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2화 아카데미 입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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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케일 알베지아는 전생의 기억이 있었다.
전생의 나는 소설을 읽는 게 취미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다만 남성향 여성향 장르를 가리지 않는, 소위 말하는 누렁이 잡식 독자였다.
여성향 로맨스 판타지?
로맨스만 주구장창 늘어지면 나도 좀 거북했겠지만, 판타지를 첨가한 로맨스다.
주면 잘도 먹었다.
……그러나 내가 그놈의 환생 트럭에 치여 죽을 줄 알았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리라.
“그때 내가 먼치킨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타고난 먼치킨 능력으로 무쌍 전개.
볼 때야 욕하지 그게 내게 해당된다면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설정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 내가 읽던 소설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어둡고 칙칙한 다크 판타지 세계관보단 낫지만, 좋다고 만족하긴 힘들었다.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난 것도 아니었으니.”
아니, 주인공이면 성별이 바뀌었을 테니 그게 더 별론가.
아무튼 나는 그렇게 소설 속에 다시 태어났다.
원작에선 한 줄 언급으로 끝났으되, 현실적으로는 기묘한 배경을 가진 조연으로 말이다.
내 가문인 알베지아 남작가는 황제의 은덕을 입어 탄생한 신흥 귀족 가문이다.
당연히 귀족의 자랑인 전통이란 희박했고, 인맥이 넓지도 못했다.
그런 알베지아 남작가에게 자랑이 있다면 풍요한 땅과 풍부한 인재였다.
가주 크레인 알베지아는 북부 야만족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 공신이다.
골칫거리를 해소해준 그가 기꺼웠던 황제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름진 남부 땅을 하사하였다.
풍요한 남부는 귀족이라면 모두가 군침을 흘리는 땅이었다.
그런 남부를 신흥 귀족에게 하사하였으니 황제가 그만큼 중히 여겼다는 뜻이었다.
또한 최전방에서 청춘을 바친 알베지아 남작은 군부와 연이 깊었다.
그에게 지휘를 받던 기사들을 수하로 거두어 기사단을 창설하니 그들의 실력은 중앙기사단과 비교될 만큼 위맹했다.
이러한 조건 덕에 알베지아 남작가는 고작 일개 신흥 귀족 세력이라기엔 과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상이 내가 환생한 이후 알게 된 내 가문에 대한 정보였다.
“책에서 읽었을 때는 이런 정보는 코빼기도 못 찾았는데.”
책 속의 내용이 아닌 진짜 사람 사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이렇지 않으면 남작가랑 공작가의 약혼이 어떻게 성사됐겠어.”
케일 알베지아 소남작은 원작 속 악녀인 아이린 레오나드 공녀의 첫 약혼자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 남작가와 공작가가 맞다.
소설에서는 의외로 그냥 넘겼는데, 이게 현실이 되니 아주 심각한 일이 되어버렸다.
귀족 간의 격의 차이는 평민과 귀족과의 차이만큼이나 심하다.
특히나 공작가라고 하면 귀족 정치계에선 누구나 굽신거릴 지엄한 위치였다.
공작가와 백작가의 결합이어도 뒷말이 나올 판에 공작가와 남작가?
이건 뭐 남작이 공작의 사생아라도 인질로 잡고 있지 않은 한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다.
그 말도 안 되는 개연성을 수정하기 위함일까.
상기했듯 기괴한 배경을 가진 남작가가 탄생하고야 말았다.
“뭐, 나야 좋긴 해.”
내 가문 잘 나간다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나.
안타깝게도 문제점은 따로 있었다.
가문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게 말이다.
“원작대로 아이린이 나랑 약혼했지.”
분명 이 세계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세계이기도 했다.
따라서 내 의견과는 무관하게 약혼이 성립되고 말았다.
“딱히 내가 파혼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나는 원작 속에서 악녀라 하여 아이린을 싫어하진 않았다.
굳이 호불호를 나누자면 좋아하는 편이었다.
……솔직히 말해 첫눈에 반했다.
속물적이긴 해도 예쁜 걸 어떡해.
아직 어려 그 까칠한 성품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점도 눈에 콩깍지가 쓰인 원인이었다.
물론 타고난 악녀라는 그녀의 설정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버티기 힘들 때도 있긴 했다.
그렇다고 내가 파혼을 고려한 적이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왔다.
원작에서도 같은 이유로 파혼이 성립되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맞다면 작가 자식은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할 악질이었다.
“후우.”
나는 답답한 심정을 한숨과 함께 날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팔락!
그새 몇 번이고 만져 때가 탄 편지는 아카데미 입학 통지서였다.
입학식이라고 적힌 날짜가 어느새 한 달 앞까지 다가왔다.
“슬슬 아슬아슬한 시간인데.”
아카데미의 위치는 제국의 중심인 수도 알트헤임이다.
알베지아 영지는 남부이니 더 늦기 전에 출발 해야 할 때였다.
“쓰읍…….”
한데 내가 왜 아직 영지에서 미적거리고 있냐 하면.
단적으로 요약해 현실도피였다.
똑똑!
주인님, 들어가도 될까요?
“어, 들어와.”
방으로 들어온 건 전속 시녀인 루나였다.
칙칙하기 짝이 없던 방안에 환한 빛이 들이치는 듯했다.
내가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을 실감한 사람 중 하나가 그녀다.
얼굴만 봐도 상쾌하고 힘이 솟는데 그럼 이게 개연성이지.
루나를 내 전속 시종으로 들인 건 십분 잘한 일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하나 기분이 풀어진 것도 잠시.
눈치를 살피는 루나의 모습에 나는 심상찮은 불안감을 느꼈다.
“가주님께서 부르세요.”
“……어쩐 일로?”
“자세히 말씀은 안 해주셨지만 화가 잔뜩 나신 듯했어요.”
대충 감이 왔다.
“아마도 그, 아카데미 건이 아닐까요?”
……올 것이 왔구나.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다만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혹여 오늘 들키지 않았어도 출발하기 전엔 말씀드렸어야 하긴 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셔? 혹시 집무실로 오라고 하셨어?”
“연무장이요.”
“……그래.”
아주 작정을 하셨구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은 주제도 모르고 기사가 되겠다며 아버지께 훈련을 받던 유년기의 편린이었다.
부상하는 기억에 따라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안색이 창백해지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괘, 괜찮으시겠어요? 차라리 제가 대신……!”
“아니야, 괜찮아. 바로 가자.”
나는 담담히 결의를 다졌다.
“설마 하나뿐인 아들인데 죽이기야 하시겠어?”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했다.
******
“세실리아.”
자신을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에 세실리아 버나드는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끝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넓은 방.
한켠에 마련된 테라스에 가녀린 실루엣이 비쳤다.
바람 따라 너울지는 푸른빛 머리카락은 해 질 녘 파도처럼 반짝였고.
시스루 소재의 잠옷으로 드러나는 아담한 어깨선과 한 줌이 안 되어 보이는 허리춤은 성당에 비치된 여신상보다도 미적이었다.
달빛 아래 자신을 돌아보는 그녀의 옆얼굴에 세실리아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아이린 레오나드.
외모만큼은 제국 제일이라 불리는 공작가의 보석.
호위기사로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세실리아마저 매번 감탄하게 되는 외모가 곧 소문의 신빙성을 증빙했다.
“준비는 잘 됐나요?”
“……아, 예.”
아이린의 외모에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세실리아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물음에 답했다.
“모든 절차에 집사의 검토를 마쳤습니다. 가주께서도 허락하셨으니 원하시는 때에 출발하시면 됩니다.”
“그럼 내일 아침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아버지께서는 제가 어서 빨리 떠나길 원하시는 듯하니.”
“……아가씨.”
“사실이잖아요. 새삼스레 기분 상할 정도의 얘기도 아니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아이린의 표정은 제 말마따나 퍽 초연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그녀가 활기찼던 시절을 아는 유일한 측근이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말한들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표정을 관리하는 세실리아에게서 등을 돌린 아이린이 말했다.
“그 남자가 마탑 입문을 거절했다면서요?”
아이린이 그 남자라고 칭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케일 알베지아,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그녀의 전 약혼자다.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듣기 싫어도 들려오더라고요. 마탑의 제안을 세 번이나 거절하다니, 제국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없었잖아요.”
아이린은 조용히 웃음을 흘렸으나 그것이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나중에 쫓겨나더라도 일단 입문하기만 하면 부와 명예가 다 딸려올 텐데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배짱을 부리는지.”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삐뚜름히 일그러졌다.
“하긴, 그러니까 주제도 모르고 제게 파혼 이야기를 꺼낸 거겠죠.”
난간을 쥔 새하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태 제가 보낸 편지에 답장 한 번 안 해주고 말이에요.”
“……아가씨, 혹시 그 얘기도 들으셨습니까?”
안 보여도 표독스러워졌을 표정이 눈에 선했다.
세실리아는 제 호위 대상의 정신 건강을 위하여 화제를 돌렸다.
“뭐죠?”
“케일 알베지아가 이프린 아카데미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
아이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렇군요.”
그러나 그녀는 곧 동요를 감추었다.
“저랑 별로 관계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참고해 두도록 하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신경 쓰여 죽겠다는 모습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숨기듯 세실리아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카데미에 입학하신다는 정보는 확실한 거죠?”
“네, 황제 폐하께서 공언하셨습니다.”
아이린의 아카데미 행이 결정된 계기다.
뜬소문 같던 이야기가 구체화 되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좋아요, 그분과 관련된 정보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빼먹지 말고 전부 알아 오도록 하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이린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번 약혼만큼은 절대 실패해선 안 되니까요.”
그녀의 눈빛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