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26화 조별 과제 준비(3)
* * *
탁!
부채 때리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시에라.”
아이린은 루나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귀족이 아니라 하였으니 제가 당신에게 영애라는 호칭을 쓰지 않아도 되겠죠?”
“네,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영식이나 영애나 실질적으론 귀족의 자제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시에라가 교회에서 성을 하사받기는 했으되 평민임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린이 그녀를 어찌 부르든 예법에서 어긋나진 않았다.
그럼 아이린이 시에라를 이름으로 부른 것이 친근감의 표시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이는 우아한 선전포고였다.
나는 너를 존중하지 않겠다.
속내를 알지 못한 시에라만 기대감에 찼다.
“시에라는 우선 대화의 기본부터 배워야 할 것 같군요.”
“……네?”
“본인이 아까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
“그, 그게…….”
“말 못 하겠나요?”
아이린은 그녀가 뭐라 말하는지 들어줄 생각 따위 없었다.
“남의 개인사를 멋대로 떠드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인지.”
날이 바짝 선 혀놀림.
“평민이 못 배워먹은 종자들이라고는 하나 이런 기본적인 예의마저 모를 만큼 아둔한 건 아니지 않나요?”
피부 위를 훑고 지나가는 냉기.
“같은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해서 같은 수준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본인을 향한 질타가 아님에도 시녀가 제 일인 양 눈을 질끈 감았다.
“합석을 허락해준 것만으로 분에 넘치는 영광인 줄 알아야지. 제 분수도 모르고 입을 놀리는군요.”
매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아이린의 서슬은 소설 속 악녀의 포스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나는 머리에 더 열이 오르기 전에 아이린을 제지했다.
이러다 누구 하나 울겠다.
시에라든 트라우마 스위치가 눌린 시녀든 둘 중 하나는 확정이었다.
“악의적으로 떠든 것도 아니잖아?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케일은 저 평민이 실수했을 뿐이라 생각하나요?”
“실수가 아니라면?”
싸늘한 눈동자가 지독한 모멸을 담았다.
“제 심기를 거스르려는 의도였다면 성공적이었죠.”
“저는 그렇지……!”
“실수가 맞다 해도 그 자체가 귀족을 물로 본 거예요.”
아이린은 반론을 허락지 않았다.
“입학 전 케일에게 도움을 받았다 해서, 전하께서 관심을 두었다 하여 본인이 뭐라고 된 것 같나요?”
“…….”
“제 발끝도 쳐다보지 못할 천한 것이 어느 안전이라고……!”
“그만.”
수위가 한껏 높아지자 내 목소리도 험악해졌다.
“시에라가 뭐하러 굳이 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겠어.”
그럴 동기가 없다.
따지자면 친해지고 싶어 하는 편이지.
“사담에 속셈이 있음을 전제로 두고 착각하지 마.”
아이린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
빌미를 주면 물고 물리는 잔혹한 권력의 세계.
이해는 가되 언제까지고 그런 식으로 신경 곤두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간 결국 제 사람도 믿지 못하게 될 테니까.
시에라를 두둔하기 위한 구실이 아닌, 아이린 본인을 위해서였다.
“케일은 화가 나지도 않나요?”
“본인이 사과한다면 용서해 줄 수 있지. 없는 말을 꺼내 음해한 건 아니잖아.”
“…….”
우리가 전 약혼자 사이인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사자 앞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라도 말실수 하나에 죽일 것처럼 몰아세울 건수는 아니었다.
“……케일은 벌써 담담해진 모양이네요.”
내가 거듭 두둔하자 아이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나 혼자만…….”
속삭이듯 바람결에 흐르는 목소리는 내 귀에도 희미하게만 들렸다.
“죄송해요, 공녀님.”
침묵 속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시에라가 고개를 숙였다.
“제 잘못이에요. 그치만 일부러 그런 말을 꺼낸 건 아니에요. 그 부분은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
아이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만치 해서 끝냈으니 다행이었다.
한창때였으면 사생결단이 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케일도 미안해. 내가 무신경하게 말을 꺼내서…….”
“알면 됐어. 다음부턴 말조심해.”
나는 딱히 아이린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
사과 따위 기꺼이 받아줄 수 있었다.
다만 느낀 점이 하나.
방금 전 벌어진 말실수가 아니라도 확실히 아이린에게 시에라는 눈엣가시였다.
예의와 법도라고는 배운 적 없는 평민이 공작가 영애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장하자면 일거수일투족이 스트레스의 온상이었다.
서로 못 본 척해도 된다면 나을 텐데 그게 안 됐다.
같은 조원이라 한동안 얼굴을 마주해야만 하고, 스토리 상으로도 얽힐 일이 태반이었다.
비록 사회적 통념상 시에라가 잘못했대도 질책엔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아이린은 그 선을 지키지 못했다.
참지 못하고 손찌검이라도 한다면 아이린의 행동을 긍정할 사람이 있을까?
물론 공작 영애라면 그래도 넘어갈 수 있다.
하나 황태자가 이를 부정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러니 빌미를 주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고 매번 지금처럼 내가 중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근본적인 해결법을 물색해야 했다.
……역시 예법을 가르쳐야 하나.
어차피 황태자의 옆에 서려면 시에라도 예법은 배워야 했다.
원작보다 조금 더 일찍 배운다고 크게 뭔가가 달라지진 않겠지.
황태자와 같이 있으며 지적받을 일 줄고 아이린에 대한 분란의 불씨도 지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
거기서 문득 의아한 듯 시에라에게 향한 아이린의 시선을 발견했다.
“말투가……저한테 사과했을 때랑은 다르네요?”
“아, 케일이 존대 안 해도 된다고 허락해줬어요.”
“…….”
아이린이 날 쳐다봤다.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내가 설명했다.
“같은 반이잖아. 아카데미 학생끼리 신분의 격차는 없다니까 허락했지.”
“…….”
“너도 그렇게 행하길 강요하진 않아. 유명무실한 규칙이니 내가 특이한 거지.”
귀족 중 누가 평민이 존대를 거두길 허락하겠는가.
내가 그랬다고 해서 아이린도 그럴 것까진 없었다.
거기다 나야 남작가 자제니까 받아들였지.
공작 영애나 황태자는 본인의 명령이라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둘이서만 식사도…….”
“그건 룸메이트랑 같이 밥 먹고 있었는데 과제 때문에 얘가 찾아온 거야.”
“…….”
사정을 밝혔음에도 아이린은 한층 더 침울해졌다.
친분을 과시하며 따돌리려던 게 아닌데.
하지만 남에게 가시를 세운 만큼 제게도 비관적인 아이린은 내 말을 변명으로밖에 여기지 않을 터.
자꾸 오해할 일이 생겨 나도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가씨.”
아이린의 뒤에서 가죽 장갑에 싸인 손가락이 어깨를 두들겼다.
호위기사인 세실리아.
나와도 안면이 있는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곧 교실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만 과제 얘기를 나누시죠.”
그렇게까지 오래 떠든 건 아니다.
시간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애매한 시간대.
본론을 상기시킨 건 일종의 배려였다.
눈빛이 딱 그랬다.
손 많이 가는 동생 보듯 한 번만 도와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 검 한 자루라도 선물로 보내줘야 하나.
나는 호의에 감사하며 이야기를 받았다.
“그래, 조별 과제 상의하자고 모였는데 그거 관련해서는 얘기도 못 했네. 빨리 진행하자.”
화제 돌리기가 아니라 실제로 과제 이야기는 빠를수록 좋았다.
제이스 교수의 과제는 조별 과제라는 정체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온갖 파란과 고생이 예정되어 있었다.
평민과 귀족의 협력.
이 하나만 해도 수라장이 눈에 선했다.
그뿐인가.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기도 거치지 않은 채 과제가 생겼을뿐더러 주제마저 어려웠다.
아직 마나 서킷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햇병아리한테 마법을 조합하라니.
걷지도 못하는 햇병아리한테 날라는 격이다.
제이스 교수가 추구하는 기준이 높지 않긴 하되 마법의 조합은 그 시작부터가 난관이었다.
A반이 아니면 시도조차 못 할 난이도다.
“일단 나한테 생각이 있긴 한데…….”
나는 아이린에 대해서도, 시에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원작의 예시마저 있으니 어떤 식으로 과제를 완성해야 할지 머릿속에 전체적인 그림이 있었다.
“며칠 시간을 두고 각자 아이디어를 정리해보자.”
바로 핵심을 꺼내기엔 때가 안 좋았다.
할 얘기가 산더미다.
다른 강의도 있는 만큼 조급해하지 말고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하는 게 우선이었다.
“대강 토요일 아침에 장소 정해서 만나도록 할까?”
내 제안엔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그럼 결정 난 거지.
급조된 과제 회의는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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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
“네, 아가씨.”
“제가 민폐였던 걸까요?”
케일과 시에라가 떠난 자리.
아이린만이 여전히 그곳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케일은 이미 절 잊고 살아가는데, 제가 눈치도 없이 끼어든 걸까요?”
망상은 현실이 되었다.
시에라라는 평민.
입학 전 우연히 케일의 도움을 받았던 그녀는 어느새 말까지 틀 만큼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저는 케일과 정략적으로 맺어졌었을 뿐인 여자지만 그녀는 우연한 만남이었죠. 그래서 그녀에게 끌리는 걸까요?”
시에라는 의도적으로 케일과의 만남을 조작하지 않았다.
조사에 따르면 그럴 배경 없는 평범한 평민이었다.
즉 케일과 시에라의 만남은 우연했고, 교분이 쌓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같은 반인데다가 같은 조.
만약 꿈꾸는 소녀였다면 운명을 느낄 만한 우연이었다.
“제가 말하니 감싸주기나 하고, 나만 우리 사이를 신경 쓰는 것 같고…….”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하이에나 떼 사이에서 커온 공작 영애에게 눈물샘이란 태어났을 적 떼어놓은 기관이었다.
그러나 우울한 감정만은 어쩔 수 없었다.
황태자와의 대담, 벌써 수차례나 목격한 시에라와 함께 있던 케일의 모습.
여러 정황이 그녀의 부정적인 망상을 기폭 시켰다.
“케일은 이런 절 싫어할까요? 옛날부터 제 날 선 말투나 고집 센 면은 싫어했잖아요. 그래서 같이 있을 때는 조심했는데…….”
유순해졌던 성격도 그와 멀어지며 원래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자신이 잘못된 대응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케일의 앞에서 그가 싫어할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파혼을 결정한 이유도 분명…….”
“아가씨.”
세실리아가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드시죠.”
“……이게 뭔가요?”
“샌드위치입니다.”
“그거야 보면 알아요.”
의문은 이게 어디서 났냐는 의미다.
“케일 공자가 넘겨주고 갔습니다.”
“케일이요? 대체 언제…….”
“몰래 준 겁니다.”
“네, 넵. 아가씨께 비밀로 해달라면서요.”
시녀가 거들었다.
“적어도 아가씨께서 우려하시는 대로 싫어하거나 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보기 싫게 헤어진 연인에게 이런 소소한 배려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나름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제스처였다.
‘이러면서 왜 파혼을 결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속내야 본인이 아니면 모를 따름이었다.
당사자도 오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부외자가 참견할 바는 아니었다.
“…….”
아이린은 조심스레 샌드위치를 집어 씹었다.
고향과는 먼 땅의 음식에서 과거의 향기가 났다.
그녀가 힘들 때면 조용히 위로하던 전 약혼자의 냄새였다.
“……차라리 미워한다고 하지.”
눈에 보이지라도 말지.
그럼 이렇게 미련 가질 일 없었을 텐데.
아이린은 한동안 말없이 입술만 오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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