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3화 개인교습(3)
* * *
“…….”
시에라의 발언에 나는 말문이 막혀왔다.
농담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의 그녀가 이런 농담을 내뱉을 리도 없었다.
밀런과 가까이하지 말라.
내가 말하면 시에라는 정말 그리 행동할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그녀는 진심이었다.
“……내 뭘 믿고 그렇게 말해? 날 안지 얼마나 됐다고.”
“오래되진 않았어도 내가 곤란할 때마다 매번 도와줬잖아.”
“겨우 그거야?”
정확히 말해 도와준 건 첫 만남의 한 번뿐이다.
그때마저 순수한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은 건 아니었다.
아이린에게 생길 불필요한 다툼의 소지를 지우기 위해서였지.
무슨 제 자식 보듯 시에라에게 전적인 믿음을 받을 일은 안 했다.
“겨우가 아니야.”
시에라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케일이 아니면 누가 도와줬겠어.”
그러다 이내 녹아내리듯 표정을 풀고 말간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전하나 공녀님이랑도 친해졌는걸. 케일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
내가 아니라도 시에라를 도와줄 사람은 많았다.
황태자의 경우 내가 끼지 않았다면 지금 현재 시에라와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이기까지 했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방해를 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아이린은 지금처럼 데면데면한 게 아니라 철천지원수가 됐을 테니 내 중재가 적절하긴 했지만…….
내게 오지 말아야 할 과도한 신뢰로 인해 양심에 찔리기까지 했다.
“네 성격이라면 나 아니었어도 잘 적응했을걸.”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계면쩍은 말 돌리기가 아니라 진심이었음에도 시에라는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었다.
나보고 믿을만한 사람이라면서 내 말은 안 믿는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같은 귀족이니까 귀족끼리 도는 소문 같은 게 있을 수 있잖아. 종종 있다고 교회 친구한테 들었어.”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
겉으로는 세상 고귀한 귀족처럼 행동하면서 뒤로는 온갖 추악한 짓거리를 벌여 소문이 난 이들.
반대 파벌에서 낸 헛소문일까 싶은 것조차 보통은 진실이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처럼 측근 혹은 피해자가 낸 소문이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좀 다른 경우지만.
그녀는 소문과 현실이 같았다.
그래도 그만하면 양심적이지.
공작가 금지옥엽이 좀 까칠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이린이 선을 넘지는 않았다.
선을 넘기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내가 여기까지 와있는 것이기도 했다.
“근데 토메르 경은 소문도 좋아.”
매너 있고, 우아하며, 배려심이 깊었다.
문학에서나 등장할 법한 비현실적이고도 이상적인 귀족의 면모.
수상한 소문이 난다고 한들 웃어넘길 가십거리 취급이었다.
“그럼 케일은 토메르 님을 왜 싫어하는 거야?”
“음습해서.”
“음습해?”
기이한 표현에 시에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착한 척하는 놈은 티가 나는 법이거든.”
억지처럼 들리겠지만 내게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원작 속 주요 등장인물 중 속셈 없고 순수하길 타고난 이는 시에라 한 명이었으니까.
“내 안목에 그렇다는 거니까 반박 안 받는다.”
“그렇구나.”
시에라는 내 말을 곱씹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조심할게.”
“내 안목에 그렇다는 얘기니까 너는 너대로 판단해도 돼.”
“토메르 님보다는 케일을 믿으니까. 착각이었다면 그때 토메르 님한테 사과할게.”
거듭 만류하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왜 만류해야 하지.
밀런이 악역임은 확실하다.
시에라가 그를 경계하게 되어 피해가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나쁠 것 하나 없었다.
“그럼 깊은 얘기는 가급적 꺼내지 마.”
“깊은 얘기?”
“가령 조별 과제에서 마나 서킷의 구조와 구성 같은 거 말이야.”
수작을 부리려면 거기서부터겠지.
밀런은 순수한 마음으로 돕는 척하며 함정을 심는 악랄한 놈이었다.
“내가 짠 서킷 구조에 실수는 없어. 그놈보다 내가 더 똑똑하니까 이상한 것 같으면 나한테 말해.”
밀런의 두뇌가 비상할지언정 기껏해야 수재 수준이다.
내 결과물에 훈수를 둔다면 이는 제 분수를 모르는 망나니 짓거리였다.
불만이면 마탑에 영입 제안받고 말해라.
아닌 이상 밀런 말고 내가 정답이었다.
“응, 절대 말 안 할게.”
시에라는 주먹을 움켜쥐며 굳은 결의를 표했다.
“이상한 것 같으면 꼭 케일한테 말할 테니까 그땐 잘 부탁해.”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기분이 좋아진 듯 콧노래를 불렀다.
******
“마법 한 번 써봐.”
밀런 때문에 잡담이 길어져 괜히 아까운 시간만 소모했다.
분위기를 정리한 나는 본격적인 시에라의 교습에 들어갔다.
“저번에 보여줬던 마법으로.”
“괜찮을까……? 저번처럼 실수하면 어떡해.”
“네 나름대로 실수 안 하려 대책을 짰을 거 아냐. 안 했으면 할 말 없는 거고.”
“우…….”
냉랭히 말을 내뱉자 시에라는 입을 삐죽 내밀고 울먹였다.
“……진짜 생각 안 한 거 아니지?”
“해, 했어!”
“다행이네. 안 했으면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너무해.”
“너무하긴. 기본 예의야.”
교사만 노력하는 게 수업인가.
학생도 노력해야 수업이다.
준비가 안 된 이에겐 기회를 줄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괘씸해서 안 해 먹을 거다.
간밤에 머리 싸매고 커리큘럼을 짠 내 노력에 대한 폄훼였다.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어 줘.”
여전히 불안한지 그녀는 날 재촉해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렸다.
“후우.”
떨림 가득한 한숨.
나는 시에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천장에 박힌 마나석에 의해 피부로 느껴질 만큼 질척한 마나 농도.
민감한 이에겐 그 흐름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
그리고 시에라의 주위에서 마나는 마법 발현 시에 생성되는 특유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집중해서 관찰하면 체내로 흡수된 마나가 배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나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 변질된 채로.
……저러니 다들 그녀가 마법사라 착각하고 있지.
얼핏 보기엔 마법사와 같으나 그녀가 다루는 힘은 마나가 아니었다.
생명의 의지이자 신의 존재 증명.
이제는 신화 속에서나 언급되는 신성력이다.
“돼, 됐다!”
그녀는 이번엔 실패하지 않았다.
허공에 떠오른 물의 구체는 싱글의 마법인 워터 볼이었다.
“흐음.”
허공에 생성된 물이 정확한 구체의 형상을 이루었고, 물의 흐름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회전했다.
흠잡을 부분 없이 합격점이었다.
“어, 어때?”
“부족한 제어력 부분을 많이 다듬었네.”
“응! 그때 실수한 이후로 혼자 많이 연습해봤거든.”
반짝이는 눈망울과 살랑대는 폭신한 머리카락이 그녀의 흥분한 심정을 방증했다.
주인한테 칭찬해달라는 강아지 같네.
“그럼 이제 다른 거 해봐.”
“다, 다른 거?”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은 건지, 아니면 그 마법만 몸에 때려 박아 요령을 찾은 건지 확인해봐야지.”
교차 검증은 언제나 중요하다.
결과에 따라 내 수고가 대폭 줄어들 수 있을지 아닐지가 갈렸다.
“앗.”
그리고 자신 없는 눈치이던 시에라는 역시나 대실패했다.
횃불 대용인 빛속성 싱글 마법 라이트는 섬광탄으로 변해 내 눈을 찔렀다.
이게 전쟁 마법으로의 변형이었다면 박수 칠 성공이었다.
아니라서 문제지.
“괘, 괜찮아?”
“앞이 안 보여.”
“어떡해애. 진짜 미안해.”
속이 탄 시에라의 발 동동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보인 게 아니고 들렸다.
강렬한 빛의 투사에 진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시력이 금방 회복된 건 발현 마법이 라이트임을 확인한 순간 눈을 감은 덕이었다.
실패할 확률을 높게 잡은 내 선견지명이 빛을 발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네. 워터 볼은 그냥 반복 훈련을 통해 성공확률을 높인 거였어.”
“……응,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굴리면 다 될 거라고 했던 내 말을 감명 깊게 들었나.
진짜로 자기 몸을 굴려서 그 하나만 되게 만들었다.
이 기회에 주인공 버프로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런 편의주의적 전개가 진행되는 일은 없었다.
“서킷을 통한 변형 과정도 그대로 졸속 처리하고 있네.”
그야 마법이 아니라 신성력을 통한 기적의 발현이니 그렇게 되겠지만.
지금 나는 마법을 가르쳐주는 입장이니만큼 이에 장단을 맞춰주어야 했다.
“그래도 요령을 찾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건 희망적이야.”
그마저 안 됐으면 구제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나는 시무룩해진 시에라를 위로할 겸 바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원리를 공부해도 너는 그게 적용되지를 않는 거잖아.”
“응.”
“그럼 별수 없지.”
이런 경우는 찾아보면 수두룩했다.
그리고 내 조국 한국에서는 이 해결 방안을 국가 단위로 조장해 현실화시켰다.
“몸에 때려 박아서 외우자.”
주입식 교육.
“별로 안 어려워. 요령만 배우면 성공할 테니까 그 과정까지만 고생하면 돼.”
근본적인 해결책?
그걸 탐구하여 가르쳐주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었다.
상기했듯 본인의 깨달음의 영역이다.
“대신 요령은 내가 직접 알려줄 거야.”
그냥 반복 훈련만 시킬 거면 개인교습을 감행한 의미가 없었다.
“잠시만.”
“으, 응?!”
나는 시에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란 그녀가 새된 소리를 지르더니 딱딱하게 굳었다.
“미안. 신체 부위를 접촉하는 편이 효율이 더 좋아서. 부담스럽다면 관둘게.”
“아, 아니야. 그냥 잠깐 놀란 거니까 사양 안 해도 돼.”
얼마나 놀랐는지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미리 말 좀 해줄 걸 그랬나.
나 같아도 부담스럽긴 했겠다.
“근데 효율이 좋다니……?”
“요령을 알면 마법을 쓸 수 있잖아.”
그러니까.
“그 요령은 내가 직접 몸으로 가르쳐줄게.”
원래 머리로 외우는 것보다 몸으로 외우는 게 빠르고 오래 갔다.
신체 내부 마나의 흐름을 직접 인도해줄 생각이었다.
비유하자면 각인 작업과 같았다.
“모르겠으면 몇 번이고 반복해줄 테니까 잘 기억해서 연습해.”
이건 마법사의 직계 스승도 아끼는 제자에게나 행하는 귀한 가르침이다.
제게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에 감격한 시에라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