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14화 너 뭐냐(1)
* * *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현재 위치는 중앙 건물의 한 교실 앞이다.
문을 열면 그곳이 A반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이 학급에 모여있었다.
그만큼 구성원은 부귀와 영화를 얻는 동시에 갖은 위기를 일선에서 겪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A반에는 얼씬도 하기 싫었다.
한술 더 떠 아카데미 입학조차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생길이 훤히 열린 길을 뭐하러 선택하겠는가.
“……그래도 해야지.”
이곳엔 아이린이 속해 있었다.
싫다고 무시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자.
나는 마음을 다잡고 교실 안으로 입성했다.
“반갑구나.”
교단에는 중년인이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장발이 엉덩이 아래까지 늘어져 있었다.
푸르른 녹음을 담은 머리카락은 시각으로 촉감이 전해져오듯 비단결보다 고왔다.
남자가 머리를 뭘 저렇게 길렀어.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얼굴을 보면 납득이 갔다.
넋을 놓게 만드는 외모.
그의 주위로 꽃이 만발한 환영이 보였다.
무엇보다 저 뾰족한 귀.
이쯤 되면 누구나 저 중년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숲의 수호자, 엘프.
수인보다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그 종족이 아카데미의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정해진 자리는 없으니 원하는 대로 앉도록 하거라.”
나는 교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막 절반 정도가 채워진 참인 모양이다.
황태자는 보이지 않았고, 중심에 아이린이 앉아있었다.
“음.”
“크흠.”
“그으, 아니다.”
주위에 몰려들어있던 추종자들이 내 등장에 눈치를 살폈다.
전 약혼자.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이기에 그들로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것이다.
“…….”
아이린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나를 흘겨보았다.
꼭 나보고 옆에 앉으라는 눈치 같아 바로 눈을 돌렸다.
나보고 저 사이에 끼어들라고?
가뜩이나 입학식 지각으로 주목을 끌었는데 옆자리에 앉았다간 또 어떤 파란을 일으킬지 몰랐다.
“앗!”
대충 구석자리에나 앉으려고 하고 있자 그곳에서 누가 휘휘 손을 흔들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작은 움직임에도 찰랑거리며 강아지의 꼬리처럼 흔들렸다.
아이린과는 반대로 혼자 있음에도 꿇리지 않는 존재감.
주인공인 시에라였다.
“여기, 여기요.”
아이린의 주위로는 사람이 바글바글한데 제겐 말 걸어오는 사람 한 명 없던 상황이 어색했던 듯했다.
조용하면서도 눈에 띄게 자기주장을 했다.
“……?”
어림도 없지.
나는 발걸음을 돌려 반대편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
시에라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애완동물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된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은 따로 있거든.
“흥.”
문득 들린 콧소리는 아이린의 것이었다.
내가 쳐다보자 아닌 척 팩 고개를 돌렸다.
……만약 흔쾌히 저 자리에 앉았으면 어쨌으려나.
또 한층 쌓였을지 모를 오해가 두렵게만 느껴졌다.
어쨌든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대화 나눌 사람이 있던 건 아니나 사람 얼굴만 훑어봐도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벌컥!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황태자 유리스였다.
일순 교실 내에 적막이 감돌았다.
그를 알아본 학생들이 일시에 입을 다문 것이다.
황태자와 같은 반에서 수업을 받는다.
영애들의 얼굴엔 황홀함이 감돌았고, 영식들에겐 존경심이 어렸다.
그것이 꾸며낸 감정이든 아니든 황태자란 존재만으로 기대를 품게 만드는 존재였다.
들뜬 분위기 속에서 태연한 것은 나와 엘프 교수뿐이었다.
“원하는 자리에 앉게나.”
황태자임을 모르진 않으리라.
그럼에도 그의 말투는 존대가 아닌 하대였다.
평범한 인간 교수였다면 존대도 평대도 아닌 애매한 말투를 취했으리라.
엘프는 달랐다.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엘프에게 황태자?
곧 세월에 스러질 일개 인간1에 불과했다.
황태자도 엘프의 존재엔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내 자리를 찾아 성큼성큼 움직였다.
터벅! 터벅!
과연 황태자가 누구의 옆자리에 앉을까.
궁금증에 찬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정해진 자리가 아니라 자유라서 더더욱 그랬다.
옆자리에 앉았단 건 호감까지는 과해도 불쾌하지는 않다는 뜻이지 않나.
아카데미의 교육 수준이 높긴 하다지만, 기본적으로 귀족들의 주된 목적은 인맥 교류다.
황태자라면 공작가 영애조차 한 수 아래로 치는 대박이었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앞자리엔 관심 없는 듯 성큼성큼 지나간 황태자는 아이린의 옆에서 잠시 멈추었다.
“역시 공작 영애의 옆에 앉는구나.”
“아까 입학식에서도 그랬잖아.”
“기대한 내가 잘못이……?”
그러나 황태자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뒷자리로 향했다.
“…….”
아이린의 얼굴이 얼핏 굳은 것 같았다.
뒷자리인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왜 날 보고 그래.”
황태자가 떠나자마자 그녀가 날 쳐다봤으니까.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피부로 느껴졌다.
아무튼 예상대로였다.
원작에 서술된 그대로 황태자는 아이린의 옆에 앉지 않았다.
딱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심정이 표출된 건 아니었다.
아이린이 알음알음 소문난 악녀라도 아직까지 그녀에 관한 황태자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저 옆자리에 앉을 이유를 찾지 못했을 뿐.
“앗.”
경악이 담긴 탄성.
원작대로 황태자가 시에라의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외모는 봐줄 만하나 평민일 게 뻔한 여자.
공작 영애를 제치고 시에라를 선택할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나만 제외하고.
원래 저럴 운명인데 내 트롤링으로 입학식에서 더 친분을 쌓기까지 했다.
원작보다 호감이 대폭 쌓였는데 황태자가 다른 선택을 할 리가 없지.
이걸로 자기소개 전에 있을 빅 이벤트는 지나갔으니 마음 놓고…….
“누구 옆에 앉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나?”
……순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없는 모양이군. 실례하지.”
공석이었던 내 옆자리가 채워졌다.
“어머나.”
“레오나드 영애, 지금 황태자께서……!”
“……저도 보고 있어요.”
아니.
“이게 대체 뭔……?”
너가 왜 내 옆에 앉아.
“유리스다.”
황태자가 특유의 미동 없는 표정으로 내게 인사했다.
******
“다 온 것 같구나.”
엘프 교수가 꽉 찬 교실을 확인하곤 읽던 책을 덮었다.
“A반을 맡은 담임 교수인 제이스 올간이라고 하네. 이미 다들 눈치챘겠지만 엘프이지.”
짐작은 했으되 본인의 입으로 확언해준 것은 임팩트가 달랐다.
엘프.
그들은 숲의 수호자인 자연주의적 종족으로서 민간에서는 요정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랑은 말도 섞기 싫어한다는 까다롭고 오만한 종족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엘프의 나이가 많을수록 두드러지곤 했다.
아무래도 사상적으로 인간에겐 정이 갈 수가 없고, 몇백 년을 살아오다 보면 웬만한 생물은 같잖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엘프가 눈앞에 있었다.
중년의 외모를 고려하자면 적어도 500년은 살아온 엘프계의 중진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황실이 후원하는 아카데미라고 해도 엘프까지 교수로 들이나?
그 인재 초빙 역량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로서 강단에 서는 건 처음이네. 아카데미 생활에 어려움이 있거나, 학문적인 배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 연구실로 찾아오도록 하게. 기꺼이 시간을 내주지.”
심지어 엘프답지 않게 유순한 성격이었다.
원작에서는 참된 스승이라고도 불렸지.
물론 주인공인 시에라에게 이입한 독자들에 한해서다.
아이린 입장에서는 사사건건 제게 훼방을 놓는 노땅이었다.
“참고로 내 전공과목은 기초 강론인 마법의 탐구이니 그대들이 많은 걸 배워갔으면 좋겠네.”
이프린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폭넓지만, 그중에서 배울만한 과목을 꼽자면 단연코 마법학이다.
마법엔 나도 관심이 많은 만큼 흥미가 돋았다.
“아무래도 내 담당 학생들이니 마법의 탐구라는 과목에 대해 미리 짧게 설명하자면…….”
엘프라는 신비함, 세월과 함께 쌓인 지식.
다 좋지만 그에겐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 전공에 관해서는 설명충이 된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실체를 모르고 학구열에 불탔다.
어리석긴.
저러다 진만 다 빠진다.
나는 일찌감치 제이스 교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슬며시 눈동자를 굴렸다.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눈치 빠르긴.
숨 한번 들이쉬기도 전에 들려온 물음에 나는 급히 딴청을 피웠다.
"……이해가 안 가네."
진짜로.
얘가 왜 내 옆에 있는 걸까.
성실하게 교수를 향한 황태자의 무표정에선 내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단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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