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연방 최고 권위 과학자
* * *
“하아…….”
기숙사 속 리나의 방.
그 안에선 헬레나가 벽에 등을 기댄 채 탄식을 내뱉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속은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밝게 비추려고 했던 현실에 더욱 어두워졌다.
‘미리 알고 있었다라.’
예나의 말에 가슴 깊이 대못을 박았다.
그녀의 손에 놀아났다.
예전부터 미행하고 있던 걸 간파당했다는 그 아이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니, 지금껏 왜 따라가지 못했는지도 설명이 됐다.
알고 있는데 어찌 피하지 않겠는가.
나만 멍청하게 넘겨짚고 예나를 쫓았던 것이었다.
투욱─
헬레나는 깊은 절망감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동안 너무 자만했다.
그저 평민이라 생각하며 무시했다.
단지 예나의 순둥순둥한 외관만을 보고 별 볼 일 없는 아이라고 넘겨짚었다.
실상은 알 수조차 없는 거대한 뒷배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내가 미행하는 걸 알아차렸단 밀인가.
예나가 알아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였으니.
그녀 뒤에 있는 누군가가 나 혼자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의 소행이라고 확신했다.
도대체 누구일까.
예나는 본모습은 무엇일까.
휙, 휘익─!
오싹함에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창틀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과 황녀님이 가시기 전에 두었을 코트가 방안 물건의 전부였다.
허름한 기숙사 속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미치겠군…….”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된단 말이다.
예나와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누군가가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불안하고 의심되었기에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황가에 말할 수도 없고.’
막막한 현실.
헬레나는 개탄한 심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가문에 밝힐 수가 없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예나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황제 폐하께 직접 조사를 간청드리고 싶었지만…….
걸리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었다.
나도,
그리고 리나 님의 사관학교 생활도.
생도에 대한 사적 탐문은 걸리는 순간 엄하게 다스려지는 중대 사항이었다.
루스테트 교장이 직접 말하지 않았는가.
합동 훈련 이전, 동행을 허락받기 위한 만담 때.
“젠장…….”
헬레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욕지거리를 내질렀다.
그만큼 죄책감이 온몸을 감쌌다.
리나 님을 지키기 위해 가주님의 명령을 받고 사관학교에서 생활하는 건데, 자칫하단 나로 인해 모든 게 끝장날 수 있는 상황에 부닥쳤으니까.
‘도대체 그 아이는 뭐지.’
마른 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일반적인 생도가 아니었다.
뒷배가 심상치 않다거나 알 수 없는 힘을 가졌다는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또래의 아이가 품을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런 눈은 노년의 정치인이나 대전쟁에서 구르고 굴러 침착함을 지닌 노인들에게서만 봤었는데…….
진짜 정체가 뭐냔 말인가?
자연스레 협박하여 거래를 끌어내고 내 위협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모습은 이제 갓 1학년이 된 평민의 아이가 보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분을 위장했다기엔…….
그녀의 아버지가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가능성이 낮았다.
시골 속 순박한 소녀의 인적사항으로 둔갑하지 발각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그리 꾸밀 거 같진 않으니.
그래서, 인지 부조화가 왔다.
든든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귀족이 아니라고?
도대체 이게 뭔 어이없는 상황이냔 말인가.
타악─!
헬레나는 분에 가득 차 바닥을 내리쳤다.
‘하나도, 파악을 못한 건가.’
그녀는 손의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한탄했다.
막상 따져보니 예나에 대해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여태껏 투자했던 시간이 무의미하달까.
도대체 그 소녀가 평범한 계급인데도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을까, 그 세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나도,
단 하나도 알지 못했다.
“우선, 제안을 따르는 게 전부인가.”
허망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딱히 반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지금은 예나가 주장했던 두 가지의 부탁을 완수하고, 리나 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이었다.
때를 봐서 빈틈을 노리든가 해야 할 뿐.
‘월프에 대한 조사라고 했나.’
나머지 하나는 여태껏 취득했던 예나에 대한 자료 공개고?
문서를 바꿔치기할 생각은 없었다.
예나의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지금, 굳이 리나 님의 명망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원래 실행하려던 계획이라 위로하자.
사실 월프를 조사하고 싶었다고 사고하자.
“하아…….”
그리 정당화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답답한 속을 풀 수 있을 거 같으니.
* * *
“배고프네.”
격하게 달렸기 때문일까.
뱃속이 허전했다.
밤에 음식을 주문해야 하나?
아니면 돌아갈 때 매점에 들릴까.
터벅─ 터벅─
난 갖가지 상념에 젖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럴수록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이 시선이 가득 들어찼다.
강당을 연상케 하는 아치형 지붕.
그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외벽.
얼마나 예산을 투자했는지는 몰라도 사관학교에서 마주쳤던 어떠한 건축물보다 거대했으며 웅장했다.
순간 배고픔마저 잊게 할 정도.
“멋지군.”
난 소리 없는 박수를 치며 외관을 감상했다.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 넓적한 문 안으로 들어간다면 괴수를 대상으로 훈련을 할 수 있었으니.
저번처럼 닫혀있지도 않았기에 되돌아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늘이 가장 즐거운 날 같네.
합동 훈련 이래 제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오전과 점심엔 헬레나에,
저녁과 밤엔 괴수 대항 훈련으로 시간은 보내게 되었으니.
난 제발 기대 이하에만 미치지 말아 달라는 소망과 함께 조심스레 철문의 손잡이를 당겼다.
끼익─!
그렇게 마침내 내부를 확인한 순간,
“오…….”
자연스레 감탄사가 나왔다.
이번 프로젝트 진행은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습니다. 변이율의 증가폭이 안정된…….
하얀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로 가득했다.
철컥, 철커덕─!
복잡한 기계 장치가 이곳저곳에 있었다.
언뜻 봐도 전문적인 설비였다.
비록 과거에 봤던 과학화 장비들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시대상을 고려하면 대단한 시설이었다.
이런 정도의 단련장이 다른 국가에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 수준.
충분히 없을 수 있었다.
연방과 제국의 모든 기술의 집약체가 여기 세비르폴 훈련지, 괴수 대항 단련장이었으니까.
“무슨 일로 오셨소?”
울퉁불퉁한 몸매.
가슴에나 다다를까에 대해 의문이 드는 키.
“괴수 대항 훈련을 하러 왔습니다. 아스트라한 사관학교 소속 1학년생도, 예나 프로이드입니다.”
난 중년의 드워프 남성에게 입을 열었다.
“아, 따라오시오.”
그러자 그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길을 안내했다.
휘날리는 옷깃을 보니 연구원인 성싶었다.
다리까지 다다르는 순백의 코트를 입은 채 시설에 상주하는 이는 괴수 연구원밖에 없었으니.
뚜벅─ 뚜벅─
어쨌든 난 그의 손짓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단련장은 대단히 넓었다.
아니 지금까지의 풍경을 보면 연구소에 가깝달까, 건물의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는 듯했다.
“으음.”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시선을 이끄는 건…….
저 다리가 짧은 드워프 연구원이었지만.
단련장의 볼거리 중 하나였다.
엘프나 평범한 인간이 옷을 입은 모습은 별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유독 드워프만이 우스꽝스러웠다.
낮은 다리,
짧은 상체로 인하여.
과거 게임 속에서도 많이 봤었지만 현실에서 대면하는 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전에는 그저 그런 그래픽 덩어리라 생각했다면 지금은 실제 존재하는 종족이라 보고 있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무언가 장난감을 보는 기분이었다.
키가 작은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이쪽으로 들어가시오. 저 안에 연구소장님이 있을 테니.”
“감사합니다.”
어찌 됐든 도착한 목적지──
난 등 뒤에 사무실을 두고 이야기하는 이름 모를 드워프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수고하세요.”
그리고 그가 떠났을 땐,
“연구소장이라.”
웃음을 지우고 차분히 정면을 응시했다.
새하얀 대리석의 복도 속에서 큼지막한 나무문이 홀로 자리했다.
굳게 닫힌 입구 옆으로는 드워프의 말대로 ‘연구소장실’이라는 카드가 유리판 안에 끼워져 있었다.
기억이 맞을까.
하지만 난 저것들에 관해 관심 하나 없었다.
새하얀 벽면 속에 이런 사무실이 있든지 말든지 알게 뭔가.
다만, 저 안에 있을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선 흥미가 생겼다.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제국의 승전을 위해 필요한 인물 중 하나이니까.
직접 확인하는 게 빠르겠지.
철컥─!
난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돌렸다.
추운 복도에 서서 멍하니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 없었다.
이 문 하나만 열면 소장의 정체를 알 수가 있는데, 굳이 깊은 상념에 젖어 들 이유가 없었다.
“음? 누구인가?”
엔틱한 분위기의 사무실.
바깥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자랑하는 인테리어였다.
갈색의 탁상 위 레코드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는, 정말 고풍스러우며 산뜻한 풍경이었다.
“아스트라한 사관학교 소속 1학년입니다. 괴수 대항 단련이 가능한지 여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호오……, 처음 맞이하는 생도구먼, 허허!”
그리고 난,
스윽─
책상에 앉을 채로 호탕하게 웃는 남성을 확인하자마자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연방 최고의 과학자.
그러나 대숙청 시기에 끝이 나는 비운의 남성.
예상하고 있던 이가 맞았으니까.
“반갑네, 세르티 고트리프리고 하네.”
볼이 불그스름하게 상기됐다.
어깨를 흠칫 떨렸다.
어찌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으로 제국 이외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만난 것인데.
터억!
그렇기에 세르티가 건네는 손을 맞잡았다.
“예나 프로이드입니다.”
해맑게 웃은 채로.
키 차이가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