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7화 너 뭐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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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내가 첫 단추를 어떻게 끼웠길래 이렇게 내용이 바뀌었을까.
살살 아려오기 시작한 머리통을 짓누르며 고민했다.
“그건 무슨 제스처지?”
“잠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간은 많다. 오늘 하루는 오로지 그대를 위해 소모할 요량이니 뜻대로 하도록.”
그러니까 더 부담스럽잖아.
나는 호위들의 눈매가 칼날보다 날카로워지기 전에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
근데 진짜 왜지.
그냥 원작대로 내용이 진행되는가 확인하려고 구경한 게 전부다.
그게 황태자의 재빠른 눈치로 인해 은신이 들통났고, 의심을 벗어나려 길치 행세를 하였다는 작은 변수만이 발생하였을 뿐이다.
이마저 시에라가 황태자와 원작보다 더 친해졌으니 어떤 의미론 전화위복이었다.
그런데 이게 황태자가 나한테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다고?
나로서는 그 논리 전개가 통 짐작가지 않았다.
“저, 그, 전하……?”
“뭔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내가 황태자의 사람이 된다?
득이 될 일이긴 했다.
아버지 크레인 알베지아의 경우를 대입해 보면 내게 떨어질 콩고물을 어림해볼 수 있었다.
그는 선제의 어여쁨을 받아 귀족이 되었으며, 기름진 남부 영지를 얻었다.
통이 넓기로는 황태자도 만만치 않았다.
현재로서는 냉혹하다는 인상이 강하나 그는 제 사람에게만큼은 따뜻한 남자였다.
평민인 시에라에게 황비 자리를 제안할 정도이지 않나.
내가 제국의 귀족인 이상 일찌감치 그의 아래로 들어간다면 일세의 번영을 누리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은 전하의 눈에 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황태자의 편에 선다?
내가 귀족인 이상 나중이라면 그래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태자는 시에라의 편이다.
내가 황태자의 아래에 줄을 댄다는 것은 곧 아이린을 저버리고 시에라에게 협력한다는 소리였다.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의도와 정확히 상충하며, 만에 하나 있을 엘릭서 획득 작전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아카데미는 배움의 장입니다. 세속의 욕망에 눈이 멀어 학업의 장을 어지럽히려 하였다니요. 저는 그런 불순한 의도를 품지 않았습니다.”
마침 좋은 핑계도 있었다.
아카데미에 뭐하러 왔겠는가.
배우러 왔다.
대의명분으로는 차고 넘쳤다.
“농이 과하다.”
그러나 내 조리 있는 반박을 황태자는 가볍게 묵살했다.
“불쾌하군. 나를 시험하자는 건가?”
“아니, 시험이고 자시고…….”
진짜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내가 억울함을 표했음에도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황태자는 착각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인재를 얻기란 고달픈 일이라고 하셨지. 겪어 보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군.”
“제국의 태양다우신 지혜로운 말씀이시나 제 경우와는 다른…….”
“서로 아는 바를 굳이 시간 아깝게 떠들어야 하는가 의문이다만내 그대를 얻기 위해 감내하지. 이리 생각하게 된 근거를 하나하나 짚어줄 테니 똑바로 듣도록.”
황태자는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는지 제 호위가 설치한 간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대는 이례적으로 마탑의 입문 제안을 거절하였으며, 그보다 한 수 떨어진다 평가받는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어디 들어나 보자.
나는 쓸데없는 발악을 포기하고 귀를 기울였다.
“자네의 선택에 귀족 사교계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가 충격에 빠졌지. 대체 아카데미에서 무얼 얻을 수 있기에 마탑을 거절하였을까.”
“그건…….”
“내가 말하고 있지 않나. 마지막 감점 요인이다.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듣는다는 굴욕을 겪고 싶은가?”
실망했다며 관심 끄고 가주면 백 번이라도 무릎 꿇어줄 수 있는데.
그리 하진 않아줄 것 같아 나는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황실의 책사들을 한데 모아 토론해보았다. 몇 가지 가설 중 하나가 생각보다 그럴듯하더군.”
무슨 가설을 세워도 정답일 리가 없는데?
나는 쥐꼬리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다.
“자네가 황실의 충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예?”
나도 모르게 의문성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건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지.
내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가설이었다.
“…….”
황태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호위들의 인상이 마주 험악해졌다.
경고 1회 추가 누적.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마탑은 황실과 협력 관계이지. 황실은 마탑의 권위를 존중하며, 마탑은 황실이 인민의 통치자임을 인정하고 대가를 받아 제 재주를 판다.”
그의 말마따나 마탑은 일종의 초법적 기관이었다.
황태자가 공언할 만큼 수평적인 관계.
마탑의 특이성을 떠올려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을 뛰어넘은 괴물들이 즐비한 단체를 어찌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마법 연구에 미쳐 머리에서 나사 하나씩 빠진 놈들이다.
괜히 사고 터뜨리기라도 하면 수습하고자 소모해야 될 국력이 태산이었다.
예견된 재앙을 일으키느니 한 발짝 물러서 협력하는 편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통치를 받는 국민이거늘 황실에 충성하지 않는 데 대한 반감은 존재한다. 아카데미의 마법학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킨 이유이기도 하지.”
나도 모르던 이야기다.
원작에선 이런 세부적인 설정까지는 다루지 않았다.
한데 지식이 늘었음에도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그렇다곤 하나 마탑의 입문이란 황실의 일원으로서도 자부심을 느낄 영광스런 제안이다. 그를 출세에 목이 말랐을 신흥 귀족가에서 거절하고 황실이 후원하는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고 하니 꽤 말이 되더군.”
황태자의 착각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내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거네?
청천벽력이었다.
“레오나드 공작 영애와의 파혼도 심증 중의 하나였지. 남작가 영식이 공작가 영애와의 파혼에 동의한다니, 맞고 살아도 감사히 받들어 모실 판에 이상하지 않나? 귀족 파벌의 거두인공작가와 결합하여 공을 세우면 황권의 위협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으니 적당한 타이밍에 손을 뗀 것이라 하더군.”
그래서 아까 파혼 이유를 물었나.
그냥 남의 속 알지도 못하고 떠들어본 거라고 여겼는데.
너저분히 널브러져 있던 키워드가 하나하나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알베지아 남작가가 폐하의 성은을 입어 세워진 가문이라는 점도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평민에서 영지를 가진 귀족이 되었으니 자네가 날 적부터 황실에 충심을 가졌어도 이상하지 않잖나.”
전혀.
평등한 세계에서 살다 온 내게 신분제의 계급 상승은 고마움을 가질 건수가 되지 못했다.
……근데 이거 혹하긴 하네.
황태자는 분명 진상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설득력이 있다는 데서 내 머릿속이 혼잡하게 헝클어졌다.
“물론 속단을 내리긴 힘들었다.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가령 어릴 적의 천재성이 나이가 들자 밑바닥을 드러냈다던가. 흔히 있는 일이지.”
이 하나만큼은 헛발질이 아니었다.
내 천재성이 다한 건 아니나 맥락이 비슷했다.
마법사의 힘의 원천을 잃어버렸으니 그게 그거였다.
“그러던 차에 자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는 빨려들 것만 같은 검은 눈동자로 빤히 나를 주시했다.
“내 그릇을 가늠해보려 했겠지. 내가 눈치채니 빤히 알고 있을 길을 잃어버렸다 핑계를 댄 점에서 확신이 들더군.”
아니, 그건 암살자로 오해할까 봐 시에라의 말에 편승한 건데.
황태자가 원작대로 시에라와 둘이서 영광의 관으로 향하기만 했어도 얌전히 나 혼자 이동했을 거다.
본인이 초를 쳐놓고 내 탓을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나와 자연스레 합석하기 위해 옆자리를 남겨둔 점, 최종적으로 귀족과 평민의 융화를 원하는 황실의 뜻을 받들어 독채를 받지 않은 점에서 더 두고 볼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내 이야기는 어디서 전해 들었는지 티 안 내면서 마음에 들 짓만 골라 하는군. 능력 있는 부하를 경계하면서도 곁에 두려 한 권력자들이 이러한 마음이었을까 싶다.”
황태자의 메마른 눈동자에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건 나도 무슨 의중인지 쉬이 파악할 수 있었다.
흐뭇함이다.
“이만하면 자네가 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짐작한 증거로는 충분하지 않나?”
호위 중 하나가 기계처럼 물병을 건넸다.
황태자는 광고를 찍어도 될 그림 같은 자태로 입술을 적셨다.
“오랜만에 길게 말하니 입이 아프군. 내 인재를 얻고자 이토록 공을 들인 건 자네가 처음이야. 그만큼 자네를 높이 쳐준다는 뜻이니 자부심을 가지게.”
“…….”
나는 황태자의 발언을 속으로 곱씹었다.
……이게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네.
심지어 루나마저 진짜 그런 거였냐며 몰래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환장하겠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래, 이해는 간다.
황태자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유와 결부해 생각하니 착각에 공감이 갔다.
황위를 이어받는 데는 제왕학을 배우고 실무 경험을 쌓으며 대중에게 얼굴을 보이는 편이 빠르다.
그러나 황위를 이어받는 것보다 중요한 건 황권을 공고히 하는 일이었다.
선제 때부터의 과격한 개혁 정책으로 인해 황실은 귀족 사교계에 큰 반감을 얻었다.
인재의 등용으로 균형은 맞췄으나 여태 협력 관계였던 귀족 사교계가 잠재적인 적대 세력으로 돌변한 것이다.
같은 정책을 유지하며 황제의 위엄을 세우자면 반감을 줄이거나 강행시킬 본인의 세력이 필요했다.
황태자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은 그러한 방책의 일환이었다.
어릴 적부터 일찍이 인재들과 교류하며 제 사람을 낚으려는 의도였다.
그러한 와중에 화제의 중심인 천재가 제게 어필하려는 낌새인 것 같다?
이걸 참으면 사람이 아니었다.
결정타를 가한 것은 황태자의 왕자병이었다.
세상이 다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데 설마 이게 착각이겠어.
나라도 황태자였으면 화끈하게 떡밥을 물었으리라.
근데.
“전하.”
아닌 건 아닌 거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시커먼 남정네한테 아까운 시간 쏟지 말고.
“저는 아카데미에 배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네 본직인 로맨스 판타지 장르로 돌아가라.
"제 진심을 헤아려 주십시오."
황태자의 무표정한 얼굴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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