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003. 아뇨, 그런 사람 모릅니다 (3)
* * *
……부산에서의 이야기를 마저 하겠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딱히 의미가 있는 활동은 없었다. 랑과 폴트가 평소처럼 시끄럽게 떠들었을 뿐이다.
“과연 괜찮은 맛이군요. 게다가 위생적으로 안정돼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길거리에서 파는 어묵은 더러우니까, 아가씨께서 드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지요.”
“폴트, 어묵은 원래 그런 분위기에서 먹는 거야. 위생과 무관하게 감성적으로 맛있어 보인다는 느낌을 주는 게 길거리음식의 매력인데, 그걸 캐치하지 못한다면 폴트는 미식가의 자질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어.”
“저는 애초에 미식가가 아닙니다, 아가씨. 다만 먹는 것을 좋아하는 메이드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 본질의 역할대로 행동하자면 아가씨께 건강하고 위생적인 음식을 제공해야 마땅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건 직업윤리를 핑계로 맛을 깔보는 행동인 것. 폴트는 맛알못이야. 하여간에 영국인이란.”
“그 국가차별주의적인 발언은 용납할 수 없군요. 초콜릿을 누텔라에 찍어먹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였지요?”
“그건……!”
아니, 당신이 알려준 거였냐.
영국인들은 그 끔찍한 브라운 소스만 먹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어쨌든, 이와 같이 둘은 신나서 떠들어댔다.
아마 뭘 먹을 때마다 만담을 나누는 모양이었다.
나도 간간이 영국음식을 거론하며 폴트를 공격하는 포지션을 붙잡아 랑과 협공했고, 제법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미친 대화에 가세하지는 않았다.
“오빠까지 왜 그래요?”
홀로 떨어진 유였다. 녀석은 아까부터 깨작깨작 어묵을 씹어대고 있었다.
“하여간에 저 둘은 철이 덜 들었어요. 아뇨, 오빠를 포함해서 셋이려나.”
“그렇지만 이거 굉장히 맛있는데.”
“음식 맛이 전부인가요!”
여기 또 맛에 관해 철학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군.
랑과 폴트가 진정한 맛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고전 철학자들이라면 이쪽은 해체주의자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우리는 모두 맛이라는 관념에서 탈피해야만 해요(제갈유 남김).
물론 아니다.
“우리는 대화를 하려고 왔어요, 밥만 먹자고 온 게 아니라! 이번 만남의 결론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지 모르는데 누텔라 얘기나 하고 앉았나요, 당신들은?!”
거대담론이 튀어나왔지만 납득은 간다.
생각해보면 둘 중 하나는 머즐드독스의 차기 총수가 될 테니까.
이 인간들은 거대담론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거대한 것이다.
“진정해, 아직 갈 식당이 한참 남았고…….”
“오빠는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유가 으르렁 소리쳤다.
“저 아이랑 며칠 지내면서 그새 친해지신 건가요?! 설마 그래서 편드는 거예요? 진짜 그런 건가요! 암만 그래도 그렇죠! 오빠가 누구 편을 드냐에 전 세계의 운명이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아니, 나한테 그런 무거운 짐을 떠넘기지 마. 결정권자는 엄연히 너희 둘이야.
“몰라요! 저 녀석, 체스 실력까지 갑자기 좋아져서는……! 하여간에 이름 앞에 제갈 붙은 사람들은 다 짜증난다니까요!”
“네 성씨는 뭐가 되냐, 그러면…….”
여기까지가 부산에서 있었던 일의 전부.
자매는 이후로 한마디도 섞지 않았고 다만 헬기가 식사를 마친 우리 앞에 착륙했다.
그마저도 곧바로 경주로 비행해 또 어딘가에서 내렸다.
헬기 안에서도 대화는 일절 없었음.
절망적인 성과다.
경주에서는 제법 분위기 있는 뷔페였다. 오로지 우리 넷만을 위해 세팅된 음식들이 보기 좋게 용기에 담겨 있었다. 정장까지 갖춰 입은 웨이터가 우리를 맞이했다.
돈 있는 손님답게 대우가 남달랐다. 웨이터가 메뉴를 직접 떠다 주겠다고 했으니.
“됐습니다."
일당제 가짜가 아닌 진짜 전문 사용인 폴트가 거절했다.
웨이터는 주눅이 들어서 돌아갔다.
“한 테이블.”
내가 말했다.
이 바보들.자매라는 거창한 타이틀까지 달고 테이블을 나눠서 쓰려고 했다.
보나마나 아까 팀 구성 그대로 등을 돌린 채 식사를 하려고 했겠지.
나는 테이블 하나에 의자를 더해 네 명이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조정했다.
“둘이 마주보고.”
교묘하게 빗겨서 앉으려는 걸 또 막아 세웠다.
여러 모로 골치 아프게 하는 녀석들이다.
억지로 시선이 겹치게 앉혀 놓으니 둘 다 홍조를 띄운 채 어쩔 줄 모른다.
서로 싫어한다기보다는 뭐랄까, 어색하게 여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입을 열었고.
“야, 너희 혹시 싸워서 그래?”
“그렇지만 언니가!” “하지만 저 녀석이!”
혹시나는 보통 역시나다.
둘의 관계는 뭐라고 해야 할까, 다소 복잡하다.
그냥 자매 같을 때가 있고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재벌 2세 집단 같을 때가 있고.
물론 한쪽은 가업을 물려받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지만 비유를 하자니 그렇다는 것이다.
체스를 두며 다툴 때는 밑에 딸린 수많은 임직원과 일반 시민을 걱정한다.
그런 주제에 감정적으로 투닥투닥하는 15살과 17살 자매라.
암살자라도 고용하지 않은 게 어디냐. 피에 피를 덧칠하는 복수극만큼은 벌이지 않았다는 점에 감사를 표하겠다.
“언니가 잘못했어!”
“너랑 총수가 문제야!”
피는 몰라도 콜라 정도는 집어 뿌릴 수 있겠네.
정말로 그러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둘 다 진정하고…… 우선 손부터 잡아. 자, 악수, 악수.”
각각의 팔을 붙잡아서 억지로 붙여놓는다.
고등학교 때 어쩌다가 싸운 놈들은 꼭 이런 벌을 받곤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보다 훨씬 끔찍한 벌이었는데, 의자 두 개를 딱 붙여 놓고 그 위에 각자를 앉혀 놨다.
방금 전까지 상대방의 부모를 거론하며 싸우던 두 학생은 모든 사적인 공간을 던져놓고 신체를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무슨 잔혹한…….
그 벌이 끝나면 둘은 평소보다 더 친해지곤 했다.
사람끼리 살을 맞댄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지.
그런 대단한 효과가 눈앞의 자매에게도 적용되는 듯했다.
유와 랑은 서로를 팍 째려보다가 얼굴을 확 붉히더니, 또 힘을 풀고 나에게 호소하는 눈빛을 보냈다. 대강 ‘살려주세요.’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물론 무시하고 둘을 계속 접촉시켜 놓았고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서로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저기 언니, 미안한 것.”
“아, 아냐! 나도 미안.”
서로 아끼긴 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그간 랑은 제 언니에 대해 나쁘게 평가한 적이 없었지.
유의 경우 랑이 나쁜 녀석이라고 규정하는 듯했어도 본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친을 과하게 따르니까 괜히 매도했을 뿐,랑이라는 사람 자체에 증오심을 품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외동아들로서는 조금 부럽기까지 하다. 저렇게 사이좋게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언니 말은 잘못되긴 했어.”
“뭐라구?”
취소.
“아무튼 우리는 최고의 기업인이 돼야 해.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딴 건 너나 해! 내가 어떻게 살든 무슨 상관이야?”
“언니는 제갈 가문의 맏딸이니까. 나는 언니를 위해서라면 우리 회사 지분을 전부 내어줄 수도 있어.”
“지분을 갖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그런 건 너나 가져!”
“지분이 있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언니의 꿈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거잖아?”
“내 꿈은 내가 알아서 이뤄. 총수와 네가 참견할 게 못돼!”
이제 말리는 건 포기다.
둘이 알아서 하라고 그러자.저게 저 녀석들의 운명인 거야.
나는 가뿐히 무시하고 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폴트는 아까부터 계속 이 음식 저 음식을 담아가며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언제나 모시는 주인 편을 들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아무런 대응도 취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소모적인 싸움에 익숙하다는 뜻이겠지.
갑자기 확 담배가 당긴다.
요즘 폴트만 보면 담배 생각이 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이것도 이 관계에 휘말린 탓일까, 하는 한가로운 생각까지 하는데 폴트가 앞치마에서 담배를 꺼냈다.
내게 권하는 태도로 슬쩍 들어 올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언니가 와야 하는 것! 언니는 지정능력이 있으니까!”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어우. 시끄러워.
무시하고 폴트에게 질문했다.
“이래서 제대로 해결이 될까요?”
폴트는 마침 스파게티를 후루룩 흡입하고 있었다. 당신 영국인 아니었냐고…….
“글쎄요. 해결은 나겠지요. 어떤 식으로든 해결은 나는 법입니다.”
“그냥 그쪽도 유 편을 들어주지 그래요? 솔직히, 동생 쪽이 억지를 쓰는 것 같은데.”
호소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일반 상식에 비추어 보자면 랑보다는 유가 더 합리적이다.
자기 앞가림을 하고 혼자서 살아가겠다는 유였다. 거기에 대고 가문에 종속돼 원하지 않는 삶을 이어가라고 강요하는 녀석들이 이상하잖은가.
물론, 독립하기에는 좀 어리긴 하지.
하지만 유가 완전 어린애도 아니고 17살이다. 고작 몇 년 뒤면 어른이 될 것이고, 그때 가서 지금의 판단을 뒤엎을 것 같지도 않다는 게 내 솔직한 견해였다.
말하자면, 유는 그냥 일찍 어른이 된 것이다.
동시에 랑은 언제까지고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이 남는다.
“동의합니다. 작은 아가씨께서는 억지를 쓰고 계시지요.”
폴트는 냅킨으로 입에 묻은 토마토소스를 슥 닦았다.
“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저 또한 한나진 씨와 같이, 큰 아가씨의 편입니다.
그러나 저는 종속된 메이드입니다. 작은 아가씨께서 가문에 종속된 것보다도 훨씬 더 종속적인 존재이지요.
또한 엄밀히 말해 제가 모시는 진짜 주인님은 총수님이시고, ‘우리 딸을 잘 간수해라.’ 라는 총수님의 지시에 따라 작은 아가씨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유를 데려가야만 한다는 거군요. 그렇게 지시받았으니까.”
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 총수님은, 그분께서는 왜 큰딸에게 집착을 못 버리시는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게…… 재벌이라는 건 보통 누가 상속받느냐로 싸우는 집단이지 서로 나눠주지 못해서 다투는 게 아니잖아요.
랑이 총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도 아니고, 큰딸을 굳이 되돌려놓을 이유가 있을까요?”
“그건 총수님의 개인적인 고집이라고 설명해 드려야겠군요.”
개인적인 고집.
아니 뭐. 그런 사람일 것 같다고는 느꼈다.
유는 기본적으로 착한 녀석이다.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는 어지간한 대우를 참고 견뎠을 것이다.
그런 유를 아예 집을 나가게 만들었다? 부모가 이상하다는 뜻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수지타산에 맞지 않잖아요.”
그들이 사업가라는 사실.
“수지타산, 말씀이신지요.”
“예. 단순 계산으로 따져서……. 랑 말고도 유가 필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를 재개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고개를 살짝 비틀어, 여전히 싸우고 있는 자매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나는 자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언니가 아니면 안 돼.”
“그러니까 그게 무슨…….”
“지정능력. 그것도 B등급. 흔치 않은 인재야. 게다가 새카만 칼날들 팀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어. 기업 이미지에도 좋고, 새로운 제품을 시험할 수도 있고, 그리고 또…… 아무튼 언니는, 나보다 나은 것.”
“낫다는 건 뭐야. 그러면 너는? 너는 어떻게 되는데?”
“……몰라.”
처량하게.
“하지만 내가 없더라도 기업은 발전해. 언니가 있다면. 그러니까 언니가 오는 게 나아. 나보다는, 언니가…….”
그 몇 마디 담긴 쓸쓸함. 외로움.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시금 폴트를 노려봤다.
자매의 목소리가 마치 소음처럼 음식 나르는 소리에 파묻히고, 그 어색하지 않은 금발 메이드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메이드가 또렷하게 말했다.
“총수님께서는 항상 수지타산을 고려하고 계십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
“지금도 고려하고 계시겠지요.”
그러니 여기까지가 경주에서의 소득의 전부.
그 외에는, 나도 나름 배를 채웠다는 정도일까.
다음은 충청도 제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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