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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29화 (29/40)

〈 29화 〉 29화 ­ 조별 과제 준비(6)

* * *

시에라는 내 발언에 눈꼬리가 축 늘어졌다.

“그거 꼭 해야 하는 거야?”

“안 하면 조원끼리 어떤 수준인지 어떻게 알겠어.”

“고수는 눈썰미만으로 하수의 수준을 안다고 하던데…….”

“소설 속 망상이지.”

기사라면 그럴 수 있었다.

걷는 자세라든가, 손가락의 굳은살이라든가, 하체의 튼튼함이라든가.

단련된 몸은 결국 외부에 티가 나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법사는 아니었다.

마법사의 우열은 마나 서킷의 활용에서 드러나는 법.

겉보기로는 일반인보다도 범상할 수 있었다.

물론 수준 파악 용도로 쓰이는 마법이 존재하긴 했다.

그치만 지금은 내가 못 쓰니 논외다.

“나 마법 시연은 딱히 자신이 없어서 그래.”

“자신 있는 사람 몇 명 없어. 그리고 자신이 없으니까 더 연습해야지.”

“……그런가?”

정론을 꺼내자 시에라는 반박하지 못하고 동의했다.

“부탁이니까 보고 웃지만 말아줘.”

“걱정하지 마. 안 그럴 테니까.”

나는 자신을 갖지 못하는 시에라를 연신 다독이면서도 의아해했다.

이렇게까지 내빼거나 겁먹을 필요가 없는데.

A반 내에서 하위권인 거지 A반 소속인 자체가 엘리트의 증거다.

뭘 걱정하는지 모르진 않았다.

마법의 제어가 익숙지 않아 초보적인 실수라도 할까 우려하는 것이었다.

내 명성이나 아이린의 냉철함도 있으니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비교하며 완벽함을 추구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해봐야 하는 법이었다.

실수를 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었다.

보지도 않고 주저리주저리 떠들면 나는 사기꾼이나 스토커였다.

“제가 먼저 할게요.”

반면에 아이린은 일절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미적거리는 시에라가 답답했는지 도도하게 나섰다.

“다룰 수 있는 주요 원소는 불, 메이지 등급은 트리플이에요.”

마법사는 각자 주로 다루는 원소가 달랐다.

사람에 따라 원소에 대한 친화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은 마법사가 보편적으로 다루는 원소다.

화려함과 폭발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며, 주로 전쟁 마법에 활용되는 편이었다.

냉랭하다는 평을 듣는 아이린의 속성으로는 의외일지 모르나, 화끈한 그녀의 성정을 대입하면 또 어울리기도 했다.

“와, 트리플…….”

시에라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마법사의 수준은 싱글부터 더블, 트리플……디커플까지 열 단계로 구분됐다.

다섯 번째인 퀸터플부터는 보통 가문의 전속 마법사로 영입됐다.

여섯 번째인 섹터플은 궁정 마법사 수준이다.

마탑 소속 마법사는……구분을 안 하는 편이 좋았다.

수습이 퀸터플이고, 섹터플은 널린 데다 셉터플에 옵터플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마탑이 괴물들인 거지 트리플만 해도 대단한 수준이다.

나이대도 그렇고, 귀족 영애로서 평소 마법에만 몰두했을 리도 없으니 이는 곧 재능을 일컬었다.

나랑 같이 있을 때는 더블이었으니 순조로운 성장이었다.

제대로 배운다면 더 높은 수준에 오를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놀랄 것 없어요. 케일은 쿼드라니까요.”

“비공식이잖아.”

“그 비공식 등급 판정이 열 살이 안 됐을 무렵의 이야기였죠?”

“와아아.”

날 바라보는 시에라의 눈빛이 별빛을 담은 듯 반짝거렸다.

부담스럽네.

어릴 적에 쿼드라였으면 뭐해.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인데.

과거의 영광이었다.

“트리플이면 파이어볼은 쓸 수 있나?”

“보여드릴게요.”

누굴 물로 보냐는 듯 코웃음 친 아이린이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의 흐름이 그녀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잔잔히 떠오른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은 파도치는 마나의 영향이었다.

후욱!

이내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뜨거운 열풍이 내 피부를 때렸다.

찻잔 속 찻물이 기화하여 수증기로 변하였고, 눈을 뜨기 힘든 광원이 아이린의 손위에 떠올랐다.

“그만.”

화염이 뭉친 구는 나타난 것만큼이나 사라진 것도 홀연했다.

그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이린의 뛰어난 실력을 증명했다.

마법을 완전히 제어하고 있지 않으면 발현된 마법을 무로 되돌리긴 불가능하다.

어림 짚어도 완숙된 트리플의 실력이었다.

“아쉽네요. 파이어볼의 진가는 폭발에 있는데요.”

“실력 증명은 이걸로 충분하잖아.”

그거 여기서 터뜨렸다 가구 하나라도 박살 냈다간 출입 금지다.

뽕도 못 뽑았으면서 내쫓기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아이린은 괜찮지만 시에라까지 출입금지가 되면 황태자가 많이 곤란할 터였다.

아이린이 원흉임을 알게 되면 좋은 인상을 품진 않을 터.

피해야만 할 나비 효과였다.

“많이 발전했네.”

나는 솔직한 감상을 토했다.

아이린이 트리플인 건 원작대로다.

그러나 완숙된 경지인 건 차이점이었다.

원작보다는 마법 수련에 더 치중했다는 의미, 좋은 현상이었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본인을 보호할 수단은 아무리 많아도 모자랐다.

“그럼요.”

아이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아무 것도 못하고 무력하게 당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거든요.”

……납치 때의 이야기인가.

트라우마로 남을 경험이긴 했지.

그 하나로 나나 아이린이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트라우마에 잡아먹히지 않고 극복해야 할 목표로 삼았다면 나로서도 보람이 있었다.

“다음으로 시에라.”

아이린은 덤, 실력 점검을 시작한 진짜 목적은 그녀다.

원작의 같은 시점을 비교하면 쓸데없는 노동 같지만, 다시금 서술을 떠올려보면 이럴 수밖에 없었다.

실력이 워낙 괴랄해야지.

직접 보지 않고서는 견적이 안 나왔다.

“다룰 수 있는 주요 원소는 오대 원소와 빛, 메이지 등급은 더블이에요.”

“……뭐라고요?”

과연 시에라가 말을 내뱉은 순간 아이린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메이지 등급은 더블이면서, 다룰 수 있는 원소가…….”

“오대 원소와 빛이요.”

“말도 안 돼.”

아이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기초적인 마법이라면 저도 모든 속성을 아우를 수 있어요.”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다루는 원소는 하나, 재능이 있다면 둘, 반신의 경지라는 마탑의 탑주가 넷이다.

그걸 다섯도 모자라 여섯?

심지어 빛 속성은 다룰 수 있는 마법사가 전 세계를 아울러 손에 꼽혔다.

시에라의 착각이라 치부하는 편이 상식적이었다.

“아니에요. 주요 속성이 아닌 원소를 다룰 때의 불편함이 없는 걸요.”

개인이 가진 친화력은 마법 발현 과정에서의 불편함에서 드러났다.

아이린이 불 속성 마법을 발현할 때 손발을 움직이듯 자연스럽다면.

다른 속성의 마법 발현에서는 물속을 헤엄치는 듯한 답답함이 드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 불편함이 전혀 없다?

천부적 재능이 결정짓는다는 다중 속성 마법사였다.

“거짓말. 아무리 본인의 수준이 제일 떨어진다고 해도 과장을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렇지……!”

“고작 더블이잖아요? 마법을 제대로 배우면 본인의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아이린은 아예 헛소리라 낙인찍고 있었다.

말마따나 고작 더블이라 그랬다.

어쭙잖게 실력을 갖춘 때이기 때문에 착각할 수 있었다.

“케일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이 전개는 원작 대로였다.

시에라가 본인의 실력을 공개하면 아이린이 트집을 잡았지.

아이린은 고작 평민이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일말의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황태자 앞에서 제 가치를 높이려는 여우짓이라 여길 따름이었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이 과제 발표 직전 두 사람의 대결이었다.

시에라는 그 과정에서 창피를 당하고, 아이린은 황태자의 신의를 잃으며 악녀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과제 발표에서 대형 사고까지 치고 말았다.

다행히 두 사람의 대결은 내가 보험을 들어놨다.

마담 레옹의 부티크에서 시에라의 교복을 수선한 것이 그것이었다.

원작처럼 시에라의 옷이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을 터.

그래도 두 사람의 불필요한 감정싸움은 말리는 편이 최선이었다.

시에라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아이린의 명분은 참인지 거짓인지 실전으로 증명하란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누구 한 명의 편을 들어주기보다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더블이니까 주요 속성은 뭐가 됐든 신경 안 쓴다. 마나 서킷의 활용력을 보고 싶을 뿐이야.”

실제로 현시점에서 시에라의 다중 속성은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었다.

그게 맞든 아니든 과제에는 아무 영향도 못 끼친다.

그걸로 협력 점수 까먹으면 우리 셋 다 손해였다.

“자신 있는 마법부터 펼쳐봐.”

“응.”

시에라는 논쟁을 멈추고 집중하려는 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얍.”

귀여운 기합성.

그리고 찻잔에서 물이 용솟음쳤다.

기시감이 들었다.

소설 속의 장면.

조원과 장소가 달라져도 이렇게 되나.

이어진 광경은 불어난 물줄기의 화려한 비산이었다.

“꺄악!”

“아가씨!”

“주인님!”

폭풍처럼 쏟아지는 물줄기에 시에라는 비명을 질렀고.

아이린은 세실리아에게 보호받았으며.

루나는 화들짝 놀라 날 껴안았다.

“괜찮으십니까?”

“……그래요.”

과연 공작 영애의 호위 기사.

세실리아는 아이린의 옷가지에 물방울 한 방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감싸주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앗, 혹시 알고 계셨어요?”

“그렇긴 해.”

“……죄송해요. 제가 주인님을 방해했어요.”

“아니야,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많이 안 젖어서 다행이다.”

대충 예상했던 나는 의자를 끌고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괜히 루나만 중간에 끼어 치마 끝이 젖고 말았다.

시무룩해지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좋은 시도였다 위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초보적인 실수…….”

아이린이 한심하다는 듯 시에라를 흘겨보던 중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하아, 역시 실패했어.”

난데없이 분수 쇼를 선보인 시에라는 혼자 샤워라도 한 듯 젖어 있었다.

폭신폭신한 머리카락의 볼륨이 가라앉은 모습에서 물에 젖은 강아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눈에 들어오는 부위가 여럿 있었다.

물에 젖어 몸에 딱 달라붙은 교복.

워낙 스타일 좋았던 몸매인지라 노출이 없음에도 매혹적이었다.

“……!”

“눈 돌려요!”

부끄러운 꼴을 눈치챈 시에라가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아이린이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요?!”

내 눈을 가린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뭔가, 뭔가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 나 지금 눈 감으려고 했는데…….”

“닥쳐요. 변명하지 마요.”

아이린의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나가 바톤을 터치했다.

“주인님, 이런 건 못 본 척해주셔야죠.”

“아니, 그럴 겨를도 없었잖아.”

사태를 파악하기 무섭게 이 상황이다.

나를 욕망에 정신 팔린 남자로 오해하면 억울했다.

“정말이지…….”

들려오는 소리로 짐작하건대 아이린의 시녀가 예비용 수건으로 시에라를 닦아주는 듯했다.

이어 열풍이 불어닥치더니 루나가 내게서 손을 뗐다.

“…….”

“…….”

시에라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곧장 눈을 피했다.

볼에 선연히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부끄러워 안 해도 되는데.

진짜 얼핏 눈에 들어왔을 뿐이지 보고도 별 감상 없었다.

“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피드백해야 하는데 안 마주 보면 어떡하라고.”

아이린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짜증 섞인 오오라가 눈에 보일 기세였다.

근데 난 억울했다.

실수는 시에라가 했는데 왜 나한테 뭐라 그래.

나는 못마땅한 아이린의 눈빛을 흘려넘기며 말했다.

“일단 잘 봤어.”

“케일.”

“아니, 그 뜻이 아니고.”

황급히 말을 이었다.

“너…….”

나는 시에라의 마법 발현에 수반되었던 마나의 흐름을 떠올렸다.

“……대체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시에라의 마법 발현 과정은 비정상적이고 기괴했다.

즉, 저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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