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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25화 (25/112)

〈 25화 〉 005. 내가 가는 수밖에 없네

* * *

사실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도망칠 수 있다.

가능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도망쳐도 된다.

당위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욕망의 차원에서 말할 수가 없다. 도망치고 싶다.

아니면, 도망치고 싶지 않다.

나는.

작은 문 하나를 뒤에 두고 1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얄궂게도 그때와 지금은 거의 동일하다.누군가는 위험에 처해 있고 와야 할 사람은 오지 않는다.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 나는 이곳에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는 아직 살 기회가 있다.

더 깊게 얘기해볼까. 내가 삶을 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위험에 처한 누군가가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없다.

나는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있으면 사망자 집계수의 숫자가 하나 늘어날 뿐이고, 없으면 하나 줄어든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그 기회 혹은 강압을 받는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 일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때 내 여자친구는 죽었다. 내가 도망쳤기 때문에 죽었다, 라고 하면 재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에게 공감받지 못할 자책이 될 것이다.

두 사실은 인과관계가 없다. 내가 도망쳤고, 그녀는 죽었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고 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지 몰랐다.

알게 된 이후에도 다시 도망칠 거라고 언제까지고 부정할 정답을 늘어놓게 됐다. 하물며 몰랐던 시점에서 어떻게 맞서 싸울 생각을 했을까.

추잡하고 더럽고 제멋대로인 나는 감히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러면 너는.

너는 도대체 어땠을까.

시야를 들어올렸다. 붉은 노을이 푸르름에 뒤채이고 있었다. 하늘보다는 가까이서 별이, 별보다는 가까이서 정원이 보였다.

정원 안에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이제 도망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갈라진 가운데 도망칠 수 없는 소녀는 그곳에 있다.

“나가.”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빠져나가라는 것은, 그냥 말 그대로 이 상황에서 없어지라는 것.

나는 이 상황에서 안전하다는 사실을 랑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저렇게 우는 것 같은 목소리로, 도망치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그걸 모르겠다.

나는 랑을 종잡을 수 없다. 그때 죽은 사람을 종잡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기다리고 있을까?

같이 도망칠 궁리를 찾고 있을까, 그것조차 아니라면 이제 아무래도 좋다며 생각 자체를 중단했을까.

정지한 사고 안에서 얼마나 큰 두려움을 맛보고 있을까.

너는.너는.

너는 도대체.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되돌아오기를 바랐나?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그래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몸을 내던질 그런 사람을 기대하고 있었나?

그게 네가 바라던 것인가. 그런 흔해빠진 마음가짐으로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었을까?

네 생각을 했어야 했어. 왜냐하면, 사람들은 희생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그런 것은 사실 지독히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것이라서.

그래서 나는.

────아니, 너는.

“하, 나 참.”

아아.

이제야.

이제야 알겠다.

너는 줄곧 이런 마음으로 영웅을 기다렸고.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싸운다는 건 개소리야.”

유백색 위압.

전신에 휘감아.

[자기지정: 불굴不?]

***

바롱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사내가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

바롱은 앞서 밝힌 그대로 정의를 추구하는 정의로운 파계종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다.그렇기에 바롱은 일말의 거짓도 없이 사내에게 살아날 기회를 던져줬다.

여기서 사내가 꽁무니를 보인 채 줄행랑을 친다면, 바롱은 그대로 사내의 존재를 잊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골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사내는 물러나지 않았다.

바롱은 우선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아니, 이유고 뭐고 따지기 이전에 무슨 자신감으로?

그 물음이 두 번째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상기시켰다.

‘지금의 이 파동…….’

‘지정능력’과 ‘파계능력’의 뿌리는 같다.

따라서 바롱 또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위압과 그 활용능력에 기반해 적과 자신의 수준을 비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교 선상에서, 지금까지는 당연히 바롱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아니지.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다.

바롱은 솔직히 말해 손가락 하나 휘둘러 나진과 랑 모두를 뭉그러뜨려 죽일 수 있었다.반대로 덤벼드는 공격을 발가락 하나 휘둘러 막아낼 수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가면 안에서 바롱은 인상을 구겼다.

지난 번 서점에서 소환된 이후 처음으로 그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위압이 사내의 신체 전반에서 퍼져 나왔다.

유백색. 색감을 통해 감지된 그 위압은 분명 아까 전까지의 사내의 그것과 동일했다.

그러나 출력의 수준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인간처럼 등급제를 사용해 표현하자면 B등급에 준하거나 조금 뛰어넘는 정도.

바롱은 그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성가신데, 이건.”

사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는 동안 바롱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건틀릿이 어떤 시너지를 일으켜 위압을 극도로 증폭시킨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랬다면 건틀릿을 쥔 직후부터 이런 위압이 풍겼겠지.

그러면 설마, 이 짧은 순간에 지정능력을 강화했다는 것일까?

바롱은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가능성은 있지만, 무슨 기제로?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사고방식이 180도 달라지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럴 수가 있나?

그딴 건 상관없다.

바롱은 안타깝게도 삼류 악당이 아니라서, ‘이렇게 된 이상 저 조그마한 녀석부터 처리해주지!’하고 당장에 위협적인 적을 방치하지 않았다.

바롱은 사내를 없애버리기 위해 그 방향으로 양손을 뻗었다.

또한 말했다시피 바롱은 삼류 악당이 아니라서, ‘우선은 가벼운 공격부터 갈겨주마!’하고 온화하게 굴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출력으로 짓밟아주마, 하고 바롱은 양손을 아래로 내려버렸다.

우드득, 과다한 중압이 연약한 신체를 짓누르는 소리가 났다.위압이 사내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그 여파로 주변에 있던 각종 정원 기재와 식물들이 망가져 버렸으나 바롱이 알 바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찝찝한 적은 사라졌고, 이제부터 바롱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 “헛.”

검은색 클로가.

월광처럼 가로지른 붉은색 잔흔.

건틀릿이 거머쥔 클로가 바롱의 시야 바로 앞을 스쳤다. 그 반격을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바롱이 상반신을 뒤로 틀었다.

그러나 이어진 연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건틀릿이 없는 클로가 바롱의 팔을 강타했다.

통증이 신경을 찢어발겼다. 바롱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상처가 난 팔을 잊어버리고 클로의 주인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바롱은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게 됐다.

사내는 멀쩡했다.전신에 상흔이 남긴 했지만, 바롱의 위압을 견뎌냈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멀쩡히, 그저 그곳에 서 있었다.

따라서 바롱은 믿어야만 했다. 보이는 것을 믿어야 했다.사고가 빠르게 돌아가며, 그가 다시 염동력을 발휘하도록 강요했다.

바롱이 재빠르게 팔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역시 우악스러운 소리. 쓰러진다.

당황한 탓에 아까보다 짓누르는 힘이 약해지긴 했으나 어쨌거나 사내의 몸을 망가뜨리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을 터였다.

물론 바롱은 아직까지도 삼류 악당이 아니므로 확인사살을 하려 했다.다친 팔까지 가세해 압력을 가했다.

옥상의 바닥이 깊게 패이며 분화구와 같은 흔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정말 미친 일인데.”

견디고 말았다.

“여기, 까지냐.”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바롱은 없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까지냐고? 아니다. 더 많이 남았다.

그는 인간들에게 인정받은 A­등급의 파계종, 인도네시아의 모든 문화재와 유물을 약탈하고 파괴하고 섭취한 신수 바롱 그 자체.

바롱은 세 갈래로 갈라진 손가락을 꽉 모아, 주먹을 만들어보였다.

부드득, 주변을 돌아다니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바롱 가면이 부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딴 건 상관없었다. 여기서 끝장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철저히 제압하겠다. 아니. 흔적도 없이 뭉그러뜨리겠다.

다시 사내의 몸을 짓눌렀다.

압박감. 드디어 끝일 것이다. 인간은 이 공격을 견딜 수 없다.

장기가 내부에서 터지든지 피부가 갈기갈기 뜯겨나가든지 둘 중 하나.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죽는다. 전율감이 치솟는다. 바롱은 자신도 모르게 키드드드득 웃어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필코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

이럴 리가 없다.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삼류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바롱은 울부짖었다.

백색 털로 뒤덮여 있던 바롱의 전신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마침내 가면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얼굴을 드러냈다.

백지처럼 텅 빈 안면 중앙에 붉은 눈알 하나만이 박혀 있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바롱은 소리쳤다.

“누굴 등신으로 알아?”

그 말 대로였다. 바롱은 멍청하지 않다. 몇 개월 전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바롱은 인간들의 책을 3000권 이상 읽었다.

그들의 과학과 수리학 논리학 사학 언어학 정치학 철학 등등 모든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바롱은 여기서 저 정신 나간 저항력을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의 집행은 계속될 수 있었다. 바롱은 시선을 랑에게로 틀었다.

사내를, 나진을 죽이지 못해도 상관없다.바롱은 그의 목숨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정의는 인간을 탄압하고 역사를 부정하며 무기를 제조해 전쟁을 야기하는 전쟁범죄자들이 두려워 할 것이다.

바롱은 당장에 손을 휘둘러, 그리고 그 방향으로 눈동자를 굴려 폭풍 같은 염동력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망, 할, 망할………. 망할 씨발………!”

불가해한 일이 이어졌다. 염동력은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 방향.

바롱이 랑을 향해 손을 휘둘러도 압력은 나진을 향해 가해졌다.

그리고 나진은 역시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다치지 않았다.

대신 버텼다. 결코 쓰러지지 않는 채로.

“왜곡, 이냐?”

바롱이 뽑힐 것 같은 눈알을 휙휙 돌려가며 물었다.

“젠장, 뭔가를, 뭔가를 왜곡하고 있어! 어떻게 된 거야. 네놈은 뭘 왜곡하고 있는 거지?”

“나도 몰라.”

나진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아냐, 지금 이 상황을. 그런 건 모르겠고 아무튼.”

나진이 슬며시 뒤를 돌았다.

자연스럽게 랑과 나진이 눈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나진의 몸은 상처로 뒤덮여 있어서 랑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넘어져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상처투성이의 몸.

랑은 말을 잃었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명확히 나진을 향해, 어디로도 세지 않고 있었다.

나진이 손을 뻗었다.

“괜찮냐.”

“그게, 저기 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 같으니까 됐다.”

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다시피 나는 안 괜찮네. 그래도 뭐, 일어설 수 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고.”

“하지만……!”

나진이 랑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얹었다.그리고 부드럽게, 아까처럼 헝클어뜨리지는 않고 가만히 쓰다듬었다.

두려움을 잊게 해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닿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얕게나마 알려주기 위해서.

그 덕분인지 랑은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래서는 삼류 로맨스 활극이 될 뿐이다.

키드드드드드드드득.

모든 것을 삼류로 끝낸다니, 용납할 수 없다.

“정의가, 응? 정의가 여기서 물러날 줄 알았다 이거지? 급류로도 군대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산꼭대기의 무적 요새를, 정의를 짓밟겠다 이거지? 이거지이이?”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롱은 즉시 위압의 흐름을 뒤바꾸었다.

아까까지는 그것을 사방에 흐트러뜨려놓고 적절하게 운용해 광범위한 염동력을 휘둘렀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전신에 집중시켜 두꺼운 보호막을 형성한 것이다.

수리로만 해석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무한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롱은 그 사실을 인간들의 지식을 통해 철저히 깨달은 바 있었다. 따라서 저 믿을 수 없는 부활능력이 영구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많이 되살아나더라도 언젠가는 그 끝에 다다를 것이다.

게다가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육체는 전력을 다하지 않더라도 손쉽게 부술 수 있는 것 아닌가.

따라서 공격에 치중하지 않고 오히려 방어에 투자한다.

아까 클로의 일격에 팔을 다치긴 했으나 그때는 아무런 방어기제도 발동시키지 않았을 때다.

방어 하나 없는 상태에서 직격 당했는데 다치는 정도에서 그친 걸로 보아, 공격의 수준은 특별히 상승하지 않았다.

닥쳐오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여력을 쏟아 죽이고 또 죽인다.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마.”

모두를 위해서.

“세상의 불합리를 무너뜨려주마!”

정의를 위해서.

“긍지 높은 인류의 문화와 유산을 위해서!”

기염만장. 정의로운 파계종은 당당히 선언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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