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26화 (26/112)

〈 26화 〉 005. 내가 가는 수밖에 없네 (2)

* * *

나는 그 아이를.

***

“지랄 났네.”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잠시 휘청거렸다가 균형을 바로잡는다.

일단 첫째, 전제가 잘못되었다.

인류를 심판하는 거야 뭐 자기가 법모까지 만들어서 쓰겠다는데 그걸 지적할 마음은 없다.

다만, 바롱은 언젠가는 내가 쓰러질 거라고 판단했다는 것은 바로잡아주고 싶다. 나는 쓰러질 생각이 없다

오히려 지정력이고 나발이고 계속 여기서 버티고 있고 싶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다. 여기서 쓰러지는 것이 전개상 알맞든 뭐가 어찌됐든 나는 쓰러져줄 의향이 없다.

그렇게 알아두도록.

그리고 이게 둘째, 지적하고 싶은 것인데.

“많은 사람들 같은 건 없어.”

건틀릿을 쥐었다.

“난 조그마하게 자랐거든.”

건틀릿으로 클로를 쥐었다.

나의 세계는 작다. 부모님과 친척. 고등학교 동창과 대학 동기 및 선후배. 새카만 칼날들을 포함해 지정자 복무하면서 알게 된 몇몇 공무원과 인간군상.

알바 뛰면서 마주친 사람들이나 그렇게 얻은 짝사랑.

아니면 죽은 사람. 혹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서 있는 꼬맹이.

그것이 전부다.

이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열등감의 원인이 될 수는 있겠지. 나도 멀리 보고 싶다. 세계의 운명과 미래의 재앙 사이를 오가며 ‘대단한 일’을 해보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 모두를 보고 싶다.

추한 욕망에 시달리지 않고 위대한 열망에 몰두하고 싶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쁘지 않다. 나는 예전부터 이랬고,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다.

내 세계 안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좋으니까.그러니 그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

언젠가 얼굴 맞대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짧은 인연으로 지켜주겠다며 선언하는, 호의와 상냥함의 가면을 뒤집어쓴 영웅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나는 아까 약속한 것처럼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냐.”

바롱의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빠르게, 흑백색 잔상이 뛰어들었다.

곧장 피했다. 위압의 변화는 나도 알아차렸다. 저쪽은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나를 부수는 방식을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에, 철저히 스스로를 지키고 남은 힘으로 나를 쓰러뜨린다. 그런 전법이다.

상반신을 튕기듯 회전시켰다. 두 신체가 일순간 겹쳐지며 맞닿는다.건틀릿이 놈의 복부를 강타한다.

그러나 모자라다. 확실하게 느껴졌다. 때리는 감각이 지나치게 얕고, 이어서 바롱의 움직임을 저지할 완력조차 모자라다.

바롱의 긴 팔이 내 목을 스치고 그대로 그어버린다. 놈의 몸에 무형의 방패가 둘러져 있는 만큼, 그리고 그 방패가 단단한 만큼 움직여서 자아내는 충격은 강력하다.

폭발적으로, 터져나가듯 뒤로 나자빠졌다.

그대로 몇 미터를 데굴데굴 굴렀다. 목이 아프다.

손을 짚으니 액체의 감촉이 흥건해서, 땀이라는 희망 섞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식하자 돌연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됐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바롱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이제 인간적인 설득이나 연설을 그만둔 그 이계종은 소리도 없이 달려들었다. 클로를 세워 맞이할 준비를 하는 그때, 바롱은 방향을 틀었다.

이어서 랑에게 돌진했다. 시간이 수축했다가 정지했고, 곧 이완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가 먼저 뒤를 돌아 랑을 끌어안은 뒤였다.

그러나 아직 바롱에게는 양손과 짧은 거리가 남아 있었다.

바롱은 키득키득 웃어대며 내 등을 썰어대기 시작했다. 염동력처럼 몸을 안에서부터 터뜨릴 위력은 없었으나 살을 가르고 뼈를 찢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시야가 위아래로 빠르게 회전했다. 그래도 일단,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랑을 품 안에 넣은 채로 버텼다.

그래서 랑은. 그대로.

“아니야.”

랑이 아니고 내가.

내가 가로채서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이었다. 그나마 나았던 등이 긁혔으니까 영혼까지 시리듯 아파온다. 결코 어느 이상으로 다치지 않으나 아픔은 그곳에 남는다.

세상이 어둡게 변하며 적막에 잠길 듯하다.

이것이 죽음인가, 하고 얌전히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정신 나갔군.”

바롱이 감상적으로 중얼댔다. 그러나 지능적인 이계종은 이제 발톱을 휘두르지 않았다.

“상처가 돋았는데 아프지 않은 인간은 없어. 전쟁무기를 등에 업은 네가, 네가 그 남자를 아프게 하고 있는 거다!”

“그게…….”

“개소리야 신경 쓰지 마.”

“다리가 후들거리지. 배와 등의 신경이 서로를 당겼다 놓았다 하며 비틀거리게 만들지. 그게 아픔이다. 너 때문에 겪고 있는 거야! 네가 죽음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보아라! 얼마나 더 많이 아파할까, 얼마나 더 많이 죽을까. 그 남자는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여러 번 죽어갈 뿐이야!”

“그런…….”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입을 틀어막았다.

듣고 싶지 않다. 회유당하고 싶지 않다.

이 상황에 있어서 타협하고 싶지 않다. 다른 계획을 상정해서 지금의 어려움을 못 본 척 도망치고 싶지 않다.

이미 그렇게 했고,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른다고 해도, 그래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굴하지 않는다.

“핫, 하핫, 앗, 핫.”

바롱이 어깨를 떨었다.

“그 알량한 힘으로, 보잘 것 없는 육신으로! 나를! 감히 내게 맞서겠다는 거냐! 백일몽, 백일몽! 잠에서 깨어나라 무지렁이 같은 놈아!

아니지, 깨어날 것도 없겠다. 이제부터 내가 네 두개골에 자리 잡은 기생충을 뽑아줄 테니까! 어서, 어서 아프다고 짖어! 짖어야 산다, 개는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랑을 밀쳐냈다. 철퍼덕 엎어졌다.

미안, 하고 사과할 겨를 따위 없다.

바롱의 새카맣게 변한 신체가 질주했다. 그 속도를 육안으로 따라잡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했다.

클로를 들어 정지시키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허점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대로 고고한 위압을 두른 바롱의 양팔이 복부를 짓누른다.

아까보다는 분명, 약하다. 그러나 나보다 약하지는 않다.

후방으로 나뒹구는 순간에, 그저 간신히 클로로 놈의 목 언저리를 할퀴어볼 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전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난간에 기댄 채 쓰러져 있고, 그래도, 하고 생각했다. 쓰러질 수 없다.

그러니.

그래도 다시 일어섰다.

물론 바롱은 계속해서 연격을 퍼붓고 있었다. 놈이 치명적인 일격으로 나를 망가뜨리면, 나는 간신히 미약한 반격 한 차례를 먹여준다.

그래서 내 전신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지고 바롱은 흥, 하고 무시할 수 있는 생채기만 몇 번 입는다.

그것이 누적된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쓰러질 수 없는 것은.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항상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 때문에 나는 다시 일어섰고.

어느 순간, 그림자가 앞을 가렸다.

“이건 감동적이군.”

바롱이 끌어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림자의 주인은 랑이었다.

“차라리.”

랑이 입을 열었다. 아까 맺지 못했던 말. 나는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튀어나올지 대강 알고 있어서, 그게 듣기 두려워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내게 가능한 것은 얻어터지고 두드려 맞아서라도, 그래서라도 한 방 정도는 반항해보는 것.

그것뿐이어서.

“차라리 내가 죽을게.”

그 말에 어조가 없었다. 열기도 없었다.

체념하는, 그리고 푸념하는 투였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때를 알고 있었다.

부모에게 한참을 우기고 우기다가 그래도 먹히지 않아서 결국은 ‘알았어요.’하고 시들어버리고 마는, 기죽은 아이가 비로소 내뱉는 말투.

문득, 내가 저런 목소리로 말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분명해. 폴트와 대화를 할 때, 혹은 유와 수다를 떨 때에도 아니면 재인과 다툴 때에도 나는 저런 식으로 말해왔다.

여기서부터는 어쩔 수 없으니, 즉 내 영역이 아니니 물러가주겠다고.

길앞잡이가 새카만 칼날들에게 양보하듯 나는 응당 내가 떠맡아야 했던 것을 양보했다.

더는 그럴 수 없다.

거칠게, 랑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그러자 바롱이 “키득, 키드득, 크핫, 키드드드학! 아하학!” 폭소를 터뜨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나는 랑을 안은 채로 돌아섰다.

웃음 다음에 이어질 공격이 있다면 막아야만 했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간단히 쓰러지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니 내가 버틸 수만 있다면…….

“이 생각을 못했군.”

가뿐하게, 온몸이 떠올랐다.

내 몸을 지탱해주던 난간이 발끝에 걸쳤다.

옥상 정원에서 허공으로 대략 3미터. 그 정도의 높이에 나는, 그리고 내가 안아들고 있는 랑은 부유했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바롱이 양손을 높게 들은 채 서서히 휘젓고 있었다.

“이곳은 현재 65층 옥상 정원, 층당 높이를 2미터라고 가정하면 총 높이는 100미터 이상. 네놈들의 몸무게의 합계를 대략 100킬로그램이라 했을 때, 염동력에 의한 가속도까지 더해……. 운동에너지는 도대체 얼마가 될까.”

시야가 빙그르르 돌았다.

이때, 나는 랑을 내려놓든지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바롱은 지금 약간의 힘만 가감해서 얼마든지 나를 지상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랑을 놓아버린다면 내가 다시 올라오기까지 (아니, 살아서 올라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랑은 바롱과 함께, 이곳에 남아야만 한다.

반면, 내려놓지 않는다면 그녀는 나를 쿠션으로 삼게 된다. 건틀릿이 우선 부서져 1차로 충격을 흡수하고 그 다음에 내 몸이 망가질 것이다.

멋대로 희망적인 소리를 지껄여본다면 랑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견딜 수 있을까? 내가 그때도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로 치더라도 건틀릿과 내 몸이 제대로 쿠션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네놈들에게,”

이계종은 말했다.

“고전물리학을 가르쳐주마.”

심호흡을. 더 많은 심호흡을.

이윽고 한 바퀴를 회전하는 방향감각.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이윽고 어둠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글쎄, 어찌된 영문인지 공중정원 위로 돌아와 있었다.

***

나는 그 아이를.

내 동생을 구하러 가겠어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