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11화 (11/40)

〈 11화 〉 11화 ­ 길 잃은 주인공(1)

* * *

“긴장되지 않으세요, 주인님?”

루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등 안절부절못한 채 말했다.

보드라운 뺨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가슴께에 올려놓은 손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나? 나는 뭐, 딱히 그렇진 않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전생에는 앞에 나가서 발표하라고 하면 떨려서 청심환도 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티가 나기는커녕 평소랑 일절 다르질 않았다.

경험의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나서지 않으면 사람 앞에 설 일 없는 전생과 다르게 지금은 귀족이랍시고 여기저기 불려간 게 수백 번을 넘었다.

비교하자면 아이린의 생일파티가 백배는 더 웅장했지.

고작 입학식 따위에 긴장할 군번이 아니었다.

“우으으, 주인님도 태연하신데 저 혼자 이상해서 부끄러워요.”

“루나는 여태 영지에서만 생활했잖아. 정상이니까 부끄러워할 것 없어.”

나는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치만 입학도 주인님이 하시는 거잖아요. 괜히 제가 유난 떠는 것 같아서…….”

“학생만큼은 아니지만 시종도 별도의 교육을 받으니 루나가 입학한다고 해도 안 이상하지.”

“그, 그럴까요?”

“그럼.”

시종이라고 학생들의 수업 시간에 놀진 않았다.

부수적인 교육이긴 하나 그들 또한 교육 과정이 존재했다.

황실 메이드장 출신의 부인이 환골탈태를 시켜준다나.

루나에게 환골탈태까지는 과하니 필요 없긴 한데, 그만큼 시종들도 수고스럽단 얘기였다.

“으흠. 그럼 저 루나, 주인님을 위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그래, 그래. 열심히 해.”

“히히.”

쓰다듬어주는 감촉이 만족스러웠는지 루나는 헤프게 웃으며 내 손에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무슨 비단결 같은 감촉이라 나도 힐링 되는 기분이었다.

“거의 다 도착했네.”

나는 마차의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과 그들의 부모였다.

귀족들은 보통 나처럼 마차를 타고 이동하니 저들은 대부분 평민이었다.

나를 따라 시선을 옮긴 루나가 떠들었다.

“이프린 아카데미는 평민의 입학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유일한 아카데미라죠?”

“인재의 적극적 기용 정책으로 근래 제국이 크게 부흥했으니까.”

귀족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암흑기를 지나던 제국이 중흥기를 맞이한 건 선대 황제로부터 시작된 적극적 인재 기용 정책 덕분이다.

황제는 인재의 기용에 국적, 성별, 나이,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제국에 도움이 된다면 천금을 들여서라도 환심을 사 기용했고, 그들은 황제의 기대에 보답하였다.

정책의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나진 않았다.

그러나 선대 황제가 서거하고 현 황제가 즉위하는 등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정책의 효용이 크게 두드러졌다.

국고는 부유해졌으며 전쟁에서는 필승했다.

원수 같던 북방 야만족도, 박쥐처럼 제 잇속만 챙기던 해상 국가도, 야욕을 드러내던 중소 국가도 제국의 군대에 꼬리를 내렸다.

아카데미의 평민 입학 허용은 그 정책의 부산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크레인 알베지아는 정책의 대표적 수훈자였다.

그러나 아카데미로 향하는 평민들을 보는 내 감상은 썩 좋지 않았다.

“저들 중에 얼마가 귀족과의 공존을 바랄까.”

평민과 귀족의 대립은 고전적인 소재다.

전현 황제가 그 간극을 희석시키긴 했으되 부족했다.

중세 배경의 로맨스 판타지에서야 단골에서 한 술 더 떠 사골까지 우러난 소재였다.

나로서는 두 세력의 대립이 갑갑하기만 했다.

나는 어디에 서면 좋을까.

케일 알베지아는 평민 태생의 남작가이고.

전생의 나는 신분제가 철폐된 현대의 사람이었는데.

복잡하기로 따지면 내 배경이 제일이었다.

“……이딴 거 고민할 때가 아니지.”

나는 잡념을 털어냈다.

어차피 금방 발생할 사건은 아니다.

두 세력의 골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깊어지기 마련이었고, 대립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눈앞의 고민이 산적해 있는데 먼 미래를 걱정하기엔 내 코가 석자였다.

“당장 노엘이 교수직 제안을 고민한다는 것부터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아닌 척했지만 정말 깜짝 놀랐다.

노엘이 교수라니.

원작에선 언급 없던 이야기였다.

그녀가 원작 속 등장인물인 건 맞다.

다만 소개문은 분명 마탑 소속의 천재 마법사였다.

아카데미 교수였다면 그렇게 서술됐을 리가 없지.

아카데미에서 언제가 됐든 시에라와 한 번은 만나서 엮였을 텐데.

얘기를 나눠보니 교수직이 확정된 건 아니라지만 노엘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 같았다.

“……나 때문이겠지?”

노엘이 원작에서 아카데미 교수가 아니었던 이유.

굳이 그런 귀찮은 자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구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연구하기에도 바쁜 사람이다.

황실에서 영예를 보장해주는 아카데미 교수직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이득이 없었다.

……그러할 텐데.

교수직을 마음에 둔 이유를 나열해보자면 나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물론 나야 좋았다.

상태 안 좋아졌을 때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잖나.

마음이 든든하기까지 했다.

“근데 이거 문제가 생기진 않으려나.”

시작부터 큰 변수의 발생에 본능적으로 꺼려졌다.

“……모르겠다.”

나부터가 이야기에 없어야 할 사람인데 뭘 신경 쓰겠어.

큰 줄기만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면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주인님, 여기서부턴 내려서 가야 해요.”

“아, 도착했어?”

“네, 어서 내리세요.”

그렇게 여러 고민을 하고 있다 보니 교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루나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이프린 아카데미.

거대한 정문 앞에 길에서 보았던 수의 배는 되어 보이는 인파가 몰려있었다.

“하, 씨. 저 사이를 내가 뚫고 가야 해? 그냥 마차 타고 가자.”

“행정부에 문의하여 보았으나 규정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도련님.”

“젠장, 입학 첫날부터 기분 더럽게 시작하네.”

마차에서 내린 귀족들이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아카데미 내에서만큼은 학생들 사이에 신분의 차는 없다.

교칙을 뒤져보면 첫 장에 나오는 말이었다.

실상 유명무실한 교칙이긴 해도, 아카데미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에서만큼은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귀족 자제와 평민을 가리지 않는 교문의 번잡함.

아무리 내가 진취적인 귀족이라고 해도 저건 좀 얼이 빠졌다.

“저만 따라오세요, 주인님. 제가 길을 틀게요.”

쉬이 발걸음을 못 떼고 있자니 루나가 가슴을 펴고 주장했다.

“……괜찮겠어?”

“그럼요. 주인님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말의 내용은 듬직한데 가녀린 외모나 목소리가 썩…….

나는 사촌 동생의 귀여운 재롱을 보는 심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히잉, 죄송해요.”

“아니야, 나는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마음만 고맙고 싶지 않은 걸요오.”

잠시 후.

역시나 루나는 인파를 뚫지 못했다.

반대로 인파에 휩쓸려 미아가 되려고 하기에 내가 손을 잡고 끌었다.

기대가 없었으므로 실망도 없었다.

내가 자상한 웃음과 함께 칭찬하자 루나는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때는 굳이 위로하는 게 더 상처다.

나는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입학식이 어디서 치러지더라?”

“아, 영광의 관이에요.”

영광의 관, 쉽게 표현해 대강당이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인파만 따라가면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저는 주인님이랑은 따로 이동해야 할 것 같아요…….”

루나는 퍽 아쉬운 표정이었다.

시종은 이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제 주인의 생활 전반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대략적인 기초 교육을 받았다.

백작가에 도착하자 집사장 하인즈가 양해를 구하고 인수인계를 시킨 것과 요는 동일했다.

나는 루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가는 길에 휩쓸려서 영문 모를 곳으로 가지 말고. 주위에 다른 귀족의 시종이 있으면 말 걸어서 같이 가자고 손 꼭 잡아. 알았지?”

“아, 아까 전만 그랬던 거예요!”

“그래, 그래.”

놀리자 루나가 노발대발하며 방방 뛰었다.

이목이 쏠리자 금세 잠잠해지긴 했지만.

“이것도 평소에 잘 하니까 놀릴 수 있는 거야. 아니면 내가 미안해서 이런 말 못 하지.”

“그, 그런가요?”

“내가 허튼소리는 안 하잖아.”

“으흠, 그렇다면야…….”

손쉽게 기를 살려준 나는 루나를 보내고 걸음을 옮겼다.

“입학식 시작이 10시니까…….”

높이 솟은 시계탑을 확인해 보니 30분 전이었다.

여유가 있는 시간은 아니다.

하나 나는 벌써부터 영광의 관으로 향할 마음이 없었다.

“…….”

몰래 인파에서 벗어나니 시끌벅적하던 방금 전과 달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한산했다.

좀 살겠네.

“대충 15분 정도만 기다리면 되려나.”

나는 벤치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입학식에 가기는 할 거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 건수가 있었다.

부스럭!

짧게 한숨을 돌리고 기다리길 얼마.

작게 들려오는 옷자락이 수풀을 스치는 소리에 나는 기다리던 이가 도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멍청한 표정도 백치미로 승화시키는 미모.

원작의 주인공, 시에라가 멀찍이 시야에 보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