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27화 조별 과제 준비(4)
* * *
아카데미에서 보낸 첫 주.
다행히 첫 수업이었던 마법의 탐구를 제외하면 딱히 따라가기 어려운 수업은 없었다.
누가 봐도 제이스 교수가 이상한 거다.
강의 첫날 풀강을 달성하고 과제마저 조별 과제?
이런 천인공노할 교수가 둘이나 있었다면 이는 아카데미의 재앙이었다.
여하튼 의외로 마법을 제외하고도 흥미로운 과목이 많았다.
대륙의 역사, 협상의 기술, 몬스터 연구, 이종족 문화사…….
뭐든 배워두면 도움이 되는 강의다.
이프린 아카데미가 세계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렇게 바쁜 평일 일과를 마치고 마침내 맞이한 주말.
수업의 난이도에 관계없이 낯선 환경에선 피곤함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맞이한 첫 주말이니 느긋하게 지내려는 계획이었다.
점심까지 늦잠도 자고, 오후엔 산책이나 다니면서 시간을 때우고…….
“주인님, 일어나…….”
“……안녕, 루나.”
“아, 일어나 계셨네요.”
그럴 생각이었는데.
계획이란 언제나 변동되기 마련이었다.
저 느긋한 일상의 영위는 입학 바로 전날 짠 내 계획이다.
입학 다음 날 조원이 결정된 후로는 바로 변경되었다.
“오늘 조별 과제 회의잖아. 일찍 일어나야지.”
강의가 있는 날도 아닌데 평소랑 똑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일어나기야 일어났는데 은근히 억울했다.
내가 왜 이 시간에 만나자고 했지.
그냥 점심 먹고 널널한 시간대에 만나자 할걸.
의욕이 앞서는 것도 탈이었다.
이미 남보다 우월한 라인에서 시작하는 과제인데 뭐가 급하다고 그랬을까.
후회는 언제나 닥치고 나서야 하게 되는 법이었다.
“끄으으…….”
부스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오자 다히트가 비실비실 눈을 떴다.
“미안, 깼어?”
“아, 죄송해요. 제가 소란스럽게 해서…….”
“아니, 그, 아니야. 그냥 일어나던 대로 눈이 뜨인 거지.”
그런 것치고는 아침에 약한 대로 비몽사몽이었다.
많이 미안했다.
“오늘 주말 아니야? 어디 가려고?”
“주말 맞아. 조별 과제 회의 약속 때문에 나가는 거야.”
“아아, 조별 과제…….”
다히트가 머리를 짚었다.
저혈압인지 조별 과제라는 스위치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도 그거 회의해야 하긴 하는데.”
“약속은 잡았어?”
“아니, 아직 인사 한 번 건네본 게 전부야. 귀족 나으리들께서는 내가 같은 조원이란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야.”
골치가 아프니 잠이 깨는 듯 다히트의 발음이 명확해졌다.
“다들 너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면 얼마나 좋아.”
“……어려운 일이긴 하지.”
“그러니까. 조별 과제라는 건 대체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어.”
조별 과제란 첫 경험자도 치를 떨게 만드는 위엄을 자랑했다.
친화력 높은 다히트가 이럴 정도면 다른 조는 말 다 했다.
어찌 보면 우리 조는 양호한 조합이었다.
아이린과 시에라가 대립해도 내가 중재할 수 있으니 훨씬 나았다.
“주인님.”
“아, 참. 바로 준비할게.”
이러다 늦겠네.
정각에 도착해도 눈치 보일 일인데 지각이라도 했다간 재앙이다.
나는 급히 씻고 준비를 마쳤다.
“고생해라. 나도 일어난 김에 회의 하지 않겠냐고 권유해봐야겠다.”
“그래, 너도.”
고생이라.
오늘은 저번에 모였을 때처럼 문제 생기지 않겠지.
불안했지만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나를 제외하면 마법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랄 테니까.
******
이프린 아카데미의 상권이란 보통 교문 밖을 말했다.
부지가 수도에 위치하니 따로 아카데미 내부에 상권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돈을 쏟아붓는다고 한들 아카데미 내부 상권이 수도의 상권을 이길 수가 있겠는가?
그로 인해 문화 생활을 즐기고자 한다면 외출 신청부터 끊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카데미 내부가 전부 강의동이나 연구소란 소리는 아니었다.
카페 정도야 당연히 존재했다.
……그 유명한 대학원생들의 덕이었다.
그들이 움직일 시간이 어디 있다고 외출 신청을 끊어 카페인을 충전하겠는가.
그렇게 상권 진입이 허용되지 않은 아카데미에서 카페만큼은 이례적으로 도입되었다.
내가 향하는 목적지도 그 카페였다.
카페 중에서는 조금 특별한.
인원을 선별해 받기까지 하는, 특정 고객층을 노린 카페였다.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알베지아 남작가의 케일입니다.”
“케일 알베지아 영식…….”
네모반듯한 주위 건물과는 양식에서부터 명확히 차이를 보이는 건물.
문은 열려 있으나 어두운 베일로 내부가 가려진 정문에는 듬직한 덩치의 가드가 길을 막고 있었다.
카페 아디톤.
사전에 예약하지 못한 이는 출입마저 금지된 장소다.
카페라기보다는 어디 밀실 정치의 요람과 같은 인상이었다.
“아이린 레오나드 공작 영애분의 일행이 맞으십니까?”
“네.”
이런 장소를 내가 예약할 급은 못 됐다.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돈을 뭉텅이로 뿌려도 안 받아준다.
내가 알기로 보통 연구실의 교수진이나 학회 고문이 애용하는 카페였다.
철저한 보안 아래 연구 성과를 교류하고 발표할 수 있기 때문이라나.
귀족이라 한들 고작 학생 따위의 예약은 받아주지 않았다.
……공작 가문이나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예약은 아이린의 명의였다.
1학년 신입생이라 할지라도 공작가 영애라면 밀실 카페의 출입이 허락됐다.
……그래서 나중에는 황태자의 비밀 연애 장소로 애용되는 곳인데.
이를 조별 과제 회의 장소로 사용한다니 기분이 오묘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거둬 올린 베일 사이로 나와 루나는 발걸음을 뗐다.
동시에.
“앗.”
“시야를 제한하는 마법이니 안심하십시오.”
허공에서 새까만 물감이 쏟아진 듯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나야 이럴 줄 알고 있었지만 루나는 깜짝 놀라 내 옷깃을 붙잡았다.
“제 뒤를 잘 쫓아와 주시기만 한다면 위험하지 않습니다.”
안내인은 정확히 우리의 한 발자국 앞에서 움직였다.
그 이상 떨어지면 우리가 길을 잃기라도 한다는 듯이 철저히 거리를 지켰다.
“시야 제한에 감각 혼란, 정신계 유도, 청력 제어…….”
나는 그를 따라가며 건물에 걸려 있는 마법을 분석했다.
참 덕지덕지 많이도 깔아놨다.
내부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대비로는 과할 지경이었다.
이러니까 미래의 황태자나 교수진이 안심하고 애용하는 건가.
카페 주제에 고객을 선별하여 받을 만했다.
여기에 쏟은 돈이나 노력을 고려하면 그럴 자격이 있었다.
“와아아.”
밀실에 도착하자 루나가 감탄하며 내부를 요리조리 둘러보았다.
……무슨 방 하나가 운동장 크기의 반은 되는 것 같네.
배치된 가구나 장식은 잡스러운 화려함 없이 고풍스러움을 추구했다.
하나하나가 전문적 식견 없이 감정해도 금괴로 계산해야 할 법한 고급품이다.
다시금 느끼는데 여길 고작 조별 과제 회의 용도로 사용한다는 게 오묘했다.
“주문이나 용건이 있으시다면 벨을 흔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인은 어둠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두 분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나 봐요.”
“아직 시간 안 됐잖아.”
약속 한 시간으로부터 십 분 전.
늦을까 걱정했던 것치곤 빨리 도착했다.
“아이린이야 정각에 도착할 테고, 시에라가 문제지.”
아카데미 깊숙이 위치해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헷갈릴 수 있었다.
배웅해서 데려갈까 했는데 사서 고생 같아 말았다.
알아서 잘 오겠지.
원작에서 특별한 사정이 없지 않은 한 시에라가 약속에 지각했다는 서술은 본 적 없었다.
“그럼 그동안 시간도 남았으니…….”
혹시 모르니 청사진부터 점검해볼까.
나는 눈을 감고 내부로 침잠했다.
마법의 조합.
요점은 마나 서킷의 이해와 마법의 구조에 대한 해부다.
그러나 결국 평가를 위한 발표는 마법의 시연을 전제로 했다.
이론이 있어도 마법을 발현하지 못한다면 고득점은 받지 못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대표로 마법을 시연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조별 과제라는 취지에도 어긋날뿐더러, 현실적으로 어불성설이었다.
이 주간의 이론 공부로 더블, 트리플 캐스팅이 가능할 것 같나.
그게 되는 실력의 보유자는 멀쩡한 시절의 나나 미래의 대마법사가 전부였다.
그러니 발표란 조원 세 명의 합동 마법 시연으로 진행되었다.
나도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때 과연 내가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
그에 대한 리허설이 필수였다.
우우웅!
호흡을 통해 마나를 받아들이고 서킷으로 이동시킨다.
과정은 몸에 익어 숨 쉬는 것보다도 자연스러웠다.
이대로 서킷에 순환시킨 뒤 방출하면 마나를 정제시킨 원시적인 마법의 발현이었다.
“……안 되겠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에 나는 급히 마나의 흡수를 멈추었다.
역시 이런 신체로 마법을 발현하는 건 무리였다.
흡연이라도 마쳐야 반발 작용을 중화할 수 있을 텐데.
그 방법 또한 조금씩 내 몸을 망쳤다.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과제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괘, 괜찮으세요?”
루나가 다가와 내 어깨를 부축했다.
“무리한 건 아니라 좀 쉬면 나을 거야.”
애초에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시도였다.
십 분 후면 아이린이 도착할 텐데 엉망이 된 몸 상태를 보여줄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수위는 적절히 조절했다.
“기다리고 있었군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이린이 도착했다.
“위치를 헷갈려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
여상스레 말을 걸어오던 아이린이 내 얼굴을 흘겨보곤 말을 멈췄다.
“케일.”
그녀의 눈동자가 풍랑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안색이 왜 그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