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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12화 (12/40)

〈 12화 〉 12화 ­ 길 잃은 주인공(2)

* * *

“으응? 분명 중간까지는 길이 맞았는데, 왜 아무도 없지?”

시에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지도를 펴서 이리 보고 저리 보는데, 딱 봐도 지도 보는 법을 모르는 문외한의 행동이 분명했다.

지도의 동서남북 기준점을 볼 생각을 안 하고 있잖나.

저렇게 날림으로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기적이었다.

“여기가 3학년 강의실이 있는 건물이고, 저기가…….”

나름 자기 위치를 파악해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 혼란스러워지는지 종국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첫날부터 미아라니. 이러다 늦으면 어떡해…….”

시에라는 두 손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일부러 일찍 나오기까지 했는데. 운도 지지리도 없지.”

사람 가는 길만 쭉 따라가면 되는 걸 길을 잃었으면 그게 과연 운일까.

그냥 자기 잘못이었다.

뭐, 원작을 보면 시에라에게 변명할 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왠지 길을 잃은 아이가 보여 도와주고자 다가갔더니 그 사이에 인파가 쫙 빠져버린 것이다.

심지어 미아라고 생각했던 아이는 알고 보니 동안일 뿐인 아카데미 재학생이었다.

착한 성심으로 벌인 일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 법이다.

여하튼 그렇게 미아가 된 시에라는 아카데미 부지 내를 방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이랍시고 황당한 일이나 겪고 있어.”

몰래 지켜보고 있는 나로서는 이게 맞나 싶었다.

정 모르겠으면 시계탑을 기준으로 찾아보면 되는 것을.

길치 속성도 아니면서 첫 에피소드가 미아인 걸 보면 클리셰를 따라가고자 억지로 쓴 에피소드라는 티가 났다.

이게 독자와 내부 인물로서의 입장 차이인가.

궁상떠는 시에라를 얼마간 관찰하던 나는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좋아, 원작대로 사건이 일어나는 게 맞겠군.”

과연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 최선이었는가.

시에라의 헛발질을 지켜본 건 의문에 방점을 찍기 위한 일종의 확인 작업이었다.

아이린이 습격당한 것, 시에라 등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 등등.

여러 증거는 있었으되 확실한 건 아카데미 속 첫 에피소드였다.

……교복 건은 내가 개입하여 이야기가 달라졌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한 명의 등장만 더 목격하면 내가 여기 더 남아있을 이유는 없어졌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

그리고 이내 또렷하게 들려온 목소리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홀린 듯 고개를 든 시에라를 따라 내 눈길도 이동했다.

“신입생으로 보이는데.곧 입학식을 시작할 때가 아닌가?”

그늘을 드리우는 가로수 잎을 뚫고 스민 햇살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짙은 남빛 머리카락.

차가운 눈매는 베일 듯 날카로운 가운데 무게감을 가졌고, 높이 솟은 콧대는 칼날처럼 깎아질렀다.

쫙 빠진 기럭지와 통일된 교복조차 세련된 정장으로 탈바꿈시키는 맵시는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암시했다.

아무렴 선남선녀뿐인 로맨스 판타지다.

남들에 비해 뛰어난 외모란 등장인물의 기본 소양이었다.

그리고 저 남자는 실제로 비범한 외모에 걸맞는 신분을 가진 고귀한 자였다.

제국의 떠오르는 차기 태양.

일인지하 만인지상.

황태자 유리스 엘하임이 바로 그였다.

“아, 그게, 길을 잃었어요.”

귀족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임에도 대답하는 시에라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그야 귀족이 아니니 모를 만했다.

교회에서 나고 자란 고아가 황태자의 얼굴을 본 적이라도 있겠나.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한 가지.

적어도 저 외모에 감탄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남자인 나도 뭔 미술 작품을 보는 느낌인데.

원작을 읽었을 때도 느낀 건데 확실히 주인공은 뭔가 다르긴 했다.

“길을 잃었다라…….”

황태자 유리스는 시에라의 대답에 엄지로 턱을 매만졌다.

표정만 봐선 방금 전과 뭔 차이가 있나 싶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시에라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유명한 제 얼굴을 봐도 초면인 것처럼 태도가 변하지 않는 여자.

외모는 그의 까다로운 심미안에도 넉넉하게 합격점이고, 입학식에서 길을 잃은 점도 나름 재미있다.

제게 쏟아지는 이목을 피하고자 몰래 도망친 황태자로서는 심심풀이용으로 어울리기 적합한 상대였다.

“혹시 아카데미 재학생이신가요?”

“따지자면 그렇긴 하군.”

“……!”

서류상으로 오늘부터 아카데미 학생이니 재학생은 맞지.

시에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시간 괜찮으시다면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발 부탁드려요.”

입학식 시작 5분 전.

당장 영광의 관으로 향해도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입학 첫날부터 눈에 띄어 요주의 대상으로 분류되고 싶지 않은 시에라는 간절하기까지 했다.

“그러도록 하지. 마침 나도 영광의 관에 볼일이 있었으니.”

유리스는 흔쾌히 시에라의 청을 들어주었다.

매정히 거절할 일이 아니었다.

그로서도 입학식에 돌아가야 할 때였으니.

“잘됐네요! 어서 가요, 이러다 늦겠어요.”

“……잠깐 기다려라.”

신이 나 앞장서는 시에라를 유리스가 멈춰 세웠다.

나는 문득 그가 날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겠지?

거리도 적당히 떨어져 있고, 황태자가 등장하고부터는 숨도 조심해서 쉬고 있는데.

“그쪽 공자께서도 길을 잃으셨나?”

……들켰네.

시치미 떼보려고 해도 소용 없었다.

시선이 아주 노골적이었다.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이세요?”

“저쪽에 사람이 있더군.”

“으음, 저한테는 안 보이는데…….”

“숨어있으니 그렇겠지.”

“그게 보이신다니 눈이 엄청 좋으시네요.”

“눈이 좋다기보단 살기 위해 배운 처세술이다. 어렸을 적부터 뒷마당에서 쥐새끼들이랑 술래잡기할 일이 많았으니.”

쥐새끼들이란 암살자를 뜻했다.

제국의 차기 황제에게 암살 시도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친족에게서도, 지인에게서도, 신하들에게서도 말이다.

기다리다 적당히 빠져나가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라 생각했는데.

황태자의 감이 너무 기민했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맹점이었다.

“꼴이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지. 내가 목적인 건지, 영애가 목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늘한 검은 눈동자.

목에 칼날이 닿은 것만 같은 섬뜩함이 엄습했다.

“그대로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면 제재를 가하겠네.”

황태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고요한 가운데 나는 그의 손에 몰려드는 마력의 파장을 볼 수 있었다.

전 천재 마법사로서 그 마력량이 야기할 여파를 모를 수가 없었다.

“젠장.”

전부터 자꾸 상황이 꼬이네.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두운 그늘 속에서 밝은 태양 앞으로 이동했다.

“죄송합니다, 제국의 작은 태양께 무례를 저지를 마음은 없었습니다만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나는 곧장 허리부터 숙이고 사죄했다.

어지간한 귀족 가문 자제도 아니고 제국의 황태자다.

암살자 의심까지 받은 마당에 넙죽 엎드리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앗!”

사죄를 마치고 고개 든 내 얼굴을 알아본 시에라가 깜짝 놀라 내게 손가락질했다.

“케일 공자님!”

“……아는 사람인가?”

“네에, 입학 전에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요.”

“흐음.”

시에라의 반갑다는 반응에 유리스가 유지하던 마력을 거두었다.

살긴 살았네.

그치만 나는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 미동조차 않는 얼굴 근육.

내게는 저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어낼 능력이 없었다.

시에라와 대화하고 있었다면 어떤 심정인지 전부 알 수 있었을 텐데.

관심이 시에라가 아닌 내게 향해 있었기에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근데 케일 공자님은 왜 여기 있으신 거예요? 공자님도 신입생이시잖아요. 입학식 장소에 가 있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

시에라가 질문한 의도는 순수하고 순백했다.

문제는 대답 여하에 따라 나에 대한 황태자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네가 길 잃어서 방황하고 있으면 황태자가 나타날 걸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0점짜리 대답이었다.

황태자가 나를 의심할 정당한 근거만 제공해주는 셈이다.

어떻게 하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시에라가 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 설마 케일 공자님도 길을 잃으신 건가요?”

“……?”

“에헤헤, 부끄럽지만 저도 그랬거든요. 다행히 이분께서 안내해주신다고 하는데 우리 같이 가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

입학식 날에 길 잃은 길치 바보냐, 저의가 의심스러운 거수자냐.

내가 골라야 하는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영애. 저는 뒤랑드 자작가의…….”

“저번 다과회 이후 오랜만에 뵈어요, 레오나드 영애. 그때 같이 담소를 나누었는데 기억하고 계시다면 영광…….”

“예, 그래요.”

아이린은 제게 말을 걸어오는 수많은 영식과 영애들에게 단답을 건네며 내쳤다.

그러나 꺼려하는 티가 노골적이어도 그녀의 주위로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제국에 단 셋 있는 공작가.

최근 그녀를 둘러싼 소문이 좋지 않아도 공작가의 영애란 떠받들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만약 공작가 영애와 친해지면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그들은 그러한 헛된 망상을 품은 부나방들이었다.

‘귀찮은 것들.’

아이린은 아예 입을 다문 뒤에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말을 걸어오는 그들의 속에 담긴 흑심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한 흑심을 알면서도 받아주고 교분을 나누는 것이 사교계다.

불쾌하다며 그런 사람들을 걸렀다간 주위에 남아나는 인맥이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고립되고 부정적인 소문이 나기 싫으면 적당히 제 사람을 골라야 하긴 했다.

다만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었다.

아이린은 괜히 그들과 어울리며 중요한 목적을 잊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 계시지?’

황태자 유리스 엘하임.

그녀는 제국의 차기 태양을 찾고 있었다.

처음으로 친분을 쌓을 거라면 당연히 그가 베스트였다.

‘……안 보여.’

한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 톡 튀는 외모를 못 봤을 리는 없다.

다른 귀족 자제들도 황태자가 등장하지 않으니 조용히 황태자의 부재를 떠들고 있었다.

‘……그 남자도 그렇고.’

황태자만 없는 게 아니다.

덤이긴 하지만, 그냥 저도 모르게 찾은 거긴 하지만, 케일 알베지아 또한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곧 입학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자리에 계신 입학생분들은 조용히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9시 58분.

입학식의 직전에도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이린은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황태자야 가끔 사고를 치기도 하는 기분파라지만 케일은 아닌데.

그는 모범적이며 규칙적이었다.

저와 함께 있으며 그렇게 변했다.

그런 그의 부재에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끼익!

정확히 10시가 되어 시계탑의 종이 울린 그때였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남녀가 입장했다.

“미안하군. 아직 식이 시작되진 않았나?”

가장 앞에 선 이는 황태자였다.

그러나 아이린의 눈길은 빠르게 이동했다.

‘케……일?’

케일이 있었다.

그리고 저번 부티크에서 보았던 시에라라는 여자가 있었다.

꽈악!

힘주어 쥔 아이린의 교복 치마에 깊이 주름이 잡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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