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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20화 (20/40)

〈 20화 〉 20화 ­ 너 뭐냐(7)

* * *

“접근하지 말라…….”

황태자의 중얼거림에 아이린은 숨을 삼켰다.

“역시 다 들켰군. 이러면 발뺌 못 하겠어. 그나마 영애 한 명에게 들킨 거라 다행인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나.

케일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황태자에게 명령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면 발언에 검열이 없어지는 것은 그녀의 타고난 성정이다.

그러나 그런 아이린이라도 때와 경우를 알았다.

공작가의 지엄한 율법과 각박한 가풍은 그녀에게 상대를 가릴 줄 아는 지혜를 주었다.

또래에서 아이린이 말을 가려야 할 상대는 몇 없었다.

그중의 하나가 황태자다.

하필이면 황태자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상정할 수 있는 실수 중 가장 최악이었다.

레오나드 공작이 알게 된다면 상응하는 제재가 떨어질 일이었다.

“귀족 파벌 거두의 금지옥엽께선 내게 뭘 원하지? 이를 토대로 내게 주도권이라도 잡고 싶나?”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나요.”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했다.

저 험악한 인상의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을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지막 기회였다.

“케일에게 다가가지 마세요. 저는 그 하나만 말했어요.”

알면서도 아이린의 입에서 튀어나온 발언은 같은 주장의 반복이었다.

이미 저지른 일이니 기호지세다.

뭐 이런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입을 열면 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몸이 머리가 내리는 지시를 안 따르는 경우였다.

“그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의외로 황태자는 딱히 화가 나거나 한 기색은 아니었다.

원래 무표정해서 감정 표현이 희박한 사람이라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무감각하단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길 새도 없이 아이린은 대답했다.

“케일을 전하의 희생양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에요.”

“공작가에선 신임하는 수족을 희생양이라고 표현하나?”

“본인이 원치 않는 일을 떠맡는 게 희생양이지 뭐겠어요?”

“크게 오해하고 있군.”

황태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제안과 케일의 거절은 합의하에 이루어진 연극이다.”

아이린의 존재가 영향을 미쳐 벌어진 촌극이었다.

본인이 원인인 일을 사정 파악 못 하고 따지는 꼴이라니.

황태자로서는 황새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뱁새가 불쌍할 따름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계시죠?”

아이린은 황태자가 보내는 연민의 눈빛에 어이가 없었다.

“케일이 그렇게 싫어하는 티를 냈는데.”

그녀의 눈엔 또렷이 보였다.

황태자가 제게 보내는 관심에 곤혹스러움을 표하는 케일의 심정이.

하루이틀 같이 지낸 것도 아니고.

케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야 훤히 알 수 있었다.

“억지를 부려도 사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누가 할 소리를 하시는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둘 다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남의 말이 들리겠는가.

노련한 황태자가 먼저 국면을 전환했다.

“억지 부리지 말고 솔직하게 고백하라. 케일의 재주가 탐이 난다고.”

“……?”

“영애와 케일의 약혼이 성사된 것부터가 그런 이유 아니었나.”

“그건……, 그렇지만.”

정략적인 약혼이 성립된 게 꼭 그 때문만은 아니나케일의 재능이 공작의 눈에 띈 이유가 컸다.

“셈법이 달라졌는지 결혼으로 엮기엔 아까워 파혼했다 알고 있는데, 공작가에서 그의 재능에 대한 미련은 떨치지 못했나 보군.”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하라. 정녕 내가 케일을 핍박하고 있다 여겨 경고했나? 영애가 케일과 무슨 사이라고?”

“…….”

외통수였다.

전 약혼자 사이니까 도와주려 했을 뿐이다.

황태자는 그런 억지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면 혹시 영애의 뜻은 공작가와는 달랐나? 파혼 결정에 본인의 뜻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아이린은 부채를 꺼내 입가를 숨겼다.

황태자의 검은 눈동자가 제 폐부마저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는 공작 영애에요. 가문의 뜻이 곧 제 의사입니다.”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인 고위 귀족이라도 고충은 존재했다.

자신보다는 가문을 우선할 것.

가문의 이득을 위해 결정 난 일에 영애가 참견할 권한은 없었다.

“거짓말이군.”

황태자의 단언에 아이린의 손에 들린 부채가 움찔 떨렸다.

“과연, 영애도 여자는 여자였던 모양이야.”

“무슨 실례되는 소리신가요?”

“그럼 이거 좀 떨떠름해 지는군.”

황태자가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를 띄었다.

“우리 명확한 반대 사유가 없을 시 내년엔 약혼하기로 합의되지 않았나.”

아이린이 눈을 꾹 감았다.

케일의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모르는 새에 체결된 정략적인 합의.

그녀는 제게 붙은 꼬리표를 불식시키고 황태자의 마음에 들도록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었다.

오직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황태자에게 합의를 무위로 돌릴 빌미를 주어선 안 됐다.

“사랑 없는 결혼이라도 제국의 태양으로서 감수할 마음은 있다만, 마음속에 품은 이가 있는 여인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오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럼 당장 약혼 건은 성사시키도록 의견을 타진하지.”

그러기 위해 아카데미에 왔으니 바라던 바다.

목적을 달성하였으니 그녀는 가문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

하지만 밀랍이라도 바른 듯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실과 레오나드 공작가의 결합 소식이 알려질 시 과연 케일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으로 가슴이 옥죄어져왔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내가 나쁜 사람인 것처럼 굴지 마. 서로 약점을 잡았으니 이제야 평등한 관계가 된 것뿐이지 않나.”

“약점이요?”

“영애는 내 야망을 알았으니 귀족 파벌이 내게 공세를 취할 약점을 잡았고, 나는 공작가와의 합의를 파기시킬 약점을 잡았으니 평등해졌지.”

당연히 평등하지 않았다.

귀족 파벌의 공세는 황태자에게 일순간 지나갈 파도다.

반면 합의의 파기는 아이린의 입지를 나락까지 떨어뜨릴 치명적인 건이었다.

그럼에도 황태자는 공평하다 말했다.

우위에 선 승리감을 즐기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리고 평등한 관계에선 협력이 가능하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바로 알아듣지 못하니 불편하군. 케일은 천 리 밖에서도 내 속뜻을 파악했거늘.”

황태자가 손짓했다.

아까 전과 같은 초보적인 실수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시를 받은 호위 부대가 즉시 진형을 펼치며 사위를 경계했다.

“케일이 다시 영애와 결합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예……?”

아이린이 입을 헤 벌렸다.

충격적인 제안에 제 귀로 밀려 들어오는 정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애가 케일 대신 내 사람이 되는 거야.”

세상에 영원한 내 편과 적이 어디 있겠는가.

우정이나 사랑이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정치적 역학 관계가 얽혔다면 언제든 제 적이 제 편으로 변할 수 있었다.

“영애는 순정을 이룰 수 있고나로서는 영애를 통해 케일을 다룰 수 있으니 합리적인 거래 아닌가?”

케일이 직속 수하가 아니라 공작가의 사람이 되는 건 아쉽긴 했다.

그러나 케일이 어디에 적을 두든 황태자로서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제게 다 넘어온 인재다.

공작가에 간다고 제게 적대적일 리 없었다.

오히려 공작가마저 손에 쥘 수 있으니 압도적으로 이득이었다.

“레오나드 공작가가 케일의 뒷배가 되어준다면 희생양 삼으려는 거 아니냐는 영애의 우려마저 덜 수 있겠지.”

황태자는 아이린이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라 자신했다.

“그치만 그건 가문이 원하는 바가…….”

걸림돌이 없지는 않았다.

케일과의 관계를 되돌린다는 건 레오나드 공작으로서는 용납 못 할 일이었으니까.

“방법이 있다.”

아이린의 걱정이야 황태자에겐 다 끝마친 계산이었다.

“영애의 의지가 곧 가문이 원하는 바가 된다면 그만이지.”

“무슨 말씀을…….”

“영애를 가주로 추대해주겠다.”

아이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경악하여 한동안 소리 내지 못하던 아이린이 겨우 목소리를 토해냈다.

“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불가능하진 않아.”

크라운 백작가라는 선례가 있었다.

공작가와 백작가를 같은 선에 둘 순 없어도 불가능하다 딱 자를 일은 아니었다.

“영애가 노력할 일이 많긴 할 터이나 시도는 해 볼 만하다. 나 황태자 유리스 엘하임이 영애를 지지할 테니까.”

고로 걱정할 일은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었다.

악녀를 공작가의 가주로 만든다.

공작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자칫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 일이었다.

케일을 얻더라도 제국이 흔들린다면 본말전도다.

다행히 이는 케일과의 결합이 방지할 수 있었다.

실질적인 가주의 업무는 케일이 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 머리로 공작가의 업무를 처리하지 못할 리 없었다.

공작가는 더욱 번성하고, 제국은 발전할 것이었다.

“영애는 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나?”

서로에게 득이 될 이면 합의.

아이린의 결정만이 남아있었다.

한참을 번민한 끝에 아이린이 말했다.

“……저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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