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6화 왜 하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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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과 평민의 격차는 크다.
어쩌면 평민과 평민의 격차보다도 까마득한 것이 귀족 사이의 격차였다.
중앙 정계의 귀족쯤 되면 그야말로 천외천의 계급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일에 후환을 걱정하지 않았다.
불량배 따위가 크라운 백작가에 복수를 할 깜냥이나 있겠는가.
고로 협박하여 모두를 쫓아낸 내 방안은 성공적이었다 자평할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큰일 했다는 듯 깊이 인사하는 시녀에게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냥 말 몇 마디 한 게 다인데 무슨 수고를 했다고. 검 뽑고 장단 맞춰준 기사들이 고생했지.”
“약자를 보호하신다는 귀족의 의무를 다하신 겁니다. 의무를 알고도 행동하지 않는 이 또한 많으니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
저렇게 말하니 더 부담스럽네.
딱히 그런 의도로 개입한 게 아니라서 양심에 찔렸다.
나는 미소로 칭찬을 넘기고 자리에 앉았다.
“바로 출발하자. 이러다 늦는 거 아닐까 걱정되네.”
예정에 없던 일을 겪느라 시간이 꽤 소모되고 말았다.
유명한 부티크인 만큼 언질을 받은 시간이 있어 늦으면 나만 손해였다.
나는 빨리 가자고 마부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기다려도 마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공자님, 그것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곤란해하는 마부의 표정이 보였다.
또한 그의 뒤로 마차의 앞을 가로막고 선 한 여인이 보였다.
“아!”
마차를 가로막은 여인이 나를 발견하자 반색하며 다가오려 하였다.
“멈춰라!”
“……아니야, 오게 둬.”
나는 검을 빼 들고 응징하려는 기사들을 말렸다.
“무슨 용건이지?”
바쁜 마당에 또 시간 쓰게 생겼네.
짜증 나기는 해도 무시하고 내쫓을 수가 없었다.
“내가 분명 떠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마차를 막은 이가 시에라 벨리안트, 원작의 여주인공이기 때문이었다.
“저기, 그게요…….”
시에라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떠나는 건 아닌 것 같아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요.”
그녀가 나쁜 의도로 길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도가 어찌 됐건 내 심기는 불편해졌다.
이걸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내가 포악한 귀족이라면 이를 빌미 삼아 처벌까지 가능한 무례였다.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저 얼굴로는 무슨 짓을 하건 다 호감으로 다가올 터였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녀가 가진 마성의 매력은 저런 엉뚱함에도 황태자를 비롯한 다수의 남성들을 홀렸다.
“그래.”
물론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원하는 대로 감사 인사는 들었으니 이제 비켜줬으면 하는군.”
내 단호한 축객령에 시에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녀린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부여잡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처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줘야 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보답을…….”
“귀족의 말을 너무 우습게 알면 좋지 않을 텐데.”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도와줬으면 끝이지 왜 이렇게 질척거려.
슬슬 기사들의 눈매까지 험악해지자 시에라는 고집을 굽혔다.
“……그럼 적어도 존함만이라도 가르쳐주세요.”
“케일 알베지아. 이제 됐나?”
“네, 바쁘신 듯하니 나중에 뵙게 되면 꼭 보답해드릴……!”
허리를 너무 깊이 숙인 탓일까.
시에라의 손에서 교복이 떨어졌다.
……가지가지 하네.
내 시선이 교복에 머물고.
“잠깐 그대로 멈춰봐.”
“네……?”
나는 이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찢어졌잖아.”
내가 개입하기 직전 대머리랑 서로 힘을 주었을 때 그렇게 된 건가.
찢어진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끄응.”
크게 찢어진 건 아닌데 알아서 하라고 하고 갈까.
생각하다가도 자꾸 눈에 밟혔다.
“한 사람만 같이 태우고 가도 되겠어?”
“공자님의 뜻대로 하셔도 됩니다.”
허가는 쉽게 떨어졌다.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을 숨기고 말했다.
“타라.”
“예?”
“부티크까지 데려다주마.”
이왕 개입하게 된 거 완벽히 처리해야지.
시에라가 내 말을 이해했는지 미소와 함께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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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는 다소곳이 자리에 앉은 채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마차의 내부는 손대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만큼 화려했다.
하긴 주인 되는 귀족의 생김새에서부터 귀티가 나긴 했다.
과연 그저 그런 귀족 가문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
시에라는 안절부절못하고 손발을 꼼지락댔다.
최대한 털어냈음에도 낡은 신발 밑창에서 떨어진 흙이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내릴 때 깨끗이 닦고 나가야 하는 거 아닐까.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괜히 앉은 것만 같아 지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눈치 보지 말고 편히 있어.”
“아, 네!”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시에라는 긴장해선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꼼지락대던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던 걸까.
이런 마차를 타본 건 처음인지라 지적을 당한 게 억울하기도 했다만, 그를 쳐다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납득이 갔다.
창문에 팔꿈치를 기대고 심드렁하게 바깥을 바라보는 방만한 자세.
그 모습조차도 고귀함과 귀티가 흘렀다.
귀족.
평민인 시에라에겐 멀게만 느껴지는 이들이었다.
사족을 더하자면 귀족에겐 선입견마저 가지고 있었다.
방약무인하고 고집스러우며 제 잘난 맛에 사는 인종.
귀족의 폭거를 직접 겪어본 것은 아니긴 해도 주위 사람들에게 들어온 말에 따라 생겨난 인식이었다.
“저기,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한데 직접 마주한 귀족은 그리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곤경에 처한 절 도와주셨으면서 부티크까지 직접 데려다주시기까지 하시고.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는 자신을 도와주었다.
마차를 가로막은 제 무례를 넘어가 주었으며, 교복이 찢어진 듯하자 부티크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였다.
보답도 바라지 않고 남을 돕는 이의 심성이 나쁠 리는 없었다.
태도가 차가운 게 조금 아쉬운 점이긴 했지만 말이다.
“참, 저는 시에라 벨리안트라고 해요.”
“……알베지아 남작가의 케일이다.”
이것 봐라.
말투가 까칠할 뿐 그는 좋은 사람이 맞았다.
다만 통성명을 하게 되자 궁금한 점이 생겼다.
남작은 귀족 중에서도 그리 높지 않은 작위였다.
같은 작위라도 가문마다 차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작이 이렇게 화려한 마차를 끌고 다닐 수가 있는 건가?
시에라는 궁금했으나 입을 열진 않았다.
그냥 귀족들은 생각 이상으로 돈이 많았구나 착각하고 넘어갈 따름이었다.
“……실례되지 않으면 하나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마차가 점점 더 깊은 상권으로 향하자 시에라가 질문했다.
“혹시 목적지가 어느 부티크인지 알 수 있을까요?”
대답은 시녀로 보이는 여성이 해주었다.
“마담 레옹의 부티크입니다.”
“아, 마담 레옹의 부티크……!”
시에라는 휘둥그레진 눈을 깜빡였다.
마담 레옹의 부티크.
그 위명은 시에라도 모르지 않았다.
설마 그곳으로 가고 있을 줄이야.
동경하던 부티크로 향한다는 것에 흥분되는 한편 시에라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 죄송하지만 저는 적당한 다른 부티크에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케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마담 레옹의 부티크에 지불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시에라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고 호의를 보여주었거늘 정작 자신은 이게 뭔가.
돈이 부족한 것을 창피하게 여겨본 적은 없었거늘.
이번만큼은 얼굴이 새빨개질 만큼 민망함을 느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군.”
케일은 고개를 저었다.
“비용은 우리 쪽에서 지불할 거다. 내가 억지로 데려온 것이지 않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시에라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태도는 까칠하지만 역시 그는 나쁜 사람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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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가 갑자기 내려달라고 하길래 내심 깜짝 놀랐다.
초면에 너무 쌀쌀맞게 대한 것이 탈이 됐나 싶었는데, 돈 문제였던 덕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괜히 혼자 수선하겠다고 나서면 나만 곤란해지니 천만다행이었다.
원작에서 시에라는 해진 옷을 홀로 수선하였다.
솜씨가 좋아 척 보기에 감쪽같이 수선이 된 듯하였으나, 아마추어인 만큼 완벽하진 못했다.
따라서 점차 해져가던 교복은 아이린과의 싸움에서 이내 한계를 다다르고 말았다.
아이린은 그저 버릇을 고쳐주려고 하였을 뿐인데 시에라에게 큰 창피를 당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명백히 아이린의 의도와는 다른 사건이었다.
그마저 악녀답게 꼴 좋다며 깔깔 웃어 악명을 쌓기는 하지만…….
“그런 꼴은 못 보지.”
아이린이 쌓아갈 악명에 비하면 귀여우리만치 사소한 에피소드였다.
그러나 반대로 사소한 만큼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내가 시에라를 끝까지 도우려 한 속셈엔 그런 계산이 깔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마담 레옹의 부티크입니다.”
마침내 도착한 마담 레옹의 부티크.
가게 내부에서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맞아주었다.
“크라운 백작가에서 소개를 받고 온 케일 알베지아입니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조금만 더 늦으셨어도 아슬아슬했을 거예요. 백작가에 따로 연락을 드려야 하나 고민했지 뭐예요.”
이렇게 대놓고 언급할 정도면 늦은 게 맞았다.
제 책임임을 아는 시에라가 움찔하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정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호호, 아니에요. 이렇게 훤칠하게 생긴 신사분이시라면 그럴 수도 있죠. 원래 생긴 대로 논다고들 하잖아요?”
이게 칭찬인지 먹이는 건지.
나는 그녀를 따라 가게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여기 주문하신 물건이에요.”
교복은 현대의 물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어, 아카데미 교복.”
시에라가 교복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는지 입술이 근질근질한 표정이었다.
“자잘하게 조절할 부분도 있고 하니 시간 괜찮으시면 한 번 입어보시겠어요?”
그녀가 입을 열기 전 마담이 내게 요구했다.
기성복이 아니니만큼 필요한 절차였기에 나는 순순히 응했다.
“저쪽은 교복에 찢어진 부분이 생겨 수선이 필요한데 처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새로 안면 튼 고객님이신데 그쯤이야 해드릴 수 있죠.”
나는 안쪽 방에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어머나.”
“와.”
옷깃을 여미며 나오니 나를 본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거울로 내 모습을 확인하자 그야말로 옷이 날개였다.
“음음,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가. 따로 손볼 곳은 없는 것 같네요.”
과연 괜히 장인이 아닌 듯했다.
직접 치수를 잰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렇게 딱 맞게 만들 수가 있는 건지.
이만하면 거금을 들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쪽 영애분의 교복은 수선하는 김에 제가 손을 좀 대어보려고요.”
“그래 주시죠.”
“감, 감사합니다.”
시에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마담 레옹이 제 교복을 다듬어준다는 게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아,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가세요. 이렇게까지 시간을 뺏기엔 제가 죄송해서…….”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괜찮아.”
여기까지 와놓고 시간 아끼자며 먼저 가는 건 멋이 안 났다.
그리고 내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괜히 잘못됐다간 여태까지의 내 노력이 공염불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마담의 수선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금방 끝날 것 같던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어머나, 죄송해요. 이게 질이 씁,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장인 의식을 어쩌겠는가.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에라가 내 눈치를 봤다.
“그만 돌아가시는게…….”
“괜찮대도?”
일찍 돌아가서 할 일도 없었다.
저녁 전까지만 들어가면 되니 여유가 있었다.
딸랑딸랑!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마담이 깜짝 놀라며 시계를 곁눈질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면 다음에 찾아오겠습니다.”
“아니요, 정말 얼마 안 남았어요. 다음 손님한테는 양해를 구하도록 하죠.”
마담이 교복을 내려놓곤 찾아온 손님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직 전 예약자분의 업무가 안 끝나서요.”
“……그러죠. 마담이 바쁜 거야 잘 아니까요.”
“오호호, 고마워요. 특별히 다음엔 영애에게만 내 비밀 카탈로그를 보여드릴게요.”
“네, 기대하고 있겠어요.”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째서일까.
왠지 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케일 공자님……?”
급격한 내 표정 변화에 시에라가 걱정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케일?”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상대방 또한 내 이름을 불렀다.
“…….”
시에라와의 만남마저 우연의 산물이었다.
설마 또 예상치 못했던 만남을 가지게 될 리가…….
“……!”
……있었다.
눈을 마주한 나와 그녀는 서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린.”
“케일.”
눈앞에 내 전 약혼자.
아이린 레오나드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