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8화 왜 하필(3)
* * *
“제가 모르는 여자네요.”
아이린이 팔짱 낀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물건을 품평하듯 냉정한 시선은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음에도 뒤통수가 서늘해져 왔다.
“나이는 우리랑 비슷해 보이는데, 지방 귀족의 영애라고 하기엔 차림새가…….”
날이 선 눈동자가 시에라의 전신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겁을 집어먹었는지 시에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 제가 모르는 여자랑 친분을 나누셨군요.”
시에라를 낱낱이 훑어보던 시선은 이내 나에게로 돌아왔다.
총기 짙던 눈이 지금 다시 보니 구멍 뚫린 듯 공허했다.
……예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렇게 아랫사람 굴리듯 쌀쌀맞았는데.
오랜만에 봤다고 공유해주는 추억이 많았다.
“흐음…….”
훈훈한 봄날이거늘 이곳에만 서릿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그녀가 내뱉은 숨결이 냉기 담긴 손길이 되어 내 볼을 스쳤다.
“말해주기 싫으신가요?”
아이린의 목소리만이 낭랑하게 울렸다.
표정은 아까 전과 다르지 않았으나 이는 귀족의 기본 소양이었다.
공작가의 영애라면 제 감정 숨기는 것쯤 숨 쉬는 일만큼 간단했다.
외면이 아니라 내부를 봐야 한다.
나는 그녀가 숨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텅 빈 눈동자 속에는 타오르는 분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래요, ‘전 약혼자’에 불과한 사람인데 누구랑 놀아나든 신경 쓰는 자체가 민폐겠죠.”
아이린이 특정 단어에 악센트를 주었다.
이를 꽉 문 살벌한 발음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사과드립니다, 케일 공자님.”
가녀린 팔뚝을 쥔 그녀의 손에는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저건 폭발하기 직전의 징조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그럼요?”
“그 버릇 분명 고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그대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네.”
“……?”
“남의 말 듣기도 전에 네 생각만으로 단정 지어서 곡해하지 말라고.”
이런 때에 딱 맞는, 조상의 지혜가 깃든 옛말이 있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기세를 타고 쏘아붙이던 아이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동안 발전은 못 할망정 퇴보나 했다면 실망이야.”
“너, 지금 네가 나한테 뭐라고……!”
“너도 잘못이란 거 알잖아. 그래서 고치려고 했던 거고.”
“…….”
저 독선적인 성격.
자기가 옳다는 고집.
악녀 취급받기 딱 좋은 성격이다.
잘못된 주장을 내세울 권력마저 있다면 경원시 되기에 충분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고쳐야 했던 성격이다.
아이린과는 일찍이 얘기를 나눠 서로 공감한 사항이었다.
아이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소개해줄 테니까 오해하지 마.”
나도 별로 오해받기 싫었다.
얘랑 내가 왜.
그러다가 소설 내용 망가졌다.
“이런 분위기라 미안한데 자기소개 좀 해줘라.”
“아, 네.”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시에라가 앞으로 나섰다.
“시에라 벨리안트라고 해요.”
“……벨리안트?”
“뭐해? 너도 똑같이 소개해야지.”
아이린은 그녀를 퉁명스레 쳐다보다 말했다.
“아이린 레오나드, 레오나드 공작가의 여식이에요.”
공작가의 여식.
귀족인 건 알았아도 그만큼 높은 사람일 줄은 몰랐는지 시에라의 입술이 헤 벌어졌다.
“혹시 어느 귀족가에 적을 둔 영애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견문이 부족하여 벨리안트라는 성의 제국 귀족 가문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거든요.”
아이린이 따박따박 쏘아붙였다.
표면 그대로 해석할 말은 아니었다.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 아래 배배 꼰 언행이야말로 사교계의 예의였으니까.
해석하자면 급도 안 되는 주제에 여기에 왜 있냐는 뜻이었다.
공작 영애가 쏘아내는 압박감이 일반인이 버텨낼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에라가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아이린의 숨겨진 뜻을 파악할 교양마저 없었다.
아이린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제 성은 교회에서 지어준 거라 모르시는 게 정상이에요. 평민이거든요.”
아이린의 표정엔 불쾌함보다 놀라움이 컸다.
평민이라기엔 눈에 띄는 외모 아닌가.
그녀가 시에라와 내 사이를 오해한 원인이기도 했으리라.
“오늘 처음 만난 사이야. 부티크로 오던 중 불량배에게 시비가 걸린 걸 발견해 도와줬다.”
과장 축소 없이 그게 전부였기에 나는 당당했다.
오히려 좋은 일 했잖나.
오해한다면 내가 억울했다.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두 분이 친해 보이진 않았어요, 영애.”
백작가 시종이 긍정했고, 마담이 첨언했다.
“오늘 처음 만난 여자를 부티크에 데려온 이유는요?”
“교복이 찢어져서 수선해주려고 했어. 네 예약 시간에 마담이 양해를 구한 사정이 그거야.”
“맞나요, 마담?”
“네. 물건은 저기 있답니다, 영애.”
아이린은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찢어진 교복의 수선은 본인이 알아서 하면 되잖아요.”
“도와줄 거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않겠어? 불량배에게서 구해준 것만으로 끝내려면 개입하질 말았어야겠지.”
“…….”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아이린은 그제야 살벌했던 눈매를 바로잡았다.
입가를 만졌던 손은 더 올라가 옆머리를 배배 꼬았다.
냉정해지자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각한 모양이었다.
“자아, 그럼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작업으로 돌아갈게요.”
마담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 작게 박수치며 이목을 끌었다.
아이린이 말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네요, 마담.”
“괜찮아요.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셔도 되는 게 가게 운영하면서 흔히 보는 장면이랍니다.”
남들은 다 겁먹었는데 마담 혼자 웃는 표정이었다.
설마 즐기고 있었나.
담 하나는 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귀족 상대로 배짱 장사를 하는 거겠지.
“조수님, 손님분들 기다리실 자리 안내해드리고 차 한 잔 대접해주세요.”
……어떻게 잘 넘겼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제 됐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엔 학원에서 보…….”
“잠깐.”
그만 떨어지려는데 아이린이 나를 불러세웠다.
“아직 제가 물은 질문에 대답 다 안 해주셨잖아요?”
“……?”
“편지에 대한 답변이요.”
“……아.”
그랬지, 참.
원래는 이 이야기부터 끝냈어야 할 텐데 시에라의 존재로 뒷전이 되어버렸다.
“그건…….”
“공자님.”
백작가 시녀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가주님께서 그만 돌아오라 연락하셨습니다.”
“?”
이반젤이 왜?
눈썹을 꿈틀대며 답을 구하자 시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게, 사실 준비하신 만찬이 있습니다.”
“만찬?”
“예, 비밀로 하여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늦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교복 준비도 모자라 만찬이라.
깜짝 선물이라며 준비했을 걸 생각하면 늦은 내가 죄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 시종은……?”
“소개가 늦어 실례했습니다. 크라운 백작가에서 케일 공자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크라운 백작가라니.”
“입학 전까지 신세를 지게 됐어.”
내가 크라운 백작가와 연이 있단 걸 그녀는 몰랐다.
뜬금없는 중앙 귀족의 등장에 아이린이 혼란스러워했다.
“들었지? 미안한데 가봐야 할 것 같아.”
나는 이어 시에라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네, 괜찮아요. 제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가세요.”
원래 부담스럽다며 먼저 가라 권하던 시에라다.
시에라는 어서 돌아가라며 내 등을 떠밀기까지 했다.
“미안, 다음에 얘기하자.”
오늘만 기회도 아니고.
아직 미련이 있는 듯했지만 아이린은 차마 날 붙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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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식겠습니다, 아가씨.”
세실리아가 멍하니 한쪽만을 바라보는 아이린에게 주의를 주었다.
“사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행동이 무례임을 모르시진 않으시잖습니까.”
“으흠.”
무례임을 언급하면서까지 질책하자 아이린이 마침내 반응했다.
그녀는 못 박힌 듯 바라보던 시에라에게서 고개를 돌려 미지근해진 차로 입술을 적셨다.
“제가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쳐다봤나요?”
“본인이 모를 수가 없을 정돕니다.”
“그렇군요.”
근데 저 여자는 왜 아무 반응도 없지.
완성된 교복을 들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알아요.”
머리로는 당연히 이해했다.
처음 만난 사이.
그냥 도와준 게 전부.
증인까지 있었는데 그걸 왜 모르겠는가.
다만 언제나 그렇듯 마음은 이성을 벗어나 있었다.
속 시원히 털어내지 못한 채 자꾸 의심하고 집착했다.
이유는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초면이란 건 사실이라 치죠. 그치만 저 얼굴로 어떻게 아무 사이가 아닐 수 있겠어요. 아니, 앞으로도 아무 사이가 아닐까요?”
평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같은 여자인데도 감탄스러울 미모였다.
자타공인 제국 제일 미녀라는 자신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았다.
평민이라곤 해도 저 얼굴로 소문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한 일이었다.
남자라면 저 미모에 홀리지 않기 힘들었다.
혈기 왕성할 나이의 영식이라면 더더욱.
차분하고 지적이던 케일이라도 본능을 거스를 수 있을 진 미지수였다.
“평민이라는 신분은 케일에게 거리낄 조건이 되지 못해요. 알베지아 남작가의 뿌리부터가 그렇잖아요?”
선남선녀의 운명적인 만남.
눈이 맞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케일은 당당히 아니라 하였지만 안심감을 주기엔 부족했다.
……아니, 사실은 억지에 망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한 건 불안한 거였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가 그의 옆에 서 있음을 깨달았을 때.
철렁 내려앉은 가슴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
세실리아는 안타까움에 고개 숙여 얼굴을 감췄다.
이런 모습을 어떻게 전 약혼자 사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대외적으로는 남이 된 사이일지 몰라도 여전히 미련이 흘러넘치는 상태였다.
“세실리아.”
“네, 아가씨.”
“저 평민의 이름이 시에라 벨리안트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아이린이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조사해오세요."
"아가씨."
"명령이에요. 놓치는 것 하나 없이 철저하게, 전부 다 알아 와요.”
전 약혼자에 불과한 여자가 뭐라고 뒷조사를 시키는가.
아이린은 제 머릿속을 휘젓는 번민을 무시했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이잖아요? 자칫 나쁜 여자라도 꼬였다간 불쌍하니 도와주려는 거예요."
그래, 이건 훼방이 아닌 도움이다.
아이린은 변명하며 자신을 납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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