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001. 세상은 니네끼리 좀 구해 (4)
* * *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아포가토를 먹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아이스크림과 커피의 장점만을 취합한 이단적인 간식일 뿐입니다.”
“하지만 맛있어. 맛이 답이야.”
“유미주의적인 가치관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아가씨. 입에 달고 보기에 예쁘다고 마구 섞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밥에 케첩을 비벼먹는 행위입니다.”
“폴트는 너무 극단적이야. 이건 오므라이스에 케첩을 뿌리는 정도의 조화.”
“그렇다고 케첩을 오므라이스와 섞어 먹지는 않지 않습니까? 뿌려 먹는 것에서 그치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따로 사서 같이 먹을 수는 있으나…….”
“잠깐, 왜 케첩을 오므라이스에 섞어서는 안 된다는 것? 골고루 스며들어야 맛있어.”
“아가씨는 정말로 맛을 모르시는군요.”
“폴트야말로 맛알못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아까 무전기에서 떠들어대던 사람들은 바로 이 둘이다.
하나는 머즐드독스 총수의 친딸 제갈랑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메이드인 폴트다(왜 제니퍼라고 안 부르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덧붙여서 나는 이 대화에 끼고 싶지 않다.
회상은 집어치워 두고, 우리가 타고 있는 세단은 현재 붉은 길앞잡이 팀의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었으나, 메이드가 차를 모는 방향이 낯익었다.
게다가 랑이 우리 팀의 일원이라고 하니, 그리로 가는 것이 맞겠지.
물론 직접 말문을 트고 ‘네가 우리 팀이니?’ 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짙게 선팅된 방탄 창문과, 가격을 산정하기 어려운 라디오 장비.
애초에 검은색의 고급 외제차를 타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런 와중에 운전수는 산업혁명 시기 영국도 아니고 정갈한 메이드복을 입고 있다.
대중매체에 의해 성적으로 왜곡된 의상이 아닌, 치마가 발목까지 닿는 제대로 된 복식이라서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게다가 바로 옆에 앉은 열다섯 언저리의 꼬맹이는 스컬터를 때려잡을 때 사용한 정체불명의 건틀릿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저걸로 내 얼굴을 후려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생각하다보면,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된다.
“한나진 씨.”
그러다가 저쪽에서 먼저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목소리는 랑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니라, 폴트였다.
랑보다는 경계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호의적이지도 않은 업무적인 어조.
게다가 한국인과는 아무 접점도 없을 것 같은, 금발에 벽안이라는 이제는 다소 스테레오타이피컬한 백인의 외양을 갖추고 있다.
그런 주제에 자연스럽게 한국어라니.
나는 내 이름을 들었는데도, 무슨 마녀의 주문이 귀에 꽂힌 것처럼 당황했다.
“예, 예?”
“당분간 아가씨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뭐지?
상견례인가? 아니면 자기과시?
온갖 생각이 오가는 와중에, 폴트는 손만 뒤로 슬쩍 내밀었다.
무엇인가가 쥐여 있었다. 받아보니 명함이었다.
한쪽 면은 영어로만 쓰여 있고, 다른 한쪽은 전부 한국어다.
출신지역은 버밍엄. 아마도 영국의 도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적혀 있는 생년월일로 계산하자면 나이는 이제 스물…….
직업은 정말로 ‘전속 메이드(Fulltime Maid)’라고 기재돼 있다.
살면서 명함이라고 몇 장 못 받아보긴 했지만, 이것만큼 독특한 명함을 받을 일은 앞으로도 거의 없겠지.
“당분간, 제가 새카만 칼날들과 휘하 길앞잡이 팀들의 지휘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알고 계신지요?”
“예, 대강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대답하면서도 조금은 놀란다.
지휘관은 말 그대로 본부 혹은 사무실에 남아 상황을 통솔하는 역할이다.
직무상 계약직 공무원인데, 주로 실전경험이 풍부한 지정자나 은퇴한 군인 따위가 파견되는 경우가 잦다.
지정자인 내가 지휘관에게 딱히 존대를 취하지도, 또 존대 받지 않는 것도 이러한 계약적인 관계 덕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폴트가 앞서 언급한 어느 직업과도 무관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스무 살이니 (지정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손치더라도) 파계지점에 투입된 경험도 적을 것이고, 인상으로 보아 군인 또한 아니다.
나도 1년 정도 지정자로 활동하며 네다섯 명의 지휘관을 봤지만, 그들은 폴트와는 이미지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아니, 이미지나 적합성 같은 외적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폴트의 정체는 의심스럽다.
내 옆에 앉아있는 여자아이 때문이다.
별로 실감나지는 않지만, 랑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어떤 이유에서든 붉은 길앞잡이 팀에 합류했다.
지정자 관리국 인천지부 지부장이 압박감을 느껴도 몇 번은 느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휘관은 아가씨 마음대로 하십쇼.’ 하고 나서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단순한 추측이다.
아니, 어쩌면 추측이라 칭하기도 뭐한 만약의 이야기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지정자 관리국이 재계나 정계 입장에 따라 오락가락 하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일이었다.
근거는 나다. 지난 1년간 그런 일을 수도 없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폴트는 그런 내 의구심에 가볍게 긍정을 던져줬다.
“맞습니다. 저는 다소간의 배려를 받아 지휘관에 부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실력 없는 지휘관은 아닙니다. 비슷한 경험이 많이 있었고, 지정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메이드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위압이 주변 공기를 휘감았다.
[특이지정: 다중화면]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폴트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 떠오른 것은 전자제품의 디스플레이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유리벽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유리로만 구성돼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 제품들과 똑같이 영상을 출력하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세단을 뒤에서 조망하는 장면이었다.
“저는 특이지정자입니다. 그게 뭔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전투에 적합하지 않으나 다른 분야에서 효율을 보이는 지정능력자 말입니다.”
모를 리는 없다.
다만 신기했을 뿐이다. 특이지정자는 일반적인 A등급 지정자와 맞먹을 정도로 드물다.
특별한 재능이라고 말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다중화면을 통해, 각 팀의 활동을 실시간으로 확인해 빠르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실력에 관해서는 이의가 없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 애초에 그런 걸 의심했던 건 아니고요…….”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데,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특이하거나 뛰어나다.
그런 점이 묘한 압박감을 형성해 말을 잇기 어려웠다.
나는 멍하니 시선을 창문 바깥으로 돌렸다.
거의 다 왔다.
폴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바를 성취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방해를 거두고 돌아가겠습니다.”
“저기, 그 원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렇게 물었다.
아마 대답을 거부당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의외로 폴트는 순순히 알려줬다.
“일단은 개발 중인 장비의 시험입니다. 아가씨께서 아까 사용하신 건틀릿이 실전에 투입될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지요.”
“그냥 무기하고는 다른 건가요?”
주먹에 착용하는 무기라는 점에서 내 클로와 겹치는 점이 많았다.
호기심은 계속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말씀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적당히 알아서.”
아까부터 휴대폰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랑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것처럼 대꾸했다. 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건틀릿은 일반적인 장비와는 크게 다릅니다. 보통의 장비는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사용자의 위압과 지정능력의 한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반면 새로 만든 시제품은 그런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슬쩍 랑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느꼈다. 랑에게서는 특별한 위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극소량의, 지정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반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압이 감지될 뿐이다.
그러나 위압이 없는 지정자는 찾을 수 없다. 위압은 차원 단위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틀이다.
무릇 지정자라면 지정능력을 사용할 때나 혹은 그렇지 않은 일상생활에서도 위압을 드러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압을 내뿜지 않는 채로, 랑은 스컬터를 가볍게 쓰러뜨렸다.
“아가씨께 지정자의 적성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머즐드독스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기술력이 있습니다. 건틀릿이 바로 그런 기술의 예입니다.
저것은 사용자의 위압을 효율적으로 변형시켜, 최대 한 랭크 이상의 지정자 등급을 높이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위압만 간신히 사용한다면 본래는 D등급……. 거기서 한 단계 오른다면 C란 얘기군요.”
그러면 확실히, 스컬터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미완성 제품이라서 행동지정까지 가능한 평범한 지정자에게는 별다른 효율의 확대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나진 씨께 사용하신다면 C+등급 정도로 성장하는 게 전부일 겁니다.”
그렇다면 분명 미완성 딱지를 떼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이미 지금의 경지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보상의 의미로 C등급을 겨우 받은 저급능력자가 C+까지 성장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지정능력은 개인마다 명확히 한계가 규정돼 있고, 그 한계선을 돌파하는 일이 극히 드물게만 벌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나만 해도, 등급을 C+로 올릴 수만 있다면 스컬터와 싸우며 목숨을 거는 빈도는 줄어들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느끼는 열등감도 다소 완화되겠지.
“네가 감당할 가격 아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랑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건틀릿을 과시하듯 내밀어 보였다.
“이거, 시제품 하나에 투자된 비용이 310억 원. 단순 제작비만 해도 8억이야.”
“예?”
나도 모르게 높임말을 써버렸다.
몇 글자를 잘못 들은 것일까, 해서 다시 생각해봤지만 제대로 들었다.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소름이 타고 흘렀다.
“나도 엄마한테 졸라서 쓰고 있는 것.”
아니, 엄마한테 318억을 조른다고?
어머니께 등록금을 위한 300만 원을 부탁드리기 민망해서 직접 아르바이트를 뛰었던 나다.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뒷골이 팍 당겨오는 소리다.
당장에 죽창으로 꽂아버려도 시원찮을 노릇인데, 의외로 죽창의 재료가 되는 대나무는 비싸다.
천연이 붙으면 가격이 갑절이 된다는 점에서 나 같은 무산계급이 거머쥘 수 있는 무기는 아닐 것이다…….
비극적이네.
쏟아지는 슬픔을 억눌렀다. 나는 말했다.
“어쨌거나 시제품 검증은 제대로 된 팀에서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저희 팀은 상태가 엉망이에요. 팀원이라고는 저 하나만 남아 있고, 사실 스컬터 말고 상대할 수 있는 파계종도 거의 없고요.”
“저희도 당장 고등급 파계종에게 테스트를 해볼 계획은 없습니다. 아가씨의 안전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한나진 씨의 붉은 길앞잡이 팀을 선택할 필요는 있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폴트를 대신해서 랑이 말했다.
“언니가 근처에 있어.”
랑의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언니는 멋대로 집을 뛰쳐나갔어. 엄마의 회사가 잘못됐다고. 그건 틀린 말이야. 엄마는 잘못되지 않았어. 잘못된 건 언니.”
뭐라고 해야 할까.
사고방식을 지적해야 하겠지.
어째서 어머니와 그녀의 회사가 잘못될 리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 확신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논파하라면 할 수 있다. 이래 봬도 제법 괜찮은 대학의 철학과를 다니고 있다.
취업은 몰라도 남을 억지로 이겨먹는 거라면 간단하다. 게다가 상대는 이제 중학생 쯤 된 어린아이고.
그러나 말은 소용이 없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따져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누구도 말 한마디로 교화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랑이 만일 15살이라면 이는 그녀의 모든 생각이 15년이나 묵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5년의 기다림은 15마디에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랑을 바라봤다. 그것이 발언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랑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언니는 지정능력이 있으니까, 회사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 그러니 엄마를 위해서라도 언니를 바로잡아야 해. 다시 돌아와서, 회사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너무나도 간결하게 랑은 그녀만의 논리를 끝마쳤다.
“그리고 네 사무실이 새카만 칼날들 사무실과 같은 건물을 사용해. 더불어서, 마침 방해가 될 팀원도 적고, 붉은 길앞잡이의 담당 구역은 새카만 칼날들과 겹치는 편.”
너는 골치가 아픈 어린애구나.
“그러면 언니의 사무실로 직접 파견되면 될 거 아냐?”
못할 것도 없지. 랑은지휘관을 갈아치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등급이 낮더라도 새카만 칼날들 팀에 배속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저쪽 팀으로 이적해줬으면 좋겠다만.
랑은 고개를 저었다.
“언니는 나를 싫어해.”
랑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듯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엄마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회사를 사랑해서. 내가 언니 팀에 찾아가면 언니는 나를 피해 다니거나, 거부할 거야.
그러면 의미가 없는 것. 오히려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고 네 팀에 있는 편이 나아.”
“……가족들끼리 사이가 안 좋으면 얼마나 안 좋다고?”
“모르는 사람은 언제까지고 몰라.”
그렇지. 모르는 사람은 언제까지고 모르지.
나는 돈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싸우지 않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랑이 내 경제관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랑의 가족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어리석고 독선적이다.
대화는 여기까지 해두자. 랑은 이제 붉은 길앞잡이의 팀원이다.
당분간은 귀찮겠지만, 어떻게 보면 떠들썩한 것이 좋다.
나는 외로움이 많은 체질이다.
차는 어느새 사무실에 도착했고, 주차장과 출입문 사이의 거리는 결코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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