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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24화 (24/40)

〈 24화 〉 24화 ­ 조별 과제 준비(1)

* * *

조별 과제에서 조원 결정은 개인의 친분으로 정해지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만약 교수의 재량하에 결정된다면 이는 무작위 추첨이었다.

1학년 학생의 조별 과제에서 학생에 대해 뭘 안다고 조건 따져 인원을 나누겠는가.

입학 성적이야 있지만 그게 전공 실력을 대변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곳 이프린 아카데미는 달랐다.

1학년이라도 평가하여 조건을 나눌 기준이 있었다.

입학 성적이 곧 마법이라는 전공과 관련이 있으니 입학 성적을 따라 조원을 나누어야 형평성에 맞았다.

그러니 원작의 7조가 황태자, 아이린, 시에라로 나뉜 것이다.

황태자가 최상위 석차, 아이린이 중간 석차, 시에라가 하위 석차.

성적 분포에서 한 명씩 뽑았으니 밸런스적으로 알맞았다.

“……그래, 이럴 가능성도 있긴 했지.”

나는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최상위 석차다.

황태자 자리에 내가 들어가도 기준상 전혀 불합리하지 않았다.

근데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가능성을 계산하면서도 설마 설마 싶었다.

하필이면 황태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내가 차지한다고?

여전히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다.

“왜 그러세요, 주인님?”

떠올리며 멍하니 걷고 있자니 루나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혹시 수업 중에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거울처럼 맑은 분홍빛 눈동자.

그 속에 그늘진 내 얼굴만이 오롯이 담겼다.

“그런 건 아니야.”

안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다른 분들도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이던데, 수업이 어려웠나 봐요.”

“음, 쉬운 편이 아니긴 했지.”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얼굴이 개판인 사람은 수두룩했다.

첫 강의부터 빡빡했던 설명에 이를 어찌 소화하면 좋을지, 다른 수업마저 이러면 따라갈 수나 있을지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진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조별 과제인데.

이 세상 물정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은 아직 뭐가 진짜 난관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절로 쯧쯧 혀가 차지게 만들었다.

……내 코가 석 자인 처지긴 하지만.

“힘내세요. 공부에 도움 드릴 순 없어도 그 외적인 면으로는 전혀 신경 안 써도 되도록 제가 힘낼게요.”

루나가 가슴을 두들기며 선언했다.

마음은 고마웠다.

……마음만 고마웠다.

공부로 심란한 거라면 위로가 됐을 텐데.

언제나 가장 어려운 건 인간관계였다.

“오늘은 사람이 많네요.”

루나의 말마따나 어제 점심과 달리 식당은 인산인해였다.

어제야 적응 못 한 사람들이 식당 진입을 꺼렸어도 하루면 분위기 살필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뛰어난 요리사들의 실력을 알게 된 귀족들마저 외부 식사가 아니라 급식을 택했다.

자리가 부족하진 않되 식당은 인파로 소란스러웠다.

“식판 이리 줘.”

“아니에요, 이게 제 일인 걸요.”

“이건 어제 저녁에 얘기 끝난 사안이잖아.”

나는 반론을 듣지 않고 아쉬워하는 루나에게서 식판을 빼앗았다.

“점심 먼저 먹고 온 거 아니지?”

“네…….”

시종들은 주인 된 이의 식사 시중에 전념하기 위해 별개 동에서 먼저 식사를 마치게 일정이 잡혀있었다.

듣기로 메인인 이곳보단 맛이나 종류가 부족하다 했다.

정식 입학생이 아니고 실상 군식구에 가까우니 이해는 갔다.

그치만 그렇다고 하여 나 혼자 좋은 거 먹고 루나는 옆에서 시중이나 들게 하라는 건 영 탐탁지 않았다.

그냥 같이 먹고 말지.

교무부에서도 내가 허락했다면 제지하지 않는다고 윤허를 받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아, 나 저것도 먹고 싶은데 가져와 봐.”

“차는 어떠십니까?”

“먼저 이동할 테니까 정리하고 빨리 따라붙어.”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으면 식판 채워서 가져다주고, 손가락질하면 또 움직여 대령하며 자리 정리에다가 후식까지 챙긴다니.

저런 게 시종의 본분이긴 하다.

그래도 난 루나한테 저런 일은 못 시켰다.

거듭 말하지만루나는 그냥 내 옆에서 얼굴만 보여줘도 임무 달성률 120%였다.

“아, 혹시 다른 시종들이랑 같이 식사하면서 친분 쌓을 일이 있으면 그땐 먼저 식사해.”

원래 어색하면 같이 밥 먹으면서 친해지는 거다.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여 그런 기회까지 제지할 마음은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다들 빨리 돌아가야 해서 식사 중엔 딱히 대화하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그럼 다행이고.”

자칫 제 시종 친구도 못 만들게 꽁꽁 싸매는 과보호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저로서는 이래도 되나 싶은데…….”

루나는 퍽 아쉬운 눈치였다.

……그렇게까지 날 챙겨주고 싶은가.

나였다면 상사가 일 빼준다고 할 시 겉으론 아닌 척하면서 좋다고 넙죽 받을 것 같은데.

중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현대인이었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좀 늦었네? 언제 오나 기다렸다.”

“수업은 정각에 끝났는데 전달 사항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다히트과 그 친구들은 벌써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친 상태였다.

그놈의 조별 과제 공지만 아니었어도 비슷했을 텐데.

늦은 게 내 잘못은 아니었다.

“오, 루나도 같이 먹어?”

“네에.”

“이왕이면 같이 먹으라고 했어. 불편하진 않지?”

“불편하긴, 우리야 좋지.”

다히트가 껄껄 웃었다.

C반 친구들도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하긴 테이블에 죄다 칙칙한 남자들 뿐이었다.

예의 및 품위를 따져 남녀가 유별해 앉는 귀족도 아니고, 평민은 성별 따라 따로 앉지 않았다.

그냥 얘네들이 쑥맥인 거다.

아니면 아직 탐색 중이거나.

……솔직히 후자일 것 같진 않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다히트 말고는 그런 티가 났다.

공학이니까 익숙해지면 알아서 잘 적응하고 어울리겠지.

멋없게 지적하며 참견하진 않았다.

“수업 어땠어? 우린 꽤 괜찮았는데.”

“수준이 높은 건 맞는데 첫날이라 그런가 따라가기 어렵진 않았지.”

“아카데미 입학하길 잘했다고 느껴지더라.”

다히트와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니들은 좋냐?

난 아닌데.

잠자코 듣다가 한마디 했다.

“……마법의 탐구 과목 제이스 교수님 강의면 긴장해라.”

“왜?”

“수업이 어렵기도 어려운데, 첫날부터 과제 주셨어.”

“엑.”

“진짜?”

“거짓말이겠어? 거기다 예습 복습도 필수야.”

내 말에 다들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수업이 어려운 건 그럴 수 있다.

근데 첫날부터 과제 투하는 청천벽력이었다.

“……나 솔직히 마법적인 기초는 좋지 못한데.”

“나도.”

“우리 평민 중에 기초가 좋은 녀석이 있긴 해?”

평민의 마법 수련은 이론적 학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카데미에서 정립한 훈련 방법이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다면 주먹구구식이기까지 했을 거다.

그렇기에 오히려 귀족들보단 평균적으로 재능이 좋긴 했다.

다만 기초는 당연히 부족해 초기 고생길을 예고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 어렵다면서.”

“알고 있어도 어렵고 모르고 있어도 어렵거든.”

“…….”

못 따라간다고 걱정 안 해도 됐다.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곤 일괄적으로 제로베이스 취급이었다.

동료는 구태여 찾지 않아도 득시글거린다.

“……근데 있잖아.”

“응?”

“전하 어제처럼 갑자기 오시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치?”

“저 멀리 떨어져 앉으셨잖아.”

“진짜네, 후우.”

나는 식당의 중심에 손가락질했다.

황태자는 제 온갖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얌전히 식사 중이었다.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제의 내 말을 잘 알아들은 듯해 안심했다.

……근데 뭐지.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황태자의 주위를 관찰했다.

“없잖아.”

“뭐가 없으신데요? 부족하신 게 있다면 제가 가져올게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드디어 자기 할 일 생겼다며 일어서려는 루나를 제지했다.

음식 얘기가 아니다.

저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였다.

어디 갔지.

걔가 저 중심에 있어서 황태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야 하는 건데…….

“아, 여기 있었구나.”

밝은 목소리가 산들바람처럼 다가와 울렸다.

검지로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풋풋한 손짓.

나는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먼저 다 먹은 건 아니네. 다행이다.”

시에라가 헤헤 웃으며 조심스레 식판을 내려놓았다.

“……? 네가 왜 여기 있어.”

“왜긴, 친구끼리 같이 밥 먹는 것도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황태자 쪽을 쳐다봤다.

얘 저기 있어야 하는데.

“안녕하세요, 여러분. 시에라 벨리안트라고 해요.”

“아, 어. 응.”

“같이 앉아도 되죠?”

“어, 그래, 원하는 대로.”

“감사합니다아.”

시에라는 넉살도 좋게 허락을 받곤 반대편에 착석했다.

다히트와 일동은 착석을 허락했어도 제정신은 아니었던 듯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함에도 시에라는 내 앞에서 싱글거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이야?”

“……전하랑 같이 먹으려는 거 아니었어?”

“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너랑 점심 같이 먹자고 못 말하긴 했지만.”

“왜?”

“왜라니……나 부담스러워서 저 사이엔 못 껴. 전하도 따로 권유하시진 않으셨고.”

뭐지.

대체 어디서 틀어진 거지.

오늘은 분명 교실에서 황태자가 시에라 옆자리에 앉기까지 했는데.

“그리고 우리 같은 조원이잖아. 밥 먹으면서 그런 얘기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왔어.”

아, 조별 과제.

내가 황태자 대신 7조에 속해서…….

“케일.”

몰래 찾아온 손님은 한 명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에라의 뒤편에서 우아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인.

장미처럼 고혹적인 향기는 과거부터 변하지 않는 그녀의 특징이었다.

“같은 조원으로서 할 말이…….”

“앗, 아이린 공녀님!”

시에라의 발언에 아이린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마침 과제에 관해서 얘기 하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식사 어떠세요?”

시에라는 생글거렸고 아이린은 침묵했다.

사이에 낀 다히트와 친구들이 황태자의 등장 때만큼이나 혼란에 빠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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