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002. 저는 일반인입니다. 쏘지 마세요 (5)
* * *
나는 오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콜릿을 누텔라에 찍었더니 정말로 맛있어졌던 것이다.
늘어나는 허릿살을 감내할 수만 있다면 주식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거봐, 맛있다니까.”
랑은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투덜거렸다. 나는 뒤늦게 사과했다.
***
나와 랑이 초콜릿을 먹는 동안 폴트는 통화하러 바깥으로 나갔다.
자기 주인과는 미식에 관해 장난스러운 토론도 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오버하나 싶었기도 잠시였다. 통화의 상대방을 알게 되니 그럴 수가 없었다.
랑의 어머니, 즉 머즐드독스의 총수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한다.이때 처음으로 폴트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 저장해두기로 하고…….
“야, 공익.”
저 멸칭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별다른 감흥 없이 랑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저쪽 팀 얘기 해봐.”
“무슨 말이야?”
“언니네 팀.”
“직접 알아보면 되는 거 아냐?”
랑이 또 발을 들어 내리꽂을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맞지 않고 피했다.
랑이 순간 당황하더니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아본 거 많아. 근데 사적인 건 몰라. 그건 네가 잘 알 것.”
“아니, 남의 사생활은 왜 캐물어?”
랑이 내 앞에 놓여있던 초콜릿 상자를 휙 뺏어갔다.
“그냥 말해. 쫌생아.”
“먹을 건 놓고 말하자.”
“찌질이.”
“익숙한 호칭이라 데미지가 안 박히는데?”
“……등신.”
아까는 찌질이였으니 방금은 ‘찐따’ 정도로 매도하는 수순 아니었냐.
깜빡이도 안 켜고 갑자기 훅 들어오네.
나는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걔네 사정은 왜?”
“언니가 신뢰하고 있어. 정보를 파악해야 앞지를 수 있어.”
그러고 보면 자매끼리 주말에 만난다고 했지.
내가 동석하게 됐다는 건 이 녀석도 알고 있을까.
나는 흘깃 폴트를 쳐다봤다.
폴트가 시선을 외면했다.
모르는군. 대화의 방향을 대강 정했다.
“어떤 게 궁금한데?”
“박한월이랑 이재인, 이렇게 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로간의 관계, 아니면 신뢰받을 만한 점. 강점이나 약점이 있어도 좋아.”
어울리지 않게 지략가 타입이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곁에서 지켜본 바가 많으니 랑에게 필요한 정보 따위야 넘쳐나는 몸이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은 새카만 칼날들 팀의 사생활이다. 남에게 떠벌리기는 껄끄럽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해 보았다.
어느 순간, 랑이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 옆자리에.
뭘 어쩌려고 왔는가 싶어서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러자 랑은 내 옷소매를 꽉 끌어당기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
제 언니랑은 달라서 애교를 떨 줄 아는 성격인가 보다.
……나는 여중생의 애교에는 약하다.
간결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딱 랑에게 필요한 정도만 말해주자고.
그러니까, 강점이나 약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걔네들한테 허락을 맡고 나불거려야 할 내용이다.
이렇게 방침을 정하자 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시 애교 일발을 장전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랑을 번쩍 들어서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버둥거려도 소용은 없었다. 나는 어른이고 너는 어린애다.
결국 랑은 포기했다.
좋아. 내용 선정은 내가 해도 된다 이거지.
우선은 그들의 관계부터.
“글쎄, 솔직히 나도 잘은 모르니까 틀린 게 있을 수도 있어.”
사실 매우 잘 알고 있었으나, 변명할 거리를 깔아놓아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나는 말했다.
“우선 새카만 칼날들 팀은 재인이랑 한월이가 만나면서 결성됐어.
너도 눈치 챘을지 모르겠는데, 재인이는 한월이를 좋아해. 이성적으로 좋아해. 아마 재인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한월이가 도와줬다나 봐. 그래서 팀도 같이 만들었고.”
“둘이 사귀는 것?”
“아니, 그건 모르겠네. 솔직히 재인이가 한월이를 대하는 걸 보면 사귀는 것 같기도 한데……. 이건 패스.”
나는 손뼉을 짝 쳤다.
“어쨌거나 그 이후로 한월이가 A급 파계종 몇몇을 깨부쉈고, 너희 언니가 그 소식을 들었다는 것 같아. 유가 그러더라고. 자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영웅을 찾고 있다고.
좀 오글거리는 말이긴 한데 걔 성격을 네가 알 테니까 넘어가고……. 어쨌든 유도 자발적으로 새카만 칼날들 팀에 합류했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들었어.”
간간이 말한 것처럼 새카만 칼날들 팀에는 다른 멤버 둘이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생략했다.
그들에 관해서는 정말로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에서 무슨 명분으로 합류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언니가 한월이라는 사람에게 기대한다는 건 나도 들어서 알아.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그것도 말해줄 수 있는 것?”
“글쎄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월이는 너도 아마 뉴스에서 가끔 봐서 알겠지만 상당한 실력자야. 그리고 돌아다니는 곳마다 사건이 터지지. 어제도 그랬잖아. A등급 파계종 바롱과 만나서 싸웠고…….
그럴 때마다 곧잘 해내는 녀석이니까. 내가 너희 언니였어도 한월이에게 기대를 걸었을 것 같은데.”
가볍게 말했다. 남을 칭찬하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랑은 돌연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신중한 손짓으로 아까 빼앗았던 초콜릿 상자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우물쭈물 다음에 뱉을 말을 망설이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동안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알게 됐다.
“내 보고서를 봐서 그래?”
랑이 화들짝 놀랐다.
붉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예전 일이야.”
“하지만 한월이라는 사람이…….”
“다음 질문.”
빠르게 넘겼다.
랑은 이 주제에 머물 마음이 싹 가신 모양이었다.
랑은 미련 없이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아니, 문책했다.
“언니가 나아, 내가 나아?”
“예?”
무엇이라솔?
“언니야, 나야. 결정해.”
“아니, 어떤 의미로 하는 질문……?”
소단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대단원의 명제는 ‘새카만 칼날들 팀에 대해’ 아니었나?
“가까이서 봐서 알 거 아냐. 언니의 방식이 옳아, 아니면 내가 옳아.”
“구체적으로 들어보니 질문의 내용이 그나마 나아지긴 했는데…… 내가 그걸 결정할 위치에 있는 거야?”
“나랑 언니랑 둘 다 친한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너와 내가 친하다는 뜬금없는 전제가 끼어들었구나.
물론 나쁜 기분은 아니다. 남에게 친하다고 인정받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지.
나중에 대출이 필요할 때 꼭 네 이름을 써먹도록 하겠다…….
농담이고.
“둘 다 자기가 갈 길을 가는 거지 어떤 게 낫다고는 못하겠는데.”
“우유부단해.”
“그거 의외로 칭찬이더라.”
“그럼 그냥 찌질해.”
나는 말을 아꼈다.
랑은 조르기 시작했다.
“언니는 엄마 말도 안 듣고 멋대로 뛰쳐나가서 몇 달씩이나 돌아오질 않고 있는 것. 그거에 반해서 나는 완전 효녀.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내 부서도 잘 운영했고, 아랫사람 관리도 잘 했고, 투자도 성공했어.”
“네 말을 들으니까 네 언니가 낫네.”
“어째서?!”
“어머니 말씀대로만 하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야. 네 언니는 어른이 돼 가고 있는 거지.”
“하지만 엄마는 항상 옳아. 수년 째 머즐드독스가 세계 최고의 기업이야.”
“그럼 네 언니는 세계 최고의 기업가가 되고 싶지 않은가 보지.”
나는 가볍게 말했다.
정작 듣고 있던 랑은 더할 나위 없이 충격을 받았다.
“왜?”
“아니, 꿈이 다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세계 최고의 기업가보다 나은 꿈은 없어.”
“누가 그렇게 말해주디?”
“엄마가.”
허어.
“너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기는 하냐?”
“……아니?”
“벌써 정해졌네. 네가 틀렸고 너희 언니가 옳아. 끝.”
네. 여기까지입니다.
나는 일어섰다. 랑은 아직까지 문화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오히려 지금에라도 일부나마 진실을 일깨워줬으니 나는 줄 것을 전부 줬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담배를 위한 옥상이 아니라, 군것질을 위한 슈퍼마트를 향하기로 했다. 안 먹던 고급 과자를 갑자기 먹으니 저급한 것으로 입을 씻고 싶었다.
흘끔, 폴트를 돌아봤지만.
폴트는 자기 주인에게는 관심도 없고 다중화면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쨌거나 한가로운 오전이었다.
***
랑이 그녀의 메이드를 불렀다.
메이드는 충실한 여자였다. 그녀는 17살에 고용됐는데,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 한국어를 배워줬다.
랑은 밤에 잠들기 전 메이드를 ‘언니’라 부르는 것으로 종의 헌신에 보답했다.
보답했다고 생각한다.
폴트가 차가운 물 한 잔을 건네며 다가왔다.
한 모금 마시고 랑은 컵을 내려놓았다.
폴트는 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질문을.
“폴트, 어떻게 생각해.”
“한나진 씨와 아가씨의 생각이 반드시 겹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알겠어. 하지만 다른 걸 모르겠어. 폴트도 내가 이상해?”
잠시 주인과 메이드가 시선을 마주했다.
먼저 피한 것은 메이드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해. 폴트를 고용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나야.”
메이드는 말을 섬겼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큰 아가씨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도 있긴 할 겁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나아가는 방향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공익이 틀렸어?”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은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메이드는 응했다.
“실례되는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총수님의 그늘에 너무 가려 계신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물론 아가씨께서는 아직 어리고, 그래서 언제든 지금의 상황을 바꾸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해도 늦지 않겠지요. 한나진 씨는 그런 의미에서 아가씨를 지적한 것입니다.”
“……알았어.”
주인이 물 한 잔을 더 마셨다. 기다리고 있던 메이드가 물었다.
“그분이 신경 쓰이십니까?”
푸흡. 주인이 물을 뿜었다.
메이드가 쿡쿡 웃으며 앞치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무렇지 않게 닦는 몸짓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주인은 참을 수 없었다.
주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처럼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아가씨께서 타인에게 의견을 구하는 게 처음인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엄마에게도 자주 구했어. 폴트한테도 구했고.”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아가씨께서 저와 총수님을 신경 쓰시기 때문 아닌지요?”
“……거기까지. 더 하면 물 끼얹을 것.”
“죄송합니다.”
메이드가 다시 쿡쿡 웃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원래부터 이런 느낌이었다.주인과 종이라는 겉면과 동생과 언니라는 뒷모습이 수시로 반복됐다.
어찌됐든 주인은 깊게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그런 흙수저 따위한테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
곁에 있다가 자기 때문에 바롱에게 죽으면 찝찝하니까 잠깐 관심을 기울여줬을 뿐이다.
그뿐이다.
랑은 가볍게 정리했다.
그녀는 다시 차가운 눈을 하고 메이드에게 물었다.
“바롱이랑 하젠야크트에 관해서, 더 알아본 건?”
“진전이 없습니다. 파계종은 워낙 예측이 어려운지라……. 죄송합니다.”
“됐어. 그래도 회의하는 거 녹음은 했지?”
메이드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죄송합니다.”
“폴트, 평소답지 않아.”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차후에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유의해.”
랑이 빈 물 잔을 내려놓았다.
이쪽도 한가로운 오전이었다.
이어서, 새카만 칼날들의 재인이 다쳤다는 소식만 들려오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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