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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37화 (37/40)

〈 37화 〉 37화 ­ 개인교습 2차전(4)

* * *

“……이상해.”

“으, 응?”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중얼거림.

지레 놀란 시에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나, 나 뭔가 잘못했어? 미안해. 더 열심히 할게.”

“아니, 네 이야기가 아니야.”

시에라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해주고 있다.

이상하다는 대상은 그녀가 아니라 나머지 하나의 조원이었다.

“아이린이 이상해.”

“공녀님이?”

“응.”

시에라는 연습을 멈추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공녀님이 뭐가 이상한데?”

“자꾸 이상하게 챙겨주거나 달라붙으려고 한다고 할까…….”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그만큼 수상쩍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원하는 선물을 물은 후 혼자 우울해하질 않나.

영문 모를 화제를 꺼내곤 대답하니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다 떠나질 않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꾸 내게 의미 모를 눈빛을 보냈다.

시에라에게 향했으면 질투나 경멸 같은 종류였을 텐데.

시종일관 내게 향하였기에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는 뭐 달라졌다 느낀 거 없어?”

“응, 공녀님은 그냥 공녀님이셔. 예쁘고, 멋있고, 똑똑하시고. 평소대로셨는데.”

“뭐지 그러면.”

시에라가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면 내게만 이렇다는 거잖아.

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그래서 눈치를 주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아이린은 남들에게 화나면 할 말 못 할 말 잘만 하는 주제에나한테는 꽁해지면 입 꾹 닫고 내가 알아챌 때까지 침묵했다.

자기 딴에는 나한테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다던가.

그럼 티라도 내지 말던가.

속 시원히 얘기해주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음, 아마 케일은 잘못 안 했을 거야.”

“나도 뭘 잘못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긴 해.”

아이린이 싫어할 일은 안 했다.

열심히 조별 과제만 준비하고 있는데 남 기분 상하게 만들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건 아닐까?”

검지로 입술을 두드리며 고심하던 시에라가 말했다.

“케일 앞에서만 이상하게 행동하시는 거라면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데 못 하고 계시는 거 아닐까 싶어.”

“…….”

“그냥 내 추측이니까 아닐 수도 있지만…….”

시에라는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듯했지만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뭔가 부탁할 거리, 혹은 할 말이 있다면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문제는 왜 나한테 할 말을 가리냐는 거다.

전 약혼자 관계라도 같이 지낸 해가 몇 년인데.

우물쭈물 용건조차 못 꺼내고 주저할 사이는 아니었다.

“……혹시.”

정말로 가문 내에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수상쩍은 행적에 설득력이 생겼다.

첫날 내 질문에 아이린은 아니라고 답했으나 거짓말을 안 했다고 확신은 못 했다.

이미 남이 된 사이다.

그녀로서는 이제 내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을 테고, 부탁하는 데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었다.

“쓰읍.”

일단 상황을 한 번 보고 진짜로 황태자한테 부탁을 해봐야 하나.

황태자의 권위라면 공작가 내 그녀의 입지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어도 임시방편은 됐다.

“……정 궁금하면 내가 혹시 고민은 없으신지 한 번 물어볼까?”

깊이 고민하고 있자 눈치를 살피던 시에라가 물었다.

“나랑 아이린 개인의 일이니까 그렇게까진 안 해줘도 되는데.”

시에라에겐 남의 일이다.

거기다 시에라와 아이린 두 사람 간의 대화에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아냐, 케일의 일이면 나한테 남의 얘기가 아닌걸.”

시에라는 곱게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 공녀님이 정말 고민이 있으시다면 나도 도와드리고 싶어. 모르는 사이가 아니잖아.”

역시 마음씨 고운 여주인공은 달랐다.

이대로 아이린의 심기를 거스를 행동만 안 하고 반듯이 예의범절을 갖추면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안 생길 텐데.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그래, 다음에도 아이린이 이상한 것 같으면 부탁할게.”

우선은 내가 직접 움직여 해결을 봐야지.

부탁은 그 후의 이야기였다.

“응, 언제든지 말만 해.”

시에라는 저만 믿으라는 듯 배시시 웃으며 가슴을 폈다.

******

“…….”

“…….”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려 있었다.

철근보다 무겁고 기름보다 질척한, 바다보다 깊은 침묵이었다.

외간 남자의 숙소에 매번 행차하는 건 보기 좋지 않기에 빌린 카페 아디톤의 밀실.

그 내부에서 황태자와 공녀는 차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이상하군. 이상해.”

거북한 공기를 깨고 입을 연 것은 황태자 유리스 엘하임이었다.

“어째서 사이가 전혀 진전되지 않았지?”

정말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그 순진한 표정에 세실리아는 통쾌히 한 방 먹이고 싶은 감정을 꾹 참았다.

“선물을 권하였고, 자주 말을 걸었으며 언제라도 눈에 띄게 행동했다. 이러면 보통 넘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딴죽을 걸자면 걸 수 있는 요소가 하나하나 산더미 같았다.

선물.

구실이야 좋다.

사실 선물 받고 안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선물을 받는다고 연애 감정이 생길까.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말이 안 되는 짓거리였다.

고마움과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명백히 다르다.

그렇지 않아도 명분 없는 선물이란 사교계에서 경계의 대상이었다.

언젠가 그에 비견되는 답례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게 벌써 지팡이를 사실 생각은 마시고 상황을 지켜보시라 말씀드렸는데…….’

의욕이 앞선 아이린은 제 사비를 털어 지팡이를 구매했고, 이내 거절당했다.

이게 첫 번째 실패.

자주 말을 거는 것도 뭐 화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묻고 싶은 거 묻고 대답할 거 듣고 떠나는 걸 과연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대화가 아닌 사무에 가까웠다.

자주 시선을 교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건 좋지만, 상대방이 의도를 모른다면 부정적인 상상이 먼저 들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아이린은 더 주의했어야 했다.

소문이 그렇고, 이목구비가 까칠한 고양이상인 탓이다.

대상이 케일이 아니었다면 공녀에게 찍힌 거 아니냐며 두려워했을 이가 태반이었다.

‘지금이라도 말씀을 드려야 하나.’

케일과의 사이를 진척시키는 건은 황태자에게 맡기지 말고 제 마음에 따르라고.

아니면 적어도 황태자에게 조언을 듣지는 말라고.

‘호위기사들이 무슨 달콤쌉싸름한 청춘을 보냈다고 저들에게 물으신단 말인가.’

황태자의 호위쯤 되면 재능만이 아니라 노력마저 겸비한 진짜 중의 진짜다.

저들은 검에 살고 검에 죽었다.

경호에 있어 가족이라는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은퇴하기 전까지는 결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건 이론마저 검증 안 된 망상의 집합체였다.

차라리 사이비 점쟁이한테 묻는 것이 더 도움이 되리라.

결국 실패란 예정된 결과였다.

“분명 잘 될 거라 했는데.”

황태자가 호만을 비롯한 호위기사들을 스윽 훑어봤다.

단 한 명도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사실 저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전공 외의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하라 명한 황태자의 잘못이었다.

“……다 제가 못난 탓이겠죠.”

그러나 사정 모르는 아이린은 거듭된 실패에 우울해져 완전히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케일은 이미 제게서 마음이 떠나간 모양이에요.”

아이린이 황태자가 엉터리임을 눈치챈다면 좋으련만.

사실 아이린이라고 해서 황태자보다 나은 형편은 아니었다.

황태자와 공녀가 살아생전 누군가를 유혹할 일이 있겠는가.

그냥 얼굴만 들이대도 대부분은 프리패스다.

케일과의 약혼은 가문 간의 정략적 결정이었고, 정략적 약혼을 연애혼으로 바꾼 것은 케일의 노력이었다.

고로 이런 면에 허당인 건 아이린이나 황태자나 피차일반이었다.

“매일매일 시에라, 시에라. 그 평민만 쫓아다니고……!”

우울감은 곧 분노로 화했다.

그 도둑고양이가 케일의 앞에서 얼쩡거리지만 않았어도.

조별과제로 인한 보충임을 알기는 했으나 감정과 이성은 별개였다.

제 부족함을 인지하고 탓하는 것보단 남을 책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큰일이군.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시에라만 점수를 따게 될 텐데.”

“그 꼴은 못 봐요. 역시 그냥 아카데미에서 쫓아내는 게…….”

“좋지 못한 선택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나.”

“그럼 전하께서는 방법이 있으세요?”

“…….”

파국이었다.

세실리아가 마침내 외람됨을 무릅쓰고 나서려는 순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내 뜻대로 해보기로 하지.”

황태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발언했다.

“이번엔 실망하지 않을 거야.”

“그걸 어찌 자신하시나요.”

“아마추어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전문가를 모셨다. 기대해도 좋아. 곧 올 시간인데…….”

끼익!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왔군.”

일동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인영에게 향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물처럼 투명하게 귀로 스미는 부드러운 말씨.

“불민한 제게 재주를 뽐낼 기회를 주심을 영광으로 여기고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남자, 밀런 토메르가 여느 때처럼 웃으며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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