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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15화 (15/112)

〈 15화 〉 003. 아뇨, 그런 사람 모릅니다 (2)

* * *

어묵하면 부산이라는 속설이 있다.

사실 포장마차 따위에서 파는 오뎅은 일본이 원조겠지만 내가 알 게 뭔가.

뭐가 됐든 부산 어묵이 맛있다는 소문이 있다. 따라서 어묵하면 부산이고, 우리는 부산에 가야 한다.

그딴 비약에 근거해 우리는 부산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두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헬기가 등장했거든.

“헬기가 어떤 과정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지……?”

“우리 회사, 군수업체.”

그래서 군용 수송헬기였군.

관련법상 불가능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느낌으로 반응했다.

반면 유는‘어휴, 뭘 또 이렇게까지 했어.’였다. 불만은 표해도 딱히 놀라지는 않는다.

마치 오래간만에 방문한 친척이 한우세트를 선물로 챙겨왔을 때 정도의 반응이다.

어쨌거나 넷은 사이좋게 탑승했고 헬기는 빠르게 부산을 향해 나아갔다.

점심은 서울에서 저녁은 평양에서, 라는 격언을 비틀어놓은 듯한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 나뿐인가.

억울함이 몰려왔지만 꾹 참았다.

그 덕분인지 유와 랑은 이곳에서.

“……잘 지냈어?”

“……응.”

첫인사를 나누었다.

솔직히, 둘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대할지 궁금했다.

나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조종석 옆에 앉은 폴트도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랑이 유에게 물었다.

“샹체, 장기, 쇼기, 체스?”

“얘도, 무슨 그걸 또 해…….”

“그렇지만 어릴 때는 자주 한 것.”

“우리가 어린애야?”

“그건 아니지만, 하고 싶어.”

유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다가.

“체스로 해. 나머지는 룰도 다 까먹었어.”

“알았어.”

이러더니 폴트가 어디선가 체스 판을 꺼냈다. 도라에몽이야 뭐야, 싶기는 한데 아마 헬기 자체에 구비를 해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 헬기는 외관과 다르게 내부가 매우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다.

제갈 일가가 사적으로 타고 다니는 헬기가 아닐까 하는 의미 없는 추측을 덧붙여본다.

아무튼, 자매 사이의 간이 테이블에 판이 올라왔고 세팅은 금방 끝났다.

둘은 자연스럽게 체스를 시작한다. 언니인 유가 늦게 두는 흑을, 랑이 먼저 두는 백을 골랐다.

주변 환경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태도가 이런 상황이 종종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랑이 백색 폰 몇 개를 차례대로 움직인다. 반면 유는 꺼낼 수 있게 되자마자 룩부터 앞세운다.

어째 자매가 체스 두는 방법이 각자의 행동 양식과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동안 잘 지냈어?”

“별일 없어.”

랑이 마지막으로 폰을 정렬하고, 유는 나이트까지 끄집어내며 대꾸한다.

“그렇지만 힘들었을 것.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어.”

“그 지옥 같은 곳에 있는 것보다는 나아.”

랑이 비숍을 꺼냈다.

저걸 먼저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감상이 떠오른다.

체스에 흥미가 없어 룰만 간신히 습득한 정도지만 비숍이 써먹기 힘든 기물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예를 들자면 내가 그렇다. 난 초보 중의 초보라서비숍은 마지막까지 아무데도 써먹지 못하고 있다가 날려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애초에 체스를 안 두지만. 룰만 안다.

비숍이 애매한 위치로 나서자 유가 비로소 폰을 전진시켰다.

랑은 잠시 침묵했다. 비숍을 이용하면 방금 튀어나온 폰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가 비숍을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단순한 악수로 보였다.

그러나 랑은 함부로 비숍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판과 제 언니를 번갈아 보다가 비숍을 뒤로 물렸다.

몇 수 뒤를 읽기라도 한 것일까. 랑은 알려주지 않는다.

“엄마가 걱정하셔.”

“총수가?”

“언니, 말버릇 없어.”

“말버릇을 챙길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

유가 룩을 움직여 랑의 폰을 잡아먹었다. 그러나 당장 룩을 처리할 방도가 랑에게는 없다.

“왜 훌륭하지 않아? 엄마는 최고의 기업인이야.”

“그리고 최악의 인간이야. 총수 때문에 죽은 사람이 이 체스판 위의 말보다도 많아.”

“하지만 엄마가 살려낸 사람도 많아.”

비숍이 아까 퇴각한 선로를 그대로 되돌아왔다.

룩이 후퇴하면 랑의 폰에 간단히 잡히고, 그렇다고 전진하자니 나이트에게 당한다. 따라서 룩은 움직일 수 없다.

유도 그런 사실을 깨달았는지 룩에서 눈길을 뗐다.

유가 나이트를 꺼냈다.

“살린 사람의 숫자에서 죽인 사람의 숫자를 빼서 양수가 나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사람 목숨은 그런 게 아니야.”

“우리는 사회지도층이야. 우리의 위치에 걸맞게…….”

대화가 오가는 사이 말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멈췄던 룩이 비숍에게 잡히고 나이트가 다시 비숍을 잡는다.

결국 판 중앙의 전장에 남게 된 나이트마저 랑의 룩에게 공격당한다.

또각또각. 목재 기물들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제법 낭랑하게 들린다.

드디어, 무수한 기물이 서로 잡아먹은 가운데 룩이 승리자로 남았다.

“걸맞은 위치 같은 건 없어.”

폰이 룩을 밀쳐낸다.

“랑, 내가 얘기하는 건 사람의 도리야. 총수가 사람이라면, 우리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어. 살릴 수 있는 숫자와 그렇지 못한 숫자를 저울 끝에 매달아놓고 심판할 수 없다는 말이야.

그럴 자격은 아무한테도 없어.”

“그건 실리에서 엇나간 얘기야. 더 큰 규모에서 파악해야 해. 머즐드독스에 소속된 임직원만 해도 수만 명이 넘고, 우리 회사 자체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규모는 60억까지 늘어나.

사연을 하나하나 듣고 가치를 매겨 더 필요한 사람을 남겨둘 수 있겠다면 정말 좋겠지만──”

“바로 그게 문제란 말이야!”

체크. 유가 랑의 킹 옆으로 퀸을 곧장 들이밀었다.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랑은 아무런 대비도 없이 킹으로 향하는 길을 뚫어놓을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

맹목적으로 돌진한 퀸은 비숍에 의해서도, 혹은 다른 색 퀸에 의해서도 처리될 수 있는 위치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유는 승패와 무관하게 소리쳤다.

“사람에게 가치를 매겨서 누군가는 살릴 수 있고 누군가는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 그게 총수가 잘못된 이유야.

재작년에 홍콩과 LA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 게 파계종만의 탓이라고 생각해? 천만에. 그건 총수가 직접 죽인 거야! 죽일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언니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랑이 끄덕였다.

그러나 말(?)에 대한 수긍과는 별개로 말(馬)에게는 반박했다. 랑의 퀸이 유의 퀸을 잡아챘다.

어서 눈이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로 수가 돌고 돌았다.

랑이 하던 말을 마저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옳아. 엄마는 모든 걸 대국적으로 본 거야.

홍콩에서 실전부대 대신 시험부대를 투입해 사람들이 죽었을지 몰라도, 시험부대 덕분에 더 강한 무기를 얻어 효율적으로 세상을 지킬 수 있게 됐어.

LA에서 파계종에게 약물주입을 시험한 탓에 사람들이 죽었을지 몰라도, 그 약물로 지정자를 강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진보를 얻었어.”

말이 움직이고, 다시 움직인다.

움직인 것을 반대로 움직인 것이 없애고 없애버린 것이 없어진다.

움직인다. 랑이 움직인다. 유가 움직인다. 랑이 움직인 것을 움직인다.

유가 움직이지 않은 것을 움직인 뒤 랑이 움직일 것을 기다린다. 랑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유가 움직이지 않음에 당황해 움직이지 말아야 했던 것을 움직인다. 움직인다.

살아있는 퀸과 죽어버린 퀸. 그것은 별다른 차이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움직인다.

분명, 차이가 없었을지 모르지.

그러나…….

“체크메이트.”

백의 퀸이 흑의 킹을 쓰러뜨렸다.

얼마간 유는 말을 잃었다.

이윽고 내게 뭔가 요구하는 눈길을 보냈다.

대강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도와줘요! 오빠가 뭐라고 좀 해봐요!’

난 외면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시류에 몸을 맡길 것이고, 지금의 시류는 랑의 편이니까…….

물론 듣고 있는 입장에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랑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지금의 자의적인 희생이 훗날의 성공을 가져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어쩌다가 그 객기 어린 주장이 들어맞는다고 해도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말을 아낀다.

이것은 둘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랑은 아직까지 내가 필요할 정도의 선을 넘지 않았고, 그건 유도 마찬가지다.

둘이 실컷 싸우고 떠들고 어쩌다가 드잡이질을 해서라도 직접 결정하는 편이 낫다.

그게 아무래도, 자매다우니까.

판 위의 모든 것이 멈추자 헬리콥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부산까지는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미친 군용 헬리콥터를 전용기로 부릴 수만 있다면 말이지.

***

그리고 우리는 현재 부산이 아니라 경주에 있다.

다음 행선지는 제천이라고 하는데, 이걸 설명할 게 아니지.

왜 경주에 도착했는지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

분명 부산에 들렀다.

하지만 들렀을 뿐이었다. 다른 무슨 가치가 있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그곳에 도착해서 정말로 유명한 어묵 집에 도착했다. 얼마나 유명한지 오늘 하루 전세 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손님들이 수시로 몰려왔다가 돌아갔다.

가게의 독점권을 얻은 우리는 편안하게 어묵을 먹었다.

다 먹은 뒤 가게에서 나와 헬기에 올라탔다.

헬기는 곧장 경주로 향했고 현재 우리는 경주에 있다.

얼탱이가 없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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