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005. 내가 가는 수밖에 없네 (3)
* * *
착지했다.
나와 랑이 겹쳐서 수풀 위에 떨어졌다. 높이는 1미터가 조금 넘었기에 너덜너덜해진 나는 몰라도 랑에게는 별다른 통증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친절한 배려는 분명 바롱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수풀이 아니라 바위 위에 떨어졌더라도 이것이 나았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감각이 발아래에서 머리끝까지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떻게? 하고 떠올린 것은 잠시 뒤의 일이었다.
“잘 버텼어요.”
내 앞으로 소녀가 버티고 섰다.
늘 입고 다니는 교복 치마와 블레이저, 다만 손에는 곧게 뻗은 지휘봉이 아닌 나뭇가지가 쥐여 있었다.
소녀는, 랑의 언니는 나뭇가지를 사뿐하게 휘둘러 옷에 달라붙은 먼지를 치워냈다.
이 반가움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보다도 먼저.
“언니!”
쪼르르 랑이 유에게 달려갔다. 염동력의 출력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진 나뭇가지를 바닥에 버리다가 유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동생을 맞이했다.
아직까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유는 랑을 떼어놓아야 했다.
하지만 랑은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라서.
유는 가볍게 랑을 끌어안고, 내려놓았다.
“왜 이렇게 늦었냐.”
“사정이 있었죠.”
“무슨 사정?”
“그 금발이 썅년이었다고 할까요.”
“전혀 못 알아듣겠네.”
나중에 묻기로 하자.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러나 유는 잊지 않고 내게까지 손을 뻗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손을 붙잡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유는 넌지시 물었다.
“아무거나 좀 튼튼하고 길쭉한 것 좀 주세요.”
“클로 날 하나 뽑아주면 되겠지?”
“얼른요.”
그렇게 했다.
날을 받아든 유는 그것을 허공에 대고 휙휙 휘둘러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그런데 어떡하려고?”
“뭐가요?”
“아니, 어쩌려고 왔어?”
“딱 보면 몰라요, 지금 분위기?”
“어떤 분위기인데.”
“글쎄요? 꼭 말해야 알아요?”
“꼭 그럴 필요는 없고.”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지금을 정의하기로 했다.
[무구지정: 서곡Overture]
[무구지정: 뒤틀림날]
“미친 새끼들.”
바롱이 신음했다.
새카맣게 변색된 놈은 아마 인간으로 대입하자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에 다다른 것 같았다.
하나밖에 없는 눈동자를 흉흉하게 굴려대며 바롱이 양손을 들었다.
방어기제는 이미 해제된 상태. 놈에게는 오로지 우리 둘과 랑을 없애고 말겠다는 증오심 외에 무엇도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하젠, 하젠야크트 그 새끼는 뭘 어떻게 한 거야! 분명히, 내가 분명히 새카만 칼날들의 발을 묶어놓으라고 말했는데, 그 멍청한 새끼가!”
“발은 지금도 묶여 있죠.”
유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선택했어요, 하젠야크트에게 가는 대신 이곳으로 오겠다고.”
“선택했다고? 네가? 정의는 어디로 가고?”
바롱이 스스로의 안면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제스처인 마른세수와는 격이 달랐다.
부드득, 소리를 내며 바롱의 얼굴 피부가 찢겨져 나갔다.
그러나 고통을 모르는 듯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신체적인 아픔보다 더 뜨거운 분노에 이글거리며, 바롱은 악을 써댔다.
“너는! 정의를 바라던 것 아니었냐?! 그 이상을 위해, 정의를 위해, 너는 새카만 칼날들의 일원이 되었다! 재물과 가족을 버려서 너는 영웅의 보조자가 되었는데!
그런데도! 너는! 이 도시를 파괴할 괴수를 방치하고, 혐오스러운 혈육을 지키기 위해 왔다는 거냐아아아!!”
“맞아요.”
부드럽게, 유가 지휘봉을 휘둘렀다.
정원을 장식하고 있던 벤치 몇 개가 허공으로 몇 미터 떠올랐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내리꽂자, 벤치는 사냥감을 찾아낸 개처럼 맹렬하게 바롱에게 날아들었다.
쿵. 쿵. 쿵. 세 차례의 먼지폭풍이 일었다. 방어막을 두르지 않았던 바롱이 휘청거렸다.
유가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도시를 구하는 것보다 내 동생을 구하는 걸 택했어요.”
“널 죽이는 게 나았다.”
바롱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어리석었어. 나는 너를, 너를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너를 살려주겠다고 관대한 처사를 내릴 때는,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나의 불찰, 나의 잘못, 이제라도 바로잡겠다!”
바롱이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폭발. 이어지는 것은 연쇄. 끝내는 것은 소음.
무시무시한 압력이 공기를 가로지르고 굉음과 뒤섞이며 하늘을 찢어발겼다.
그 염동력은 감히 유가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어서.
[행동지정: 매우 강하게Fortissimo]
유가 가진 가장 강한 힘으로도 간신히 버티는 게 전부가 되는, 끔찍한 위력을.
나는 가로질렀다.
바롱의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그것이 바롱의 남은 힘이었다.
눈동자가 굴러가는 즉시 이쪽에게도 기묘하고 고통스러운 감각이 내리꽂혔다.
채 아물지 못했던 상처가 다시 터지려 한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몇 걸음을 더, 내딛고 내딛는다.
바롱은 거칠게 양팔을 내려놓았다.
포기했나, 하는 의문.
그러나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다만 바롱은 힘의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집중되는 위압이 불안정하게 일렁거렸다. 목표지점은 정원 중심의 분수대. 폭으로 따져 45미터를 높이로 따져 67미터를 넘는 석재 구조물을 통째로 바롱은 뽑아냈다.
그 순간 놈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게 됐다. 랑에게 닿지 못하고 돌아오는 것은 바롱의 권능인 염동력 그 자체에만 한정되므로, 다른 무엇인가를 집어던져 간접적으로 랑을 죽일 수 있다는 발상을 바롱은 떠올린 것이다.
“랑, 피해!”
유가 새되게 외쳤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지휘봉의 방향을 틀어 분수대를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곧, 유는 나를 돌아봤다. 그 얼굴이 절망으로 젖어 있었다.
바롱이 양손을 모두 사용해 내던지는 거대구조의 무게는 유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바롱에게는 빈틈이 생겼다. 그러나 이대로 달려들어 바롱을 처치하면 중력에 의해 분수대는 바닥으로, 즉 랑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이어서 분수대에 들어차 있던 물이 쏴아 쏟아지는 것을 보고 나는, 다른 무엇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뛰어들었다.
“윽……!”
유가 쏟아내는 염동력과 나의 등이 동시에 분수대를 막아냈다.
그러나 바롱은 바롱 나름대로 힘을 더해, 분수대는 부서져 흩어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했다.
척도를 써 표현할 수 없는 육중한 무게감이 등을 짓누른다.
랑은 내 밑에 깔려 있었다.
“키앗, 키아하하하핫! 압슬형! 압슬형이다!”
바롱이 선고했다.
그러나 나는 그딴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소리 따위에 쏟을 정신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몸과 함께 억눌리는 의식 사이로 중얼거렸다.
쓰러질 수 없다. 쓰러져서는 안 된다. 쓰러지지 않는다. 아니, 무엇보다도 쓰러지고 싶지 않아.
겨우 이제까지 버텼는데,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쓰러진다니.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나의 등 위에 덧씌워진 무게추가 마치 자신이 집어던진 것인 양 괴로워하고 있었다.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그럴 필요가 없어.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너는 그냥 여기 있었을 뿐이야.
그러자 소녀의 얼굴 위에 가면처럼 여자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그 여자의 이름은 최수아라고 한다.
나이는 아마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21살이었을 것이다.
나처럼 이유도 목적도 없이 철학과에 들어온 주제에 활기차고 수다스럽고 친화력이 좋아서 금방 학과에 적응했고, 그래서 자길 졸졸 쫓아다니던 1년 선배와 친해져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불행이 찾아와 그 여자는 죽음이라는 위기에 처했다.
누구도 그 여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 누구도 그 여자의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죽었고.
내 밑에는 살아있는 소녀가 있다.
문득, 소녀의 얼굴을 집어 삼키던가면이 사라졌다.
“걱정하지 마.”
그때 해주지 못했던 말.
해줘야 했던 말.
“계속 버티고 있을 테니까.”
그때 뻗지 못했던 손길.
뻗어야 했던 손길.
지금에서라도.
추레하고 이기적인 변명이라고 해도.
맹세가 닿았을까. 굳어있던 소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랑은, 내 손에 장착된 건틀릿을 해제시켰다.
“뭘 하려는 거야.”
물어도 랑은 침묵을 지켰다. 건틀릿은 금세 큐브 모양으로 돌아갔고, 다시 랑의 손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절반 정도 재조립됐을 무렵 침묵이 끝났다.
“나도.”
소녀가 입술을 앙다물고 일어섰다.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하지만 바롱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랑뿐이라는 사실을.
“놓칠까 보냐!”
바롱이 한쪽 팔의 방향을 틀었다. 그 영향으로 분수대를 내리꽂던 위압이 반쯤 사라져, 유의 염동력이 역으로 분수대를 튕겨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힘이 남게 된 바롱은 틀었던 한쪽 팔을 다시 내리친다.
“전쟁무기 따위, 망가뜨려주마!”
이윽고, 미처 장착되지 않은 건틀릿에 풍압을 가했다.
견디지 못하고 랑의 팔이 허우적거렸다. 건틀릿의 절반이 날아갔다.
같은 시간에 분수대가 저 멀리 날아가고 그 잔해가 나의 등 위로 쏟아졌다.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먼지의 잔해 속에서 나는 서 있었다.
쓰러지지 않는다.
약속했다.
계속 버티고 있겠다고.
달려 나갔다.
바롱이 풍압을 내리쳤다.
그러나 유가 바닥에 닿아 박살 난 분수대의 잔해를 멀리서 투사했다.
웅웅거리는 충격에 견디지 못한 바롱이 몇 걸음을 주춤거렸다.
그리고 다시,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
뒤이어 랑도 반이나마 장착된 건틀릿을 손에 건 채로 앞으로 다가왔다.
바롱은 한쪽 손으로 유를.
다른 한쪽 손으로 나를.
눈동자로 랑을 상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분수대의 잔해는 많이 남았고…….
심장이 요동친다.
랑을 향하던 모든 힘이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녀석이 달리기 시작했다.
바롱이 기겁하며 그쪽으로 더 강한 영압을 퍼부었다.
그러나 모두 내 쪽으로 돌아왔다. 바롱이 작전을 바꾸었다.
그는 눈을 끔뻑 감았다가 떠서 아예 내 쪽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나는.
고작 한 걸음, 그 앞에 서서 나는정의로운 파계종을 목도했다.
얼마나 정의로운가. 정의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힘을 합쳐 악을 물리치기에 그는 어린아이조차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알려줄 것이다.이곳에 있는 세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쟤더러.”
언니를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서슴지 않는 못된 꼬맹이.
대도시를 파괴하는 괴물을 방치하고 동생을 구하러 온 비열한 고등학생.
자기 생명을 도외시하고 친구를 살리기 위해 버틴 미친놈.
“싸우라고 시키겠냐.”
너는 ‘우리’가 아니라 ‘나’를 상대해야 했다.
“무슨……!”
바롱의 동공이 달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본능에 근거한 중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지정: 불굴]
쓰러지지 않는다.
“이딴 조연들에게──”
마지막 걸음을 내딛었다. 바롱이 절규했다.
바롱의 팔이 유가 내던지는 수많은 구조물에 부딫쳐 만신창이가 돼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손에는 아직 클로 하나가 들려 있고─엄밀히 말하자면 날 하나를 부러뜨려놓기는 했지만─그렇더라도.
일섬이 마지막을 갈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