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13화 (13/40)

〈 13화 〉 13화 ­ 길 잃은 주인공(3)

* * *

“미안하군. 아직 식이 시작되진 않았나?”

뒤늦은 등장에 쏠린 이목에도 황태자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말하곤 뚜벅뚜벅 중앙을 걸었다.

“우으…….”

시에라는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이 익숙지 않았는지 주춤하며 신음을 흘렸다.

어둠 속에서도 빨개진 목덜미가 눈에 띄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곤 황태자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으흠.”

나를 따지자면 황태자와 시에라의 중간이었다.

주목받는 데는 면역이 있지만, 몇백 명이나 되는 시선은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다.

대부분의 이목은 황태자를 향해 있었으되 나도 나름 유명인이었다.

내 정체를 알아본 이들의 수근거림이 작게 들려왔다.

“마탑의 제안을 거절했다더니 진짜 아카데미에 입학했네.”

“뭐가 목적인 거야?”

“황태자랑 같이 온 거면, 인맥을 쌓으려는 건가?”

“근데 진짜 천재라면 마탑에 입문하기만 해도 황실에서 알아서 초청할 거잖아.”

“그러게. 진짜 뭐지.”

하필이면 황태자와 같이 등장한 것 때문에 온갖 추측이 만발했다.

인상을 이렇게 각인시키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딱히 어그로를 끌 계획은 없었는데.

“…….”

다만 이토록 태연한 나로서도 한 사람의 이목만큼은 무시하지 못했다.

굳이 공들여 찾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아이린 레오나드.

본래 황태자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할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작은 충격, 의문,못마땅함과 분노 등을 담은 채.

­크흠, 지금 도착한 입학생은 어서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어찌 보면 교직원에게 찍혀 불호령이 떨어져도 모자를 일이다.

하지만 황태자라는 지위는 위대했다.

고작 언급 한 번이 전부였다.

같이 온 우리에게도 별다른 경고가 가해지진 않았다.

이게 권력의 맛이지.

황태자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성큼성큼 빈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실례하지.”

빈자리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거기 앉으라는 듯 노골적으로 그곳만 공석이었던 것이다.

“앉아도 되겠나?”

“물론이에요. 자리에 이름이 적혀진 것도 아닌 걸요.”

문제는 그곳이 아이린의 옆자리라는 점이었다.

“……이럴 줄 알았는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따로 올 생각을 했던 거다.

공작가 영애와 교분을 나누고 싶어도 기회가 되야 가능한 일이다.

아이린은 악역영애답게 아주 까칠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티가 나게 귀찮아하는데 옆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 철면피면 학생이 아니라 일찍이 정치를 했을 거다.

거기다 황태자도 있지 않나.

앉을 사람이 있다면 우선권은 당연히 그에게 있으리라.

그러한 암묵적인 공감대가 아이린의 옆자리를 공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황태자가 빈자리에 앉자 아이린은 그와 안면을 트고, 웬 계집이 함께 왔냐며 시에라를 인식하는 게 이번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

“…….”

아이린은 제 옆에 황태자가 앉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제 25회 이프린 아카데미의 입학식을 시작…….

내 기억상으론 입학식의 개회사가 시작되고 황태자와 아이린이 여러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둘 사이엔 침묵만이 맴돌았다.

“저, 입학생이셨어요?”

“그래.”

“아하, 전 선배님이신 줄 알았어요. 아카데미가 되게 익숙한 것처럼 보여서요.”

“익숙한 게 맞다. 개인적으로 몇 번 드나든 적이 있으니 지리엔 상세해.”

“와, 그러시구나.”

이상하게도 대화를 나누는 주체는 황태자와 시에라였다.

원래는 시에라가 황태자와 아이린의 대화에서 그가 황태자임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다 보니 재잘재잘 떠들었다.

거기다 조용하고 시크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황태자는 이례적으로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자신이 황태자임을 모르는 이와의 대화가 신선한 듯했다.

그래도 황태자와 시에라가 초장부터 더 친목을 다지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그렇게 넘어가려고 해도, 내 볼이 뚫리지 않을까 싶은 아이린의 강렬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

“…….”

“…….”

“…….”

하필이면 이게 또 내가 옆자리라.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엔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그렇게 곤란해하면서도, 아이린이 황태자가 아닌 내게 관심을 준다는 점에 살짝 들뜰 것만 같았다.

­이걸로 본교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입학생분들은 교직원의 인솔에 맞추어 기숙사로 이동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입학식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

“케일 알베지아.”

“예.”

입학식이 끝나고 교직원의 인솔하에 도착한 광장.

나는 대기하고 있던 교직원에게 배지를 건네받았다.

단추처럼 옷깃에 매다는 물건이다.

배지의 색에 따라서 학년이 달라진다고 했던가.

붙인 순간 작은 진동이 울렸다.

동시에 나는 배지에서 퍼져나오는 마력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아티팩트네.”

아티팩트.

사물에 마법을 각인시킨 물건을 뜻했다.

고급 기술인만큼 기술자가 적고 가격이 비쌌다.

이 배지에 특별히 대단한 마법은 각인되어 있진 않지만 아티팩트는 아티팩트였다.

그냥 학년 구분용으로 이런 물건을 줄 리가 없지.

면밀히 살펴보는데 교직원이 말했다.

“배지는 어느 때건 잊어버리지 말고 보관하도록. 위치 추적, 비상 신호, 출입 권한 등이 부여된 아티팩트다.”

아카데미 입학생은 영지를 가진 귀족의 자제고, 평민이라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다.

배지는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보완책인 듯했다.

확실히 아카데미가 돈이 많긴 한가 보다.

아티팩트를 전교생한테 나눠주게.

황실이 후원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돈에 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황태자까지 입학할 만큼 교육 수준이 올라갔지.

“지금부터 기숙사로 이동한다. 이동을 마친 후엔 가볍게 짐을 풀고 각자 교실로 이동하도록.”

기숙사로 이동하는 인원은 절반을 조금 넘었다.

학생이 모두 기숙사에 입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귀족은 아카데미 바깥에 머물며 통학하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더 좋은 저택이 있는데 기숙사에 거주하고 싶진 않겠지.

귀족 중에서 기숙사행을 택한 건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이거나, 하위 귀족이었다.

“독채인 학생은 날 따라오도록.”

심지어 그마저 죄다 독채행이었다.

고귀한 귀족이 어찌 남과 같이 살 수 있겠는가.

평민 학생들이 오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긴 했으나 저건 질투할 일이 아니었다.

독채 입주 조건에 차별은 없다.

돈만 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었다.

평민이 그만한 금액을 감당한단 게 거의 불가능하긴 하지만, 일단 조건은 동일하니 평등한 조치였다.

“황자님께서는 이쪽으로…….”

다만 황태자만큼은 진짜로 대우가 달랐다.

독채 중에서도 특급이다.

나라의 차기 태양 아닌가.

그를 누군가와 붙여놓는다거나다른 귀족과 같은 독채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 입장에서는 다른 귀족처럼 통학하길 바랐을 거다.

하나 저건 본인의 요청이었다.

아카데미로서는 도리가 없었으리라.

“정말 괜찮겠나?”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나만이 평범한 기숙사행을 택했다.

황태자와는 다른 의미로 신경이 쓰일 일이었다.

당연히 교직원 측에서 우려의 말이 들려왔다.

“예, 남과 함께 생활하는 데 딱히 거부감이 있진 않습니다.”

전생의 이야기지만 기숙사 생활은 한 번 겪어봤다.

평민에 대한 편견이 있지도 않으니 기숙사 생활의 결정에 걸리는 점은 없었다.

무엇보다 독채보단 평범한 기숙사가 안전했다.

고위급 귀족의 자제가 죄다 모인 주거지.

노리지 않으면 그건 악역으로서의 의무 방기였다.

음모의 해결사 역할을 하면 했지 피해자로 얽히는 건 사양이었다.

“……꽤 크네.”

나는 안내를 따라 기숙사로 이동했다.

방은 넓으면서 깔끔했다.

책상과 침상 및 옷장과 같은 필요한 가구만 배치되어 있었고, 개인 욕실마저 존재했다.

수도 한복판에 이런 방의 입주비가 학비에 포함되어 있다니.

귀족인 내가 봐도 합격점이니 평민들 입장에서는 환장하지 않으면 이상했다.

“와, 여기가 기숙사라고?”

가볍게 둘러보고 있자니 룸메이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먼저 있었구나. 반갑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대뜸 악수를 청해오는 모습에서 성격이 나쁘진 않아 보였다.

“다히트라고 해. 일 년간 잘 지내보자.”

“케일 알베지아. 나도 잘 부탁해.”

마주 소개하니 다히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알베지아? 어디서 들어본 성이랑 이름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다히트가 떠올렸는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 혹시 그 알베지아 남작가? 마탑에서 세 번이나 초청했다는 천재? 그분이세요?”

“맞아.”

“아.”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 죄송합니다. 설마 남작가 영식께서 기숙사에 입주하실 줄은 모르고…….”

“반말하다 갑자기 뭔 존대야.”

아무래도 신분의 차를 걱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카데미에서는 모든 학생이 평등하다잖아. 격식 안 차려도 돼.”

“그, 그래도 될까, 요?”

“거리낌이 있었으면 나도 독채로 갔겠지.”

“그으, 렇겠네. 그래, 네가 괜찮다고 했으니 나 그냥 말 놓는다?”

다히트가 씨익 웃었다.

호탕한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소심하거나 귀족을 어려워했으면 기숙사 생활이 죽을 맛이었을 텐데.

그럴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나는 한시름을 돌릴 수 있었다.

“룸메이트로서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교실부터 갈까?가볍게 짐만 정리하랬잖아.”

입학식 직후의 기숙사행은 짐을 본인이 들고 다녀야 하는 평민들을 위한 배려다.

여유 시간은 대충 10분 남짓.

곧장 배정된 반으로 가야 했다.

“다히트너는 어느 반이야?”

“C, 너는?”

“A.”

“오, 거기 성적 높은 애들만 가는 곳이라던데. 진짜 천재긴 하구나. 부럽다, 야.”

반 배정은 온전히 성적에 따라 결정됐다.

A는 입학 시험 성적 최상위권자들만을 모은 엘리트 학급이었다.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야.”

다히트는 부러워했지만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그곳엔 원작의 모든 등장인물이 모여있었다.

시에라, 유리스, 여타 남주 후보, 아이린까지 말이다.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