”
“응, 네 동생.”
다시 침묵.
이번에는 조금 길게.
부드러웠던 유의 표정이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뭔가가 다르게 부드러웠다.
이건 부드러운 것이 아니고, 뭐랄까, 터지기 직전의 부드러운 빵이 부풀어오르는 듯한…….
“둘이. 같이. 일주일동안. 한 집에서.”
“그렇게 됐어, 어쩌다보니까. 사실 사무실에서 나가는 건 좀 미룰 수 있었는데, 네 동생이 자꾸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오빠.”
“응?”
“잠깐 나가 계세요.”
지금까지의 대화를 긴장한 채 듣고 있던 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호소하듯 이쪽을 쳐다봤다. 제발나가지말아주세요부탁드립니다당신이나가면저는어떻게될지의사도무당도누구도장담할수없습니다제발나가지말아주세요, 하는 텔레파시가 찾아왔다.
나는 잠시 유를 돌아봤다.
앗.
응응. 나가야겠다.
캣워킹으로 자연스럽게 탈출했다.
이윽고 이런저런 투닥거리는 소리.
정확히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혼내는 듯한 소리.
대강 정리하자면.
얘가 미쳤어, 미쳤어! 열다섯 먹고 발랑 까져서! 뭐? 그래놓고서는 도와줘? 도와달라고? 내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다 하겠구만! 너 진짜 그 사람에게 말은 했어? 아니, 말씀은 드렸어? 오빠가 너희 집에서 머무른다고?
그, 그게, 말은 했는데 알아서 하라고…….
내가 진짜 이 성씨 달고 못 산다, 못 살아! 어렸을 때는 죄다 제갈량이라고 부르질 않나, 출석 부르던 선생님까지 웃질 않나! 겨우 좀 이러고 사나 싶었는데 이제는 열다섯 먹은 동생이 열다섯 먹고 발랑 까졌어?!
으음, 도망쳐야겠네.
아니다, 이건 내가 널 혼내서 끝날 일이 아니야. 당장 가서 오빠 데려와!
기왕이면 담배 필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