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9화 병약한 공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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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 레오나드예요.”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이는 달빛으로 빚은 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였다.
아이린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눈만 끔뻑거렸다.
문득 얼마 전의 일이 기억났다.
뜬금없이 아버지가 내게 약혼녀가 생겼다고 했던가.
나는 선뜻 그를 믿지 못했다.
아무렴 그 내용이 황당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같은 남작가, 혹은 자작가의 영애였다면 그럴싸 했으리라.
한데 레오나드 공작가 여식과의 약혼이라니.
핏줄을 중히 여기는 고위 귀족이 남작가와의 결합을 허락했다?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약혼녀가 찾아왔다며 인사하라고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털레털레 갔다.
기껏해야 친하게 지내던 옆 영지 영애가 왔겠거니 생각한 것이었다.
“약혼식을 올리기 전에 얼굴은 봐야 할 것 같아 찾아왔어요. 불만 있거나 하진 않죠?”
아니었다.
진짜 공작가의 여식이 내 약혼자라며 찾아왔다.
목에 가시 박힌 듯 언제나 느껴지던 이질감의 정체를 눈치챈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 나는 소설 속 세계로 환생하였구나.
눈앞의 공녀는 소설 속 악녀였고.
나는 그녀의 전 약혼자 신세가 될 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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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기출 변형이 대세라지만 로맨스 판타지 속 악녀의 인물상은 아주 전형적이다.
제 사람들을 험히 대하고, 여주인공을 핍박하며, 주제도 모르면서 남주를 유혹하고자 갖은 무리수를 두는 멍청이.
이 세계의 원작이 된 소설 속 아이린은 그러한 법칙을 충실히 따라 조형된 캐릭터였다.
고로 그녀가 내 약혼자임을 알았을 때 내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 악독한 성격을 감내하며 굴욕을 겪을 내 미래가 훤했던 것이다.
파국임을 훤히 안다 해서 파혼을 제안하기도 어려웠다.
공작가 영애와의 약혼을 남작가 영식이 거절? 명분도 없이?
공작가에서 군사를 일으켜도 황제가 윤허해줄 모욕이었다.
결국 나로서는 인생 꼬였다며 한탄하는 수밖엔 없었다.
“부모의 결정에 의한 정략적인 약혼일 뿐이란 거 잊지 마요.”
직접 만나본 그녀는 과연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겉으로는 곤혹스러워하였으나 내심 잘됐다 싶었다.
낌새를 보니 오래 가지 않고 금방 파혼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탓이다.
“앉을 때건 일어선 때건 언제나 바른 자세를 유지하세요.”
“귀족으로서의 교양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는 건가요?”
“대체 시종의 교육을 어떻게 한 거죠?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약혼 후 아이린은 사사건건 내게 간섭했다.
나로도 모자라 내 가문까지 트집을 잡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점차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패악질이란 게 이리 조리 있고 도움이 되던가?
아이린의 말이 심하고 지적이 빈번하긴 했으되 틀린 점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따름으로 인해 나는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배웠고, 가문엔 법도가 생겨났다.
이게 정말 나를 괴롭히고자 하는 짓거리가 맞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커져만 갔고, 내 눈을 가리던 선입견은 벗겨졌다.
그렇게 제대로 마주한 아이린은 원작 속의 그녀와는 같은 듯 다른 인물이었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일까.
그녀의 행실에 노골적인 악의는 없었다.
그녀의 기준이 엄격하기에 남에게도 빡빡하게 구는 것일 뿐이었다.
입이 험한 점이나 본인만 아는 성격은 문제였지만, 이는 고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악녀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벼락출세한 철부지에서 귀족이 되었듯, 그녀라고 바뀌지 말란 법은 없었다.
“미소가 자연스러워졌네.”
“……그래?”
“첫 만남에선 정략적 약혼일 뿐이라면서 남을 벌레 보듯 봤으면서.”
“그, 그건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잊어버려.”
인상이 바뀌니 그녀를 대하는 내 태도부터가 달라졌다.
그러자 그녀도 마찬가지로 날 보는 눈이 달라졌다.
긴 교제 끝에 말을 놓았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이대로 원작이고 뭐고 잊은 채 행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실책이었다.
아이린에겐 악녀로서 변하는 고비가 존재했다.
흑막이란 작자들과 친지가 협력한 아이린의 납치 사건이다.
나는 안일했다.
어차피 실패할 납치 사건이라 여기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결과 아이린은 유모와 친동생의 희생 아래 목숨을 부지했고, 나 또한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전모를 파헤친 그녀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계승 서열을 확고히 하기 위한 친지의 범행.
나를 제외한 이들에게도 열어가던 마음을 꾹 닫고, 다른 사람이 된 양 행패를 부렸다.
당시 나는 그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원작 속 악녀가 된 듯 변해있었다.
내가 안일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되돌리려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정략적인 약혼이었기에 끝 또한 당사자인 우리들의 의지보단 부외자들의 의사가 컸다.
차마 반대할 수도 없었다.
심각했던 내 몸 상태를 알고 있었고, 그녀가 공작가의 결정을 반대하도록 하여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
다만 아이린의 무너져내리던 표정만큼은 지워지질 않았다.
파혼은 막을 수 없었다.
내 안일함 때문에.
그러니 적어도 그녀에게 예정된 파멸만은 막아보자.
이제는 사명감으로 남아버린 과거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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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그만 일어나셔야 하지 않을까요? 벌써 해가 중천이에요.”
조심스레 몸을 흔드는 기척에 깊이 침잠했던 정신이 부상했다.
눈을 깜빡이자 물 탄 듯 흐리던 시야가 선명하게 돌아왔다.
창밖으로는 벌써 해가 쨍쨍했다.
나는 무슨 개꿈을 꿨는지 푹 잤는데도 왠지 더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스트레칭을 했다.
“끄하아, 지금 몇 시야?”
“12시 조금 넘었어요.”
“12시……?”
멍하니 중얼거리다 화들짝 놀랐다.
“벌써 12시라고? 나 어제 일찍 잤잖아.”
“네, 안 그런 것 같아도 피곤하셨는지 진짜 오래 주무셨어요.”
루나가 땀에 전 내 머리카락을 고사리손으로 쓸어올렸다.
“정 피곤하시면 더 주무실래요?”
“아냐, 괜찮아. 반나절을 잤으니 일어나야지.”
아무리 체력이 바닥났어도 그렇지 무슨 기절한 것처럼 잤네.
아직 노곤하긴 해도 생활 패턴이 뒤집히는 것보단 나았다.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야 정신이 깨어났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배고프진 않으세요?”
“밥이라…….”
그러고 보니 잠에서 깬 직후임에도 배가 허했다.
만찬 직후부터 계산하면 반나절 이상을 굶었으니 그럴 만했다.
“백작님은 안 계셔?”
“네, 일정이 바빠 저녁 늦게나 돌아오실 거래요.”
“그럼 혼자 먹어야겠네.”
나는 방으로 식사를 부탁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미안한데 집사장이든 시종이든 아무나 불러줄 수 있을까?”
“뭐라고 전하면 될까요?”
“크라운 영애에게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전해달라 해줘.”
일정상으로는 어제 만나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사람이니만큼 일정이 무산된 이상 내가 매달려야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루나는 맡겨달라는 듯 가슴을 치곤 방 밖으로 나갔다.
소식이 돌아오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애께 말씀 전해봤는데 아무 대꾸 없으셨대요.”
“아직도 연구하는 중인가.”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
바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굳이 오늘 안 만났지.
그냥 방에서 혼자 먹고 쉬겠다 하기 찰나였다.
“근데 방에는 들어가도 된대요.”
“응?”
루나의 전언은 끝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식사 안 하신 건 영애도 마찬가지래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할 테니 부디 같이 식사해주셨으면 한대요.”
“……하여간.”
나이가 몇인데 밥 안 먹는다고 시종한테 걱정을 끼쳐.
괴짜밖에 없다는 마탑 소속 마법사다웠다.
“알겠다고 해줘.”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나는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세안과 단장을 마치고 크라운 영애의 작업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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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작업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조심성 없기는.
……그렇게 말하기엔 크라운 영애가 평범한 영애에 속하지 않았다.
마탑 소속 마법사.
수많은 마법사 중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는 천재 중의 천재다.
아무리 연구에 미쳤어도 그 실력이면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충분했다.
웬만한 이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크라운 영애?”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안으로 나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뭔지 모를 기구와 서류가 발에 치였다.
정리를 얼마나 안 하고 사는 거야.
뒤따라오는 루나가 손이 근질거리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자고 있네.”
나는 노엘 크라운 영애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방의 안쪽 한 층수 더 높이 쌓인 잡동사니의 산속에 파묻혀 자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는지가 의심될 만큼 미동 없는 평안한 자세였다.
“일어나, 밥 왔어.”
“……으응.”
“일어나라니까?”
몇 번 더 어깨를 흔들자 노엘은 그제야 부스스 깨어났다.
햇볕 한 번 안 보고 살았는지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피부.
손때 묻은 둥근 프레임의 안경이 이마에서 떨어져 코에 착지했다.
해가 중천임에도 잠에 취한 표정이었다.
“……어라? 케일?”
“그래, 나 맞아.”
몽롱했던 보랏빛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케일 네가 여기엔 왜……?”
“기숙사 입학 전까지 신세 지겠다고 말해놨다던데, 못 들었어?”
“참, 그랬었지.”
잠기운을 날린 건 일순간이었다.
노엘이 익숙한 몸놀림으로 잡동사니 속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질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방 청소 안 해?”
“다 끝나면 하려고 했지. 연구 중엔 신경 안 쓰여.”
“여기서 사람이 살 수가 있긴 한가?”
“익숙해지면 편해.”
이 환경에 어떻게 익숙해질 수가 있는 거야.
제 딸자식을 제정신 아니라고 칭하는 이반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정리를 도와드려도 될까요?”
루나가 번쩍 손을 들고 물었다.
청결을 중시하는 시종으로서 더는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누구야?”
“내 시종.”
“실력은 확실하겠네. 해봐, 마침 어제 마탑에 보낼 논문이 완성됐거든.”
그래서 며칠 밤새는 건 기본이면서 대낮에 잠을 자고 있던 건가.
근데.
“방금 연구 다 끝나면 청소한다며.”
“그야 하루 정도는 쉬는 시간을 가져야지. 그때 너희가 온 거야.”
“네가 자꾸 이러고 사니까 백작님이랑 시종들이 걱정하잖아.”
“시종들은 모르겠는데 엄마는 왜……? 자기도 소싯적엔 이러고 살았으면서.”
노엘이 투덜거렸다.
부모자식 사이가 티격태격한 건 백작가라고 다르지 않았다.
“여긴 뭐하러 왔어?”
“일단 같이 밥이나 먹자는 게 첫째.”
나는 손에 든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렸다.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도록 폭신하게 구운 빵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랜만인데 얼굴이나 보자는 게 둘째.”
노엘과 내 친분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저번에 만나고 삼 개월이 훌쩍 지났으니 잘 살아 있는지 얼굴 볼 때가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본론.”
나는 맡겨놓은 물건 찾듯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담배 좀 줘.”
노엘 크라운 백작 영애.
그녀는 마탑 소속 포션 연구학 박사이자.
내 망가진 몸을 회복시킬 특제 담배의 제작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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