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6화 개인교습 2차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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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 버나드는 아이린 레오나드 공녀의 호위기사다.
전 황실 직속 수도 방위군 출신, 그 뛰어난 재능을 알아챈 레오나드 공작이 직접 군에서 빼돌려 아이린의 호위기사로 발탁하였다.
수도 방위군 출신인 만큼 실력은 보장되어 있었고.
여성이니 제 호위 대상과 정분이 날 일도 없으며.
재빠른 눈치와 일머리, 충심마저 지녔으니 그녀는 공작 영애의 호위기사로 일하기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린의 호위기사로 일한 지 수 해.
그녀는 아이린의 수족이자 의자매에 준하는 위치에 올랐다.
본인의 망상이 아니라 아이린이 사석에서 발언한 내용이었다.
세실리아 자신도 아이린에게 애틋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남들은 아이린의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보고 뒷소문을 흘릴 때.
그녀는 아이린의 인간적인 면을 보았고, 그렇게 행동하게끔 만들어진 환경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렇기에 아이린이 최근 울고 웃는 상황을 세실리아는 바람직하게 여겼다.
기쁠 일보다는 슬플 일이 많으나 그것마저 감지덕지였다.
공작가에서는 그럴 일마저 없었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불만을 표하거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감정뿐이었으니 지금의 다양한 감정 표현은 긍정적으로 보았다.
……물론 황태자와의 거래는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싶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실리아는 묵인하길 택했다.
비록 공작가에 고용됐으되 그녀가 검을 바친 이는 아이린이었다.
그렇게라도 아이린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세실리아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결과였다.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래가 성립된 이후 개최된 아이린과 황태자의 첫 회의.
황태자가 아이린과 케일의 사이를 다시 이어주겠다는 자체에 그녀는 내심 회의감이 들었다.
가문끼리의 일이라면 황태자의 지지는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린과 케일의 재결합은 1차적으로 개인의 감정에 달려있었다.
이를 황태자가 어떻게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란 말인가?
이런 종류의 일은 황태자의 명이면 다 해결되는 종류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듯, 사적인 감정에 공적인 관계를 고려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정말 만에 하나 가문의 결합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결해 본다고 해도케일이 싫어한다면 말짱 꽝이다.
아이린은 케일의 전부를 원하였지 껍데기만을 원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눈치껏 밀어주는 게 효과가 있는 편이라지만 글쎄.
황태자가 과연 도움이 될까.
얼굴과 지위만으로 온갖 이성이 달라붙는 사람에게 평범한 감성을 기대하긴 무리가 있었다.
세실리아는 불안감이 기우이길 바라며 진행되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영애의 말대로 개인교습에서 둘의 사이가 퍽 진전된 모양이더군.”
“…….”
황태자의 담담한 사실 적시에 아이린은 침묵했다.
역시나라는 반응이었지만 세실리아는 아이린의 목덜미에서 쭈뼛 선 솜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애의 결정이 딱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졌어. 더 늦었다간 손 쓰기도 힘들었을 거다.”
아이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탁상 위로 올라온 손가락이 딱딱 부딪히며 불쾌한 소음을 울렸다.
세실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몇 마디 내뱉었는데 사람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아무리 사실이라도 그렇지 좀 표현을 달리 할 수는 없었을까.
황태자가 아니라 제 동생이었으면 주둥아리를 때려줬을 것이었다.
“남녀가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이린은 새벽녘 고요한 파도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더 깊어지기 전에 한쪽을 끊어내는 수밖에요.”
“무슨 의미지?”
“케일은 몸이 멀어지면 감정도 멀어지는 타입인 것 같더군요. 시에라를 떨어뜨리면 더 깊어질 감정도 없겠죠.”
“구체적으로.”
“시에라의 평판을 나락까지 떨어뜨리겠어요. 딱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할 정도가 괜찮겠네요.”
“……와우.”
케일의 눈에는 나만 들어오게 하겠다. 물리적으로 말이다.
황태자는 탄성을 흘렸고세실리아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게 영애의 일 처리 방식인가?”
“네.”
“귀족적이군.”
황태자의 짙은 속눈썹이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웠다.
“문제가 된다면 문제의 원인을 치워버린다는 방식은 분명 효율 좋은 방식이지.”
“그런데요?”
“효율이 좋은 방식이 옳은 방식이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법이야.”
세실리아는 속으로 황태자에게 동의했다.
“우선 멀쩡한 아카데미 학생을 음해하여 끌어내린다는 것 자체가 내 마음에 안 드는군. 아카데미의 학생은 내 치세 아래 제국을 이끌 국가의 동량이다. 그를 이리 잃기엔 입맛이 써.”
“전하께는 저보다 그녀가 더 중요한가요?”
“중요성을 따질 일이 아니지. 영애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결국 케일이 반발할 테니까.”
“…….”
맹점이었던 듯 아이린이 멈칫했다.
“케일이 소문에 휘돌릴 줏대 없는 이 같아 보이나? 수상함을 느낀다면 뿌리를 파헤치려 들 텐데, 영애와 내 작품임을 그가 모를 거라 여긴다면 영애의 안목에 유감을 표하겠네.”
“…….”
“그저 초를 치는 게 목적이라면 모르겠으나 시에라를 밀어내도 케일이 영애에게 실망한다면 의미가 없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케일은 아이린의 이런 독선적인 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들통나지 않는다면 괜찮다.
반대라면 끝장이었다.
아이린은 케일의 실망했다는 눈빛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때는 티끌만 한 희망마저 갖지 못할 만큼 엉망이 된 후일 테니까.
“그러니 우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보지.”
황태자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영애의 외모와 내 지략이라면 훌륭히 성공할 걸세.”
“경청하겠어요.”
세실리아는 황태자가 제 호위기사에게 눈짓하는 것을 보았다.
“내 듣기로 권태기 부ㅂ, 아니, 아무튼 소원해진 사이를 되돌리기엔 이게 최고라더군.”
황태자의 엄지와 검지가 뭉쳐 반듯한 원을 그렸다.
“돈일세.”
세실리아는 절로 이마를 치고자 올라오려는 손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실체 없던 불안감이 현실화되었다.
“커흠.”
별안간 울리는 헛기침 소리.
……너구나. 네가 저질렀구나.
호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세실리아의 시선에 먼 산만 바라보았다.
“돈, 돈이라…….”
“물론 직접 돈을 건네주는 건 하수야.”
“선물이면 될까요?”
“재력을 과시할 수 있다면 좋겠지.”
“제 전문 분야군요.”
무서운 점은 아이린이 저 헛소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결혼이 현실이라도 그렇지 재력 과시가 말이 되나.
그러나 세실리아는 차마 반대할 수도 없었다.
황태자 앞에서 호위기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허당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골머리가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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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
여느 때나 그렇듯 아이린의 목소리는 조용한 가운데 봄바람처럼 다가와 내 귓전에 울렸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내 일에 바빠도,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어도 아이린의 목소리만큼은 바로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이린이 말을 걸어온 건 밀런이 시답잖은 수작을 시도한 그 날 이후로 처음이다.
그날도 내가 먼저 궁금증을 토로한 걸 고려하면 아이린의 접촉은 정말 간만이었다.
“그게…….”
아이린은 웬일로 내게 할 말을 주저했다.
높은 자존감 따라 당당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망설임을 드러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
내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
아이린은 살며시 눈을 피했다.
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 시점에서 아이린에게 곤란한 일이 뭘까.
아직 스토리는 초반부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 사건은 내가 아는바 발생할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가문 내부의 일이야?”
얼굴이 굳어감을 느꼈다.
레오나드 공작가.
아이린의 자유를 얽매는 감옥이자, 내게도 좋지 못한 인상으로 남은 가문이었다.
이 시기 말 못 할 고민이 있다면 그뿐이었다.
“네 손으로 해결 못 할 일인 것 같다면 귀띔만 줘. 방법을 찾아볼게.”
약혼자 사이였을 때도 그랬다.
그녀가 가문의 압박에 홀로 곪아가길 택했다면, 나는 맞서기를 택했다.
공식적으로 남이 된 사이인 지금이라고 내가 행동을 달리할 이유는 없었다.
……정 뭣하면 황태자한테 무릎이라도 꿇어봐야지.
내가 황태자에게 시달리는 편이 아이린이 곤란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말은 고맙지만 아니에요.”
다행히 아이린은 부정했다.
“아버니……아니, 춘부장께서는 잘 지내시죠?”
“춘부장이 뭐야, 춘부장이.”
평소 부르던 대로 못 불러서 그런가.
그럼 알베지아 남작이라고 하면 될 텐데.
신기한 표현이었다.
“갑자기 아버지 안부는 왜?”
“그냥요.”
“흠.”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아버지는 아이린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아직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면 궁금할 수 있을 법하긴 했다.
“잘 지내시지. 남부는 조용하다고 몸이 뻐근하시다더라.”
“건강이 안 좋아지신 건 아니고요?”
“삼십 년은 더 정정하실걸.”
내게는 아버지에게서 흰머리가 자라는 모습조차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마 나보다 더 오래 사실 거다.
“그래도 한동안 뵙지 못했으니 선물을 드리려고 해요. 불편하게 느끼시진 않겠죠?”
“싫어하실 이유가 뭐 있어. 나한테 자식 놈은 선물도 안 준다고 뭐라 하기나 하겠지.”
수도에 올라와서 연락 안 했던 거랑 합쳐서 박박 속을 긁어댈 것이 아주 눈에 선했다.
“그럼 케일은요?”
아이린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케일 당신은 받고 싶은 선물이 있나요?”
“나?”
“옛날엔 지팡이나 수정구슬이나 갖고 싶어 하는 것 많았잖아요. 드레이크의 비늘을 빻아 바른 벽조목 지팡이었던가요. 아직도 기억나네요.”
“그랬었지.”
내 재능에 취해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고 가문의 기둥뿌리마저 뽑으려 들었지.
“지금은 아니야.”
이제 와 가져 봐야 이 몸으로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
아이린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의 뒷전에 선 세실리아가 타이밍 맞추어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뭔 반응이야?
“……그럼 다른 거라도 원하는 게 없나요?”
“없어.”
하나 있긴 했다.
엘릭서.
근데 이건 현시점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없는 걸 바라는 건 억지다.
“정말 없어요?”
“응, 없어.”
“이러면 안 되는데…….”
아이린이 중얼거리며 초조한 듯 옆머리를 배배 꼬았다.
뭐가 안 된단 거지.
잘 모르겠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 드린다고 나한테까지 줄 생각 안 해도 돼. 그동안 네게 받은 것만으로 난 충분해.”
알베지아 남작가가 레오나드 공작가에게 받은 투자만 해도 산더미다.
예의상 아버지 주는 김에 내게도 주려 한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었다.
그럴 돈이 있으면 본인에게 투자하는 편이 나는 더 기뻤다.
“……알겠어요.”
아이린은 이내 시무룩해진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대체 뭐였지.”
선물 안 줘도 된다는데 왜 기분이 상했을까.
나는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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