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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12화 (12/112)

〈 12화 〉 002. 저는 일반인입니다. 쏘지 마세요 (6)

* * *

새카만 칼날들의 활동 멤버들은 모두 학교에 있었다.

학교에 빠지는 날에도 출석인정은 된다. 정부로부터 받아낸 다소간의 배려였다.

다만 오늘은 쪽지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그들은 5교시까지만 수업에 참석하기로 했고, 사태는 점심시간에 벌어졌다.

재인은 교사 뒤편의 작은 정원에서 쓰러져 있었다. 한쪽 팔이 부러진 채 그녀는 기절해 있었다

‘기묘한 위압’을 느낀 한월이 그 근처까지 왔다가 재인을 발견했는데, 의식이 없어 구급차를 불렀고 병원까지 오게 됐다.

아주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기에 몇 시간 뒤에 재인은 깨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사건의 전모다.

그러나 문제는 깨어난 이후에 생겼다. 재인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거부했다. 곁에 한월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모두가 당황했다. 재인이 한월의 요구에 불응하다니. 명백히 비정상적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재인은 과장 좀 보태자면 한월이가 간을 빼달라고 하면 간뿐만 아니라 더 필요하지 않느냐며 심장까지 뽑아줄 수 있는 아이였다.

어쨌거나 재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다만 나를 요구했다.

내가 와야 한다고, 붉은 길앞잡이의 한나진이 오면 그 사람에게 밝히겠다고.

거부할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바롱이 하젠야크트인지 뭔지 하는 파계종을 언급한 시점에서, B+등급의 지정자가 당했다.

지정자는 어떤 사람을 필요로 했고, 부부장님이나 한월이는 설득을 포기했다.

재인이 폐쇄적이고 고집 센 성격이라는 것은 둘 다 알고 있었다.

결국,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가 또한 내가 불려온 이유다.

나는 현재 병원에 있고, 재인처럼 팔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치료받고 싶은 마음이다.

정신은 이미 정신건강의학과가 있는 2층에 있을지도 모른다…….

각설. 병실 문은 차갑고, 1인실이라는 점이 더 그렇다.

안에 들어가면 재인이가 있을 것이고 그 외에는 나밖에 없다. 독대다.

재차 말하지만 재인이는 나를 싫어하고 나는 걔가 나를 왜 싫어하는지 모른다.

이보다 어색한 관계가 있을까.

하다못해 모택동과 장개석도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았을 텐데.

일단 노크했다.

물론 들어오라느니 나가라느니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잠들었어라, 싶은 마음으로 힘차게 문을 열었다.

“……어, 안녕.”

깨어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었고, 한월에게 듣기로 실제로도 좋아한다고 들었다.

보고 있자니 넋을 잃을 정도로 어울린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병원복인 채로, 그녀는 가만히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새하얗다. 내린 눈을 문질러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재인이 얼마나 아름답건 간에 그녀는 나를 싫어하고, 그런 마음가짐을 바꾸지 않은 채로 나를 불렀다.

이게 핵심이니까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가 하등 없다.

나는 재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앉으세요.”

예, 시키시는 대로.

벤치 형태로 보호자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었다.

코트를 벗어 내리고 나는 쭈뼛쭈뼛 몸을 뉘였다.

재인은 아직까지 이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벌을 받는 기분.

기가 센 사람 앞에서는 약해지는 본성이 슬프다.

“저기, 무슨 일로…….”

“바롱을 만났어요.”

예?

버릇처럼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가, 입을 틀어막아 참았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아니 들어버린 것인가.

역시 잘못 들었나?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잘못 듣지 않았다.

재인은 틀림없이 말했던 것이다. 바롱을 만났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뭐냐, 못 알아듣겠는데.”

“당신도 바롱을 만났잖아요. 아무런 말도 않았던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도 알 거 아냐.”

바롱은 랑을 죽이겠다고 했다.

한월에게 저지당하기는 했지. 그러나 놈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살의가 너무 뚜렷해서 혼동할 여지가 없었다.

한월이 없었더라면 랑은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부부장에게 전했다.

부부장의 귀에 전모가 전해졌다면, 새카만 칼날들도 알게 됐을 것이다. 부부장은 그 팀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어지간한 정보는 즉각 공유하곤 하니까.

재인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알아요. 제게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어요. 머즐드독스는 우리 사이에 분열을 가져올 뿐이니 자신이 나서서 머즐드독스의 대를 끊어주겠다고.”

“그렇다면 얼른 나서서 그 자매를 보호해야만…….”

“당신은 빠져요.”

재인이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지는 호흡이 떨려왔다.

모든 숨결이 분노에 젖었고, 그녀의 안면에 증오가 떠올랐다. 한월에게 결코 내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한월보다 재인을 더 잘 알겠군.

하지만 이런 걸 알아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말을 아꼈다. 재인이 혼자서 말하게 놔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유에게 들었어요. 주말에 그 아이 동생을 만날 때 동석할 거라고……. 당신은 빠지세요.”

잠깐의 침묵을 지켰다. 짧았다.

“내가 자원한 게 아니고 유가 도움을 청한 거야. 동생한테도 동석자가 있으니 혼자 가기 좀 그렇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됐던 당신 일이 아니잖아요. 제 말이 틀린가요?”

재인이 이마에 손을 짚고 탄식했다.

“주말에만 만나지 말라는 게 아녜요. 그냥 이 상황에 개입하지 마세요. 유에게도, 그 아이 동생에게도 당신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부탁을 받았고, 이게 그렇게 위험한 일도 아니야. 네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둘에게 손도 대지 않을 거야.

옆에 껴서 둘이 싸우지 않게 조율할 뿐이고, 내가 손을 댈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어.”

덧붙였다.

“이 정도도 모르지는 않아.”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각할 새도 없이 나는 따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나도 모르는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억울했다.

섣부른 증오를 받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을 견디는 방식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재인은 도를 넘어섰다. 싫어하면 혼자서 싫어할 것이지 왜 다른 사람들을 끌고 와서 자기 대열에 동참시키겠다는 것인가.

재인은 가만히 나를 노려보는 채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다시 무심하게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그녀는 안정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당신은 한월이의 오점이에요.”

재인이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어떤 짐작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무시했다. 그런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알지 않았으면 했다. 보고서가 있었기에 모두에게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최소한, 당신들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그러나 사람이 잔혹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재인은 온화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죽은 여자친구, 그 사람에 관해 말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모르는 척하시나요? 알고 있잖아요! 그때 한월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 말이에요.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나는 한월이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지──”“나도 알아.”

스스로의 얼굴을 거머쥐었다.

“나도 안다고, 쥐방울만한 새끼야.”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면 그러길 바랐나? 상처라는 것이 간단하게 스러진다고 생각했나?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인 건가?

그게 너를 이 대화에서 우위에 점하게 해준다고, 상대방이 필사적으로 피하는 과거이기에 그것을 언급해 짓누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나?

아니, 멍청하기는.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참아줬다. 필사적으로 웃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기심이니까. 교복이 맞지 않는 몸으로 이기심을 부리는 것은 끔찍하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학생증 대신에 민증을 꺼내는 나이가 됐으니까 ‘아하하,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하자.’라고 했다.

“쪽팔리잖아.”

말했다.

필사적으로.

“이건 너무 쪽팔리잖아. 한월이는 멋진 선택을 한 거라고.”

같은 날, 두 마리의 파계종이 나타났다.

하나는 도시로 향해 파괴와 살상을 자행했고 다른 하나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진 놈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나와, 내 연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인천지부에는 고등급 파계종을 상대할 인력이 없었다.

그나마 능력을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월만 있었고, 한월의 몸은 하나였다.

그러니 한월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수많은 시민들을 몰살하고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괴물을 처치할 것인가. 아니면 언제 죽어도 놀랍지 않은 두 사람을 지킬 것인가.

아니지.

한월은 결코 ‘언제 죽어도 놀랍지 않은’ 따위의 수식어를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월은 악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지켜내지 못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 한 사람 뿐이고, 그 외의 거의 모든 사람을 지켜냈다.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다.

만일 한월에게 주어진 ‘두 사람을 지킨다’라는 선택지 앞에 ‘한월과 친한’이라는 수식어만 붙었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몰라야만 한다.

그가 다른 가능성을 알아버리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한월은 아무것도 모르게 됐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기에.

보고서는 자료보관실에 잠들어 있기에.

누구도 찾아보고 싶지 않은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도망친 건 당신이에요.”

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의자에 기대고 있는 안락한 몸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 도망쳤다. 나는 내 연인을 버리고 도망쳤다.

살고 싶었으니까 온힘을 다해서 달리고 달렸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한월은 나의 반대편에서 도시를 지켰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양 삼아 살아남았다.

그러니 악한 사람은 나다.

악인으로서 살아남고,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만 오점이라는 건 너무하잖아…….”

“뭐가 너무한가요?”

“이기적이야.”

“이기적인 건 당신 아닌가요? 당신은 살기 위해서 연인을 버렸어요. 그런 당신이 이기적이니 뭐니 나불거릴 자격이나 있나요?”

안다. 그래서 말을 헤아리는 것이다.

“너도 이기적이야.”

“제가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은 지금 이 얘기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

대화하고 있는 것은 너와 나뿐이니까.

그래, 나는 이기적이고 너도 이기적이다. 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구차하게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너도 똑같다. 너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이 무슨 하늘의 별처럼 빛나길 바라서 나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한월이 영웅이기 위해서는 어떤 실패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월은 허공에 떠오른 두 선택지 중 하나는 붙잡았고 나머지 하나는 떨쳐냈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그 불완벽함은 한월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니다.

그런데도 너는.

“모든 일이 그 아이 덕분인데요.”

확신에 찬 목소리.

일말의 망설임도,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의구심도 없는 단호하고 날카로운 감정.

알고 있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는 구원받았다.

너희 모두 그 아이에게 구원받았다.

오늘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는 너희에게 웃는 얼굴로 내일을 이야기했다.

그곳에는.

모두에게 따돌림 당하는 소녀가 있었다.

이름은 이재인이고 나이는 한월과 동갑이었다. 생계를 꾸려나갈 수단조차 찾지 못해 학업과 지정자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직 ‘책을 빨리 읽는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지정 외에 특별한 기술이 없었다.

그녀는 길앞잡이로서 무구지정도 하지 않은 채 위압만으로 겨우겨우 저급 파계종들을 상대했다.

팀원들조차 그녀를 비웃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혐오했고 조직에서 어른들에게서 혐오 받았다.

언제까지고 이어지던 연쇄를 끊어낸 것은 한월이었다.

그곳에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에 처한 소녀가 있었다.

이름은 마르그리트 베르디에이고 나이는 14살이었다.

학대 받으며 자라났던 소녀에게 지정능력이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는 언제까지고 자신의 딸이 인형으로 있길 바랐다. 누구도 소녀의 손을 맞잡아주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이어지던 핍박을 대신 받아내 준 것은 한월이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길에 믿음을 갖지 못한 소녀가 있었다.

이름은 제갈유이고 나이는 17살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소녀는 물질의 풍유가 아니라 정의를 갈망했다.

그러나 모친은 그녀에게 힘을 강요했다.

소녀가 가문 바깥의 세상으로 나왔을 때, 누구도 소녀를 칭찬해주지 않았다.

소녀는 길을 잃었다.

언제까지고 이어지던 방황을 멈춰 세운 것은 한월이었다.

모든 것이 그 아이 덕분이다.

모든 것이 그 아이의 행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영웅이라고.

“당신만 없었더라도 이렇게 끝났을 텐데.”

재인이 책을 덮었다.

“왜 당신 같은 게 끼어 들어서 한월이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는 건가요. 당신 애인을 구하지 않은 게 한월인가요? 아뇨, 그건 당신이죠.”

알고 있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만약’이라는 생각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네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아직도 그때의 꿈을 꾼다.

만약 내가 있다는 걸 한월에게 알렸다면. 만약 그때 한월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만약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재인은 차갑게 비웃었다.

“바롱이 제게 왜 찾아왔을까요? 네에, 당신을 없애버릴 방도를 알려주러 왔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괴물도 당신이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재인은 읽을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거절했고, 저는 바롱에게 졌어요. 그래서 쓰러졌죠. 하지만 보세요, 어쩐 일인지 죽이지는 않았네요. 충분히 죽일 수 있었고 그러는 게 나았을 텐데도.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오늘따라 바롱의 컨디션이 나빴던 걸까요?”

재인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굳이 입에 담았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 빠지세요.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회예요.”

협박에 대한 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하지만 으레 협박이 그렇듯 대답할 가치는 없었다.

나는 돌아서서, 나갈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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