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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25화 (25/40)

〈 25화 〉 25화 ­ 조별 과제 준비(2)

* * *

“…….”

다니엘이 날 쳐다봤다.

눈으로 하소연했다.

전하 안 온다며.

안 왔잖아.

진짜 전하만 안 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이해했어?

…….

나는 스리슬쩍 눈을 돌렸다.

아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나로서도 상정 외의 사태였다.

공녀라면 황태자에 버금가는, 아카데미 영애 중에선 최고 권력자였다.

평민에게는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안 앉으세요? 계속 서 계시면 다리 아파요.”

평민 중에선 시에라만이 싱글벙글거렸다.

넉살도 좋게 합석을 재차 권유했다.

얘는 부티크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일은 벌써 기억에서 지운 걸까.

불편한 기색이라곤 하나 없이 마냥 환영하기만 하는 기색이었다.

생각해보니 원래 그런 애긴 했다.

진짜 악녀였던 원작 속 아이린에게도 결정적인 사건 이전까진 꾸준히 마음을 열어보려 노력했지.

딱히 누구를 미워하거나 하질 않았다.

“식사…….”

아이린은 중얼거리며 스윽 테이블을 훑었다.

시선에 닿은 다히트와 친구들이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일행 분들의 식사는 이미 거의 다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일동은 아이린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 그렇습니다!”

“다 먹은 거 맞습니다!”

“편히 식사하시게 이동하겠습니다!”

다들 턱이 빠질 만큼 음식을 입 안 한가득 집어 넣었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의도가 절절히 느껴지는 필사적인 기세였다.

“……품위 없게.”

“쿨럭!”

아이린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지적받은 친구들이 사례라도 걸린 듯 기침하며 앞뒤 다퉈 물을 들이켰다.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거야.

주고받는 시선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천천히 먹어. 빨리 떠나라고 압박 주는 거 아니니까.”

하는 수 없이 내가 중재했다.

“저게 어떻게 그런 뜻으로 안 들릴 수가 있겠냐?”

속삭이며 다히트가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굴하지 않고 본인에게 직접 물었다.

“맞지?”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안 했지.”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아이린은 웬 뜬금없는 소리냐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말로만 안 했지 그런 티를 냈잖아.

왜 우리만 나쁜 사람 만드냐.

테이블 위 모두에게서 억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다만 내게 향하는 시선이 아이린보단 나를 더 원망하는 눈치였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후우.”

아이린은 일련의 촌극에 한숨으로 답했다.

“이런 곳에선 못 먹겠어요. 나가서 기다리죠.”

“앗.”

막 도착한 아이린의 시녀가 울상을 지었다.

두 손 위에 예쁘게 음식을 담아놓은 식판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으니 저 고생은 이제 도루묵이다.

침울한 표정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와, 갔네.”

“숨 막혀 죽는 줄.”

“어제는 전하셨는데 오늘은 왜 공녀님이 오냐고.”

아이린이 떠나자 온갖 불만과 한탄이 터져 나왔다.

내가 사과했다.

“미안하다. 과제 때문에 같은 조라서…….”

“다음엔 누구 올 것 같으면 말 좀 해줘. 심장 터져 죽겠다.”

“미안.”

평민이라서 훨씬 더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귀족도 귀족 나름이어야지.

내가 같은 입장이어도 황태자나 공작가 영애는 솔직히 좀 심했다.

같은 귀족일지라도 이건 태풍이나 해일 같은 천재지변 급이었다.

“식사도 안 하셨으면서 저렇게 가셔도 될까……?”

시에라만 혼자 태연하게 걱정까지 했다.

“그러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번 아이린의 발언은 액면 그대로고 숨겨진 뜻 따위 없다는 것을.

식사가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은 진짜 거의 끝난 게 맞았고.

품위 없다는 말은 진짜 품위 없다는 말이었다.

다람쥐마냥 볼이 부풀 만큼 음식을 집어넣었으면 품위 없는 게 맞지.

고결한 공작가 영애에게 그런 이들과의 식사는 모욕과도 같았다.

그래서 식욕이 떨어졌나.

그래도 뭔가 먹는 게 좋을 텐데.

나도 걱정이 되긴 했다.

“빨리 먹고 가자.”

“응.”

기다리겠다는데 여유롭게 식사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적당히 배만 채운 채로 식사를 끝마쳤다.

******

“공녀님 안 계시네.”

시에라가 아이린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린은 식당 바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진 않았다.

모양 빠지게 어떻게 그러겠는가.

꼭 본인이 나랑 시에라한테 목매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본디 귀족이란 자신이 볼일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찾아오도록 여유롭게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그녀를 예법 스승으로 두고 있는 나는 이럴 줄 짐작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셨을까. 혹시 기다리다 지치신 건가?”

“따라와.”

나는 고민하는 시에라로부터 앞장섰다.

“응? 공녀님 찾았어?”

“어디 있는지 대충 알아.”

어제 황태자와 함께 돌아다니며 아카데미의 구조는 전부 파악했다.

그 사이에서 아이린의 취향이 맞는 곳을 찾으면 끝이다.

내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와, 진짜 공녀님이시다.”

문처럼 꾸며진 수풀을 지나자 아이린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꽃이 핀 정원 속.

내리쬐는 햇살 아래 차분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명화와도 같았다.

“…….”

문득 떠오르는 기시감에 나는 발을 멈췄다.

약혼자로서 그녀와 교류하던 시기 그녀와 만날 때면 언제나 이런 장소 이런 분위기였는데.

눈을 감아도 그 공기, 그 감촉, 그 냄새 그 모든 게 방금 전 일처럼 떠오를 만큼 익숙한 장면이었다.

“빨리 왔군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줄 알고 있었는데.”

아이린도 우리의 인기척을 눈치챘다.

딸깍, 차분한 손놀림으로 내려놓은 찻잔이 맑은 소리를 울렸다.

“사람이 기다린다는데 어떻게 여유롭게 오겠어.”

“기다린다고 말했으니 얌전히 기다렸겠죠. 같은 테이블에 친구들도 있었고, 건너편에는 담소 나누던 이성까지 있었는데 제가 뭐라고 재촉하겠어요.”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왜 이리 이상하게 들리지.

담담한 팩트의 나열이라 뭐라고 정정하질 못하겠다.

“앉아도 될까요, 공녀님?”

“……그래요.”

아이린은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기색이었다.

여전히 시에라가 떨떠름한 듯했다.

“감사합니다아.”

시에라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자리에 앉자마자 흥분된 기색으로 조잘댔다.

“들어보세요, 공녀님. 공녀님이 어디로 간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닌데 케일이 여기까지 헤매지 않고 찾아왔어요. 신기하지 않으세요?”

내가 단번에 아이린을 찾은 것이 그리도 인상 깊었나.

나와 아이린에게 번갈아 향하는 눈동자가 심히 반짝거렸다.

“그게 뭐 신기한 일이라고요.”

“대단하죠. 가족이라도 말 없이 사라지면 찾기 힘든 법인 걸요.”

“그렇……긴 하죠.”

시에라의 칭찬에 아이린보단 내가 다 쑥스러웠다.

사실 대단한 일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서로의 취향을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차를…….”

“아, 제가 도와드릴게요.”

루나가 시녀를 보조했다.

의욕적으로 내 찻잔을 채우는 루나를 아이린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애는?”

“너도 알잖아, 루나야.”

루나가 내 시종이 된 건 파혼이 결정나기보단 전이었다.

아이린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사건이 터지고 파혼이 결정난 탓에 아주 짧은 시기였긴 하지만 루나를 교육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뵈어요, 공녀님.”

루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나를 모시는 평소보다도 각이 잡힌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아이린이 정체를 깨달은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맞군요, 루나. 오랜만이라 몰라 봤네요.많이 컸어요.”

“그렇게 달라졌나요?”

“전에는 아직 아이였으니까요. 그래서 주인을 잘 모실 수 있을까 걱정도 했었는데…….”

아이린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괜한 걱정이었군요.”

“공녀님께서 잘 지도해주신 덕분이죠.”

손이 탄 강아지처럼 루나는 아이린의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색한 듯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에도 루나의 입가엔 웃음꽃이 피었다.

……내가 만져줄 때보다 더 좋아하네.

나한텐 미미하게나마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아이린한테는 온전히 몸을 맡겼다.

교육 기간도 짧았고, 가르칠 때 눈물 쏙 뺄 만큼 엄하게 대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친하지.

내가 아이린을 찾은 것보단 이거야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가씨께서 저런 표정을…….”

시종마저 놀랐다.

아이린의 나긋나긋한 태도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앗, 죄송합니다!”

“아냐, 그보다 목소리 줄여. 걸리면 혼난다.”

그 탓에 내 찻잔 속 찻물이 넘칠락말락 찰랑거렸다.

100% 지적 사항인 만큼 주의를 주며 재빨리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공녀님이랑 케일이랑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맞긴 하구나.”

루나와 아이린의 회포를 지켜보던 시에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부티크에서 전 약혼자 사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사정 아는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명백히 어색한 변화에 시에라가 어리둥절 눈동자를 굴렸다.

“합.”

자기 딴에는 혼잣말이었겠지.

하지만 모두가 들었다.

제 실수를 깨달은 시에라가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

분명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였는데.

나는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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