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28화 조별 과제 준비(5)
* * *
생각보다 아이린의 도착이 빨랐다.
아니면 내가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끌었던가.
시간이 정각인 걸 보면 후자였다.
명검도 손질을 멈추면 녹슨다지.
그동안 방만히 지내지는 않았다만 실력이 퇴화하긴 한 모양이었다.
“내가 왜?”
“내가 왜라뇨.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태연한 내 대꾸가 어처구니없었는지 아이린이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호들갑을 떨 만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혈색이 줄긴 했어도 원체 하얀 피부라 티가 안 났다.
이 작은 변화를 알아챈 아이린의 눈썰미가 뛰어난 것이었다.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괜찮다, 이만하면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지끈거리는 통증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어제 밤을 샜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잠깐 빈혈이 왔을 뿐이야.”
“빈혈?”
아이린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제가 케일을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닌데 그런 변명이 통할 것 같아요?”
그녀는 얼핏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다.
“기사에 버금가는 훈련도 버틴 사람이 빈혈 같은 소리를 하기는.”
내가 들어도 헛소리긴 했다.
알베지아 남작가가 기사 가문인데 그 핏줄이 어디 가겠나.
마법사라도 몸은 튼튼했다.
“안 되겠어요. 세실리아, 상태를 확인하고 보건실로…….”
“괜찮다고 했잖아.”
다가오려는 세실리아를 손을 펼쳐 제지했다.
마법사와 기사가 다르대도 자세히 내 몸을 살펴봤다간 상태를 들킬 수 있었다.
기껏 숨겨온 사정을 이렇게 허무하게 들킬 순 없었다.
“내 몸 상태는 내가 관리할 수 있어.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
혈색 죽은 정도는 마법을 쓰려 했던 반동으로는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부정기적 발작에 비하면 증상이 없는 수준이다.
쉬면 알아서 나을 테니 진정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
단호한 거절에 아이린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러다 순간 옷깃을 쥔 손에 팍 힘이 들어갔다.
“자기는 내 걱정 잘만 했으면서 왜 나한테는…….”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바로 앞이었는데 골목을 헷갈렸어요.”
아이린의 뒷말은 막 도착한 시에라의 목소리에 묻혔다.
“으음, 분위기가 왜 이래요?”
기세 좋게 등장한 시에라가 장내의 어색한 침묵에 의문을 던졌다.
“혹시 제가 너무 늦어서……?”
당장 직전의 만남에서 실수하여 혼났던 시에라다.
또 제 잘못일까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아니에요.”
아이린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이만하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요.”
늦었지만 고작 2분.
이 정도는 오차 범위 내였다.
제대로 위치 설명도 해주지 않았는데 잘 찾아왔지.
물기 젖은 앞머리로 미루어 보아 지각하여 얼마나 속을 졸였을지가 훤했다.
트집 잡아 지적할 수야 있지만 괜한 짓이었다.
“계획대로면 좀 더 늦었어야…….”
“네?”
“자리에 앉으라고 했어요.”
“네.”
휴.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시에라가 적절한 시기에 등장하여 내 화제가 물 흐르듯 넘어갔다.
뜬금없이 또 말을 꺼내진 않겠지.
나는 불만스레 날 흘겨보는 아이린의 시선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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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로 과제 이야기로 들어가기보단 아침 식사부터 마쳤다.
가볍게 샐러드에 스프, 나만 따로 닭가슴살구이를 부탁했다.
식사 시간은 화기애애하진 않았으나 어색하지도 않았다.
시에라가 어제의 실수를 반성은 하되 마음에 두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이린과 대화하며 딱히 불편해하는 티가 나진 않았다.
식사 예절로 몇 번 지적을 받긴 했는데…….
바로바로 고쳐낸 덕에 아이린에게서 추가적인 지적은 쏟아지지 않았다.
“다들 과제에 관해서 생각은 좀 해봤어?”
내가 운을 띄우며 본격적인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주제가 마법의 조합이었지?”
“맞아.”
“솔직히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감이 잘 안 잡히더라.”
시에라가 말하기 쑥스러운 듯 고개를 떨군 채 두 검지를 맞댔다 뗐다가를 반복했다.
해석하자면 모르겠다는 뜻이다.
그럴 수 있지.
괜히 과제의 시작부터 난관이라 했던 게 아니다.
마법의 조합이라는 그 개념부터가 생소하게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과제의 진행에 그녀가 아이디어를 내진 않았었다.
그런 쪽으로는 황태자가 버스를 태웠지.
“아이린은?”
“……가문의 마법사에게서 마법 조합식을 받아왔어요. 그중에 하나를 고르면 되겠죠.”
시에라가 맨땅에 헤딩을 했다면 아이린은 족보를 받아왔다.
역시 공작가 영애.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않아도 주위에서 알아서 답을 바치는구나.
“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이래서 안 될 건 또 뭐죠? 제이스 교수님께서 금지 사항을 정하신 것도 아닌데.”
“그으렇긴 하지만요오.”
시에라는 도와달라며 내게 눈짓했다.
“저렇게 해도 돼.”
“정말?”
“참고 자료도 못 쓰는 과제를 학생이 무슨 수로 완성하겠어.”
백지에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건 학생이 할 일이 아니다.
아카데미 교수나 마탑의 마법사가 할 일이지.
우리는 있는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충분했다.
햇병아리에게는 아무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치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과제를 마친다면 형평성이…….”
“생각해놓은 것도 없는 주제에 불만만 많네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이 의견을 내세요.”
“우으.”
아니꼬우면 네가 해라.
버스 승객인 시에라는 기사님이 내뱉은 무적의 논리를 이기지 못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부연했다.
“형평성에 어긋나진 않아. 고생스럽기야 하겠지만 도서관 가서 뒤지면 다 나온다.”
이프린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마탑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에겐 보물섬이나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난제는 며칠만 찾아보면 참고할 문헌을 찾을 수 있었다.
마법의 조합식도 마찬가지다.
관련된 정보를 정리한 문헌은 존재할 터였다.
아이린이 가져온 정보만큼 자세하진 않겠지만.
“자료 줘봐.”
“여기 있습니다.”
내가 부탁하자 아이린의 시종이 내게 종이를 건넸다.
나는 이를 낱낱이 훑었다.
“흠.”
……쓰읍.
나는 숨 들이켜는 소리를 삼켰다.
“어떤가요?”
“이게 다야?”
“……마음에 안 드나 보군요.”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닌데.”
더 볼 것도 없다.
나는 궁금해하는 시에라에게 자료를 넘겼다.
“난이도가 너무 높지 않아?”
어지간해야 아이디어를 채용하지.
기본적으로 활용해야 할 기교가 최소 속성 다중 변환이었다.
이걸 셋으로 나눠보면 1+1+1이 아니라 3+5+2 정도의 식이 나온달까.
신입생 수준엔 과하다.
이건 답을 알아도 못 하는 종류였다.
자료를 살펴본 시에라가 고급 이론의 향연에 헤롱헤롱댔다.
“케일이라면 가능하잖아요.”
아이린은 그게 뭔 대수냐는 투였다.
“일부러 케일의 수준에 맞춰 추려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면 높은 성적은 따 놓은 당상이니까요.”
“괜한 짓 했네.”
“괜한 짓이라뇨?”
아이린의 눈썹이 꿈틀댔다.
단어 선정이 마음에 안 들었나.
하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가 해내도 너희들이 못 해내면 이게 다 뭔 소용이야.”
조별 과제다, 조별 과제.
나 혼자 잘 해내면 그게 내 능력 피로연이지 조별 과제인가.
제이스 교수가 날 칭찬하기야 하겠지만 그러면 나머지 둘이 뒷전이었다.
협력 점수도 최악이겠지.
한 사람이 나머지를 버스 태우면 그게 감점 요소가 된다는 점이 조별 과제의 악랄한 점이었다.
이래서 하나같이 조별 과제를 최악이라 손꼽는 거다.
결과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해 모두가 제 몫을 해줘야 했다.
만약 한 명이 탈주하기라도 하면 그때부턴 헬게이트 오픈이다.
지가 싫다고 잠수 탄 건데 그게 왜 내 잘못이 되는 겁니까, 교수님.
머리를 스치는 과거의 기억에 치가 떨려왔다.
하나 차라리 그런 경우면 나은 축이다.
정 뭐하면 이름만 올려놓고 적당히 스토리 꾸며주면 되는 일이었으니.
근데 지금의 경우엔 하필 발표가 마법 시연인지라 언변으로 속여넘길 수 없었다.
한술 더 떠 내가 저 마법 조합의 중점을 부담하기도 불가능했다.
이 몸 상태로 옛 마법 실력을 기대하면 양아치지.
그러니 기준으로 삼을 대상은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우리 세 명의 절충점을 찾아야 해. 아마 시에라의 현재 수준보다 조금 높은 지점이 되겠지.”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지금은 막 각성한 풋내기다.
입학 성적에서 드러났듯 조원 중 가장 뒤떨어지는 이는 시에라였다.
그렇기에 기준점은 그녀였다.
그녀가 해낼 수 있다면 우리야 해낼 수 있으니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
아이린은 불퉁한 표정이었다.
기껏 준비한 자료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뾰로통하겠지.
시에라가 발목을 붙잡았다 생각되기도 할 테고.
하지만 한 번은 겪어봐야 할 경험이었다.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
적어도 상대방에게 가능한 수준이어야 맡긴 일을 해낼 수 있는 법.
수하를 다루려면 이를 어림하는 판단력을 갖춰야 했다.
불가능한 성과를 강요하면 사람은 선을 넘기 마련이었다.
그 절망감과 분노가 본인에게 향할지 남에게 향할지는 미지수.
나는 아이린이 이번 조별 과제를 기회 삼아 그런 일을 겪지 않게 되길 바랐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뭘 해낼지 정하기 전에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해.”
일종의 실력 점검이었다.
“내 마법 실력이야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마탑의 제안을 거절한 아직도 천재라 불리는 몸이다.
내 순서를 넘어가기 위한 핑계로는 적절했다.
“너희들 스펙부터 견적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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