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결전의 날
* * *
도대체 왜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인가.
장비가 고장 난 건 자명한데, 물 밖으로 나오고 후유증 하나 없는 것인가.
캉─!
월프는 입술을 짓이기며 벽면을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견고한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을 텐데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균열과 함께 흙먼지가 떨어져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분명 작전은 성공했을 텐데……, 기절은 했어야 정상인데.”
월프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은 관리원은 눈동자를 떨었다.
전날 만남을 가졌던 골목에서.
저번과 다른 점이라면 그땐 서로가 해맑게 대화를 나눴지만, 현재는 사나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명확한 갑을관계──
월프는 주먹을 꽉 쥐며 팔을 부들거리고 있었고, 관리원은 그런 그의 행동에 고개를 조아렸다.
슈트레만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으니.
아무리 서로 간의 나이 차가 심하다고 하더라도 월프와 중년의 남성 간의 권위차는 명확했다.
……계획이 실패한 후폭풍.
냉랭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이러면 잔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
“으, 으음.”
관리원은 뺨을 긁적이며 신음을 했다.
그에겐 돈이 필요했다.
수도에서 도박을 하고 탕진해버린 자금을 복구시켜야만 했다.
물론 명색에 귀족인 만큼 생활에 지장은 없었으나, 한순간에 수 만의 데나를 잃은 허탈감이 엄청났으니.
“쯧,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 조금의 유예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마련해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타악─!
관리원의 심정은 절박했다.
그렇기에 차갑게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는 월프를 붙잡았다.
어찌 잡은 동아줄인데 이렇게 잃어버릴 순 없지 않은가
그는 위험을 부담해서라도 새로운 방도를 장만하리라 다짐하며, 애처롭게 두 눈을 빛내었다.
“흠.”
그리고──
월프는 중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얕게 웃었다.
여기서 끝내고 싶진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다짐했지 않았나?
이번 합동 훈련 속에서 예나와의 갈등의 종지부를 찍겠다고, 치욕스러운 결과를 그녀에게 선사하겠다고.
‘꼭, 복수해야지…….’
지금은 그저 주도권을 뺏기 위한 기 싸움이었을 뿐.
고로 월프는 몹시 급해 보이는 관리원과 재차 눈을 마주치고, 곧바로 웃음을 지우며 입을 열었다.
“하루를 드리겠습니다.”
시설에 들어가 훈련을 하기까지 대략 24시간이 남았기에 내린 결정.
더 이상의 여유는 줄 수 없었다.
건물에 들어가 교육을 받는다면 관리원과 만나기 힘들 터이니, 그 안에 작금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에, 에?”
“짧으면 관두도록 하죠. 물론 노력하셨던 만큼 선수금은 가지세요. 약속했던 금액은 그대로 물거품이 되는 거겠지만요.”
관리원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잘못 들었다는 듯이.
어찌 하루 만에 찾아올 수 있겠는가.
“하, 하하. 아닙니다! 당연히 그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녁에 즉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애써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잠수 장비에 손을 데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며 오랜 시간이 걸린 건데 어찌하겠는가…….
싶겠지만.
그건 월프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가 못한다고 한다면 아쉽고 짜증 나긴 하더라도 거래가 없던 셈 쳤으면 됐으니.
다만 관리원이 승낙한 이상,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우선은 미소로 화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가져온 결과를 판단하고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이 놈이 결과물을 가져오기를─
여유롭게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네.”
월프는 그렇게 관리원과 악수를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시 보는 날엔 서로가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면 좋겠군요.”
“흐흐, 당연합죠! 수고하십시오!”
──이내 관리원이 떠났을 땐,
“……역시 더럽네.”
손을 옷에 문지르며 닦았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자신과 급이 나뉜 저 이를, 오물인 양 생각했기에.
* * *
“괜찮은 거 맞지?”
“응.”
“지, 진짜 걱정했다니까…….”
에리카는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왔다.
의무실까지.
“이제 가자.”
“응!”
그리고 난 그녀를 이끌고 의무실을 나왔다.
마침내 치료가 끝났기에.
장비를 부수며 손발을 비롯한 신체 곳곳에 났던 상처를 충분히 다스린 이상,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저흰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음부터 다치지 말고.”
난 의사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방을 빠져나왔다.
곧이어 건물 밖으로 향했다.
또각─! 또각─!
와중엔 경쾌한 발걸음을 유지했다.
조금 전 가르텔의 수업 속과는 달리, 찢긴 잠수복에, 훤히 보이는 속살 때문에 조신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옷 가져와 줘서 고마워.”
“헤헤, 뭘…….”
에리카가 제복을 가져와 줬으니까.
덕분에 옷을 전부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이미 가르텔에게 외투도 건네줬고.
지금은,
거리낄 게 하나 없었다.
끼익─!
그래서 난 밖으로 나오는 순간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걸음으로 길을 거닐었다.
“벌써 초저녁이네.”
“으응, 예나 치료 엄청나게 오래 했으니까…….”
그렇게 야외를 맞이했을 땐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으니.
새초롬했던 하늘은 어디 가고, 주홍빛으로 불들은 노을이 세비르폴 훈련지에 짙게 깔린 모습이었다.
그래도 예쁘긴 하네.
사관학교에서와는 많이 다른 풍경이랄까.
더욱 밝으며, 따스했다.
아스트라한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동부 쪽에 있고, 바로 아래가 중동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그럼 난 이제 가볼게.”
“움? 예나는 기숙사로 안 가?”
난 이내 하늘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곤 에리카의 두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우음, 오늘은 혼자 수련해야겠네…….”
초롱초롱했던 그녀의 눈빛이 푹 죽었다.
마침 바람도 멎어 이리저리 휘날리던 하늘색의 머릿결도 내리앉았다.
대련에 ‘대’자를 꺼내면 기겁을 했던 전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진 반응, 난 차분히 에리카의 어깨를 맞잡았다.
“아무튼 오늘 도움은 잊지 않을게.”
“헤헤, 예나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에리카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다루기 쉽단 말이지.
아무리 실망한 기색을 내보여도 이런 격려 한 번이면 해맑음을 되찾았으니.
물론,
직전의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누가 몇 시간 동안 함께 있어 주며 간호를 해주겠는가.
난 언젠가 에리카의 호의를 마땅히 보답할 생각이었다.
가르텔에게 품었던 다짐처럼.
“그럼 가볼게.”
“응! 내일 보자, 예나!”
터벅─ 터벅─
마침내 에리카가 떠났다.
더 이상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에 깔린 땅거미와 몸을 노곤하게 하는 노을빛만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아니, 한 명 더 있나.”
난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보지 않았음에도 뒤편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기운이 풍겨왔으니까.
처음에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무형의 힘이었다면, 이젠 친근한 무언가가─
후미에서 대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리고 난 저 힘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전날에 직접 만나기까지 했는데.
……슬슬 잡아야겠지.
헬레나.
마침내 지금, 그녀를 리나의 시녀장이 아닌 미행자로서 만남을 가질 계획이었다.
이제 밝혀낼 때가 되었으니까.
하루가 남았다.
더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시설에 들어가 훈련을 받기까지 남은 건 24시간, 그 안에 저 여성과 어떻게든 끝을 맺어야 했다.
그리곤 진실한 대화를 나눠야겠지.
에리카를 보낸 게 그 때문이었다.
헬레나에게 미끼를 던지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이곳의 지리를 완전히 꿰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저기서 열심히 내 뒤를 밟고 있는 그녀를 데리고 이곳저곳 움직임으로서, 원하는 지역에 도착하도록 하는 게 가능하단 의미였다.
얼마나 매력적인 이점인가.
날파리같은 저 시녀장을 이제는 때놓고 싶었기에 총력을 다할 심산이었다.
“슬슬 움직일까.”
확고히 마음을 다졌다.
더는 고민하지 않는다.
터억─!
그렇게 난 걸음을 옮겼다.
헬레나와,얼굴을 독대할 때를 기대하며.
* * *
훈련지에 와서도 꾸준히 움직인다.
그것이 오래전부터 세웠던 신념이었으며 각오였다.
예나의 비밀을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사고를 당했다라.’
그렇기에 사소한 일 하나 놓치지 않았다.
이미 수족에게 그에 대한 자세한 전말을 캐라 요청한 상태였다.
그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일지도 모르나, 자그마한 정보 하나마저 놓치지 않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황녀님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나 자신도 쉬지 않았다.
이렇게 예나를 뒤쫓고 있지 않은가.
‘혼자서 어디론가로 향하는군…….’
헬레나는 소녀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사관학교에서의 모욕과 봉변을 여기까지 와서도 겪을 순 없었다.
그렇기에,
눈을 날카롭게 부라리며 움직였다.
타닥─!
저 아이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깎여나갔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흡!”
헬레나는 건물 사이를 날아오르며 예나를 조용히 뒤쫓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