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대규모 훈련의 서막
* * *
“요즘 기숙사 생활은 어떠신가?”
“만족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것참 다행이구려. 궁전에서만 계셨을 분의 마음에 들다니.”
은은한 에스프레소의 냄새와 달달한 생크림의 향이 겹친 집무실 속, 헬레나와 루스테트가 이따금씩 디저트를 입에 넣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달칵, 달카닥─
유리그릇에 담긴 크림을 한 움큼 퍼고 바게트에 얹어 한 입, 헬레나는 입안 가득히 퍼지는 감미로움을 즐기며 눈앞에서 실실 웃는 남성을 바라봤다.
‘이 방법이 최선이다.’
그녀는 조신하게 앉아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면서도,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훑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관학교의 모든 권한을 지닌 루스테트였다.
평소라면 예나의 뒷조사에 한창 매진해있을 때, 이처럼 집무실에 찾아와, 즐기지 않았던 사교를 향유하며 사담을 나누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렇게 해야만 황녀님과 동행할 수 있어.’
교칙대로라면 외부인은 동행하지 못하는 합동 훈련지에 가, 리나를 보필하기 위해서였다.
내버려 두기엔 위험하지 않은가.
자신은 과거의 예우를 생각해 황녀라고 부르지만, 공식적으로는 황가는 폐위되었으며 리나는 이젠 황족이 아닌 평범한 귀족에 불과했다.
여기까지 보면 뭐가 두렵냐 할 수도 있겠지만, 폐위의 사유가 황제가 대전쟁을 패배로 이끌었다고 하여 가문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황가에 적개심을 품은 자들이 많을 거야.’
성장하고 있는 제국을 꺾고, 국민들이 힘들어진 원인이 황제에게 있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니, 황녀님을 혹시 모를 불똥으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그리고 루스테트는 당장 이 사관학교에 올 수 있도록 허가해준 장본인이니, 희망을 걸어볼 만했다.
“그래서……, 곧 시작할 합동 훈련에서도 리나를 보좌하고자, 동행을 승인해달라는 거요?”
“교장님께서도 황녀가 사관학교 재학 도중에 음모에 휘말렸다는 구설에 휘말리고 싶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헬레나는 다리를 꼬고 커피를 홀짝이는 루스테트를 향해, 그녀의 갈색 단발머리가 찰랑대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과잉보호라는 질타를 받을 수 있겠으나 원래 급습이란 건 가장 마음을 놓고 있을 때 벌어지는 법이다. 미래를 누가 알까, 그저 대비하는 거지.
‘특히 예나 프로이드, 그 아이가 뭔 짓을 할지 불안해. 절대 리나님 혼자 타지에 보낼 수 없다.’
꾸우욱─
헬레나는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예나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도자기 잔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단단히 마음을 먹겠다고 천명한 지가 벌써 일주일인데 아무것도 조사하지 못했다.
그런데 리나님은 그녀에게 무슨 비밀이 있다고 확신에 찬 듯, 꾸준히 경과를 물었고, 그때마다 아무 말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실망을 표출했다.
‘뭐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마치 어미를 잃은 캥거루같은 표정을 보자니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황가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개인적인 부탁이라고 명한만큼 그럴 수 없는 노릇이고.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야 하는 난관인 건가.’
이젠 자존심을 넘어 시녀장으로서 꼭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다.
“흐음. 알겠소. 다만 엄중히 평가해야 하는 훈련이니, 생도들과의 접촉은 삼가주게. 리나 그 아이와도 접촉하는 건 자제해주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과거 폐하께서 많이 도와줬던 보답이니 편하게 생각하게나. 나 또한 리나가 별 탈 없이 지내길 원해.“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레나는 한결 편안해진 심정으로, 루스테트를 향해 직각 인사를 건네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철컥!
* * *
“에리카, 더 빨리.”
어느덧 대지를 밝히는 빛이 희미해지고, 한기가 찾아오는 저녁, 훈련하기에 무척이나 힘든 날씨였지만, 두 명의 소녀는 개의치 않고 단련을 이어갔다.
원래라면 통금 시간일 테지만, 오늘은 학교의 ‘특별한 일정’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잠시 풀어진 상태였다.
이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연습에 돌입한 거다.
탁, 타닥, 탁!
쌀쌀맞은 추위가 살결을 스쳐도, 멈추지 않고 되려 몸을 더 활발히 움직여 열을 냄으로써 대처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끈기였다. 다만,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예, 예나! 너무 빨라!”
“이렇게 해야 빠르게 성장하는 법이야.”
“으으.”
일반적인 훈련같지 않았다. 한 명은 공격을 행하고, 다른 하나는 피하고 막기에만 급급했으니까.
“그럼 다시 간다.”
그리고, 전자의 역할이 바로 나였다.
쉬익!
허공을 가로질러 주먹을 내지르자, 에리카는 몸을 비틀어 애써 피해냈다.
힘겨워 보였지만 봐주지 않았다. 난 그녀가 정신을 차릴 새 없이 온갖 방향으로 공격을 날렸다.
“으익!”
덕분에 에리카는 땀을 가득했다. 흠뻑 젖은 그녀의 목덜미와 뺨에는 머리카락과 흙먼지들이 엉겨 붙었고, 옷가지는 이곳저곳에 주름이 생겨 너저분했다.
“그, 그만. 더 이상은 못하겠어!”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체력이 바닥난 에리카는 마침내 옆구리에 주먹을 맞으면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많이 발전했네.”
난 주먹을 펴 손끝까지 끌어올렸던 마나를 진정시키고, 망사로 묶었던 머리는 홀가분하게 풀었다.
스르륵─
흑발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리 앉았다.
꽤 만족스러운 전투였다. 이젠 에리카가 한 번 맞으면 쓰러졌던 내 공격을 피하다 못해 열 합 정도는 버티게 되었다. 맷집이 조금 단단해졌달까.
이젠 웬만한 생도들은 싸움에서 이기겠지. 합동 훈련에서 좋은 동료 역할을 기대해볼 만했다.
물론, 나도 그동안 놀고 먹지 않았기에 상당한 발전을 거듭했다.
“프으으──.”
신체 깊숙한 곳에 잠재됐던 힘을 끌어올리자 상쾌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며, 온몸을 불쾌하게 적셨던 땀이 수증기로 증발하여 하늘로 사라졌다.
【 6등급 】
그에 준하는 마나가 내부에서 들끓며 나타난 부차적인 효과였다.
강제적으로 증폭시킨 것이 아니었다. 온전한 내 힘, 단련과 수련의 산물로 7이라는 숫자를 기던 과거로부터 탈피해, 한층 순결한 마나를 얻는 데 성공했다.
빨리 이 힘을 검증해보고 싶다.
“헤…….”
난 평소답지 않은 발랄함과 함께 마나가 응집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곧 있을 합동 훈련이라면 강력해진 능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월프와 대련했을 때의 재미를 또 느낄 수 있겠지.
패배한다는 근심은 가지지 않았다. 고작해야 1학년 수준의 아이들에게 질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 6등급이라는 마나로 얼마나 많은 생도들을 처치하고, 순위가 높다고 안심하고 있을 이들을 짓밟고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 지하는,
조금은 자만이 빠진 상상으로 앞날을 그려갔다.
『아아, 1학년생도 전체에게 알린다. 지금 당장 광장에 집합하도록 바란다. 곧 훈련지를 향한 이동이 있을 예정이다. 늦지 않게 집합하도록. 다시 한번 말한…….』
“에리카, 잡아.”
“응, 이제 시작이네…….”
마침내 사관학교의 침묵을 일깨우는 루스테트의 외침이 들려왔다.
“잘할 수 있을까?”
“에리카는 최선을 다해 훈련했어. 지금처럼 의욕을 잃지 않으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보일 수 있을 거야.”
“……응!”
난 방송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뻗어있던 에리카를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곤 그녀의 몸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준 뒤, 학교의 광장으로 향했다.
“가자.”
“응!”
합동 훈련, 그 훈련지로 이동을 위한 차량에 탑승하러.
* * *
쿠궁─! 쿠르르─
“준비는 잘 되었겠지?”
“적어도 실망하시진 않으실 겁니다.”
끝없이 흙길이 나 있는 아스트라한 지역의 황무지 속, 돌멩이를 밟아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는 루스테트와 가르텔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트가 고급스러운 소가죽으로 마감된 것이 값비싼 승용차같았다.
“연방과 협의하여 진행하는 훈련이니 사고는 없어야 하네. 최대한 생도들을 지켜줬으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가르텔은 한 손으로 두꺼운 서류를 잡는 한편, 반대쪽으로는 새하얀 연기를 퍼뜨리는 파이프를 받쳤다.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본다면 가르텔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제국 동부 사령관이자 교장인 루스테트와 독대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앞에서 파이프를 피워댔으니까.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잘 마무리 해야 할 텐데.’
하지만 가르텔은 남들이 부러워할 이 상황을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생도들이 다치진 않을까.
【 세비르폴 대규모 합동 훈련 계획 】
그는 긴장이 서린 듯, 콧수염을 달싹이면서 거창한 제목이 쓰인 문서 뭉치를 이리저리 훑었다.
“이번 훈련지가 해안 도시라지?”
“예, 그렇습니다.”
“매일 넓기만 한 땅덩어리만 보다가 바다가 마주할 수 있다니, 자네도 조금 기대되지 않는가? 분명 후보생들에게도 일종의 휴식이 될 테지.”
“그렇겠죠…….”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네. 언제나 그랫듯이 이번에도 별일이 없을 거야. 그냥 즐기면 돼, 허허.”
가르텔은 루스테트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등을 두들겨서야, 인상을 풀고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신입생을 대상으로 치루는 첫 훈련인 만큼 긴장되긴 했으나, 교장의 말대로 약간이지만 기대하고 있었다. 향긋한 바다내음을 맡을 수 있다는 건 고사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과연 우리 아이들이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교관으로서 호기심이 가슴을 들끓게 했다.
‘특히…….’
이번에 도맡은 후보생 중에서도,
“프으, 그런데 요즘 자네 학급은 괜찮은가?”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소문에 의하면 슈트레만 가문의 장남과 생도 하나가 싸움이 났다고 하던데, 혹시 벅찬 건 아닌가 해서 말이지.”
마침 루스테트가 지칭한 생도인 예나 프로이드, 그 몸집은 작디작으나, 잠재력은 어떤 생도보다 거대한 소녀의 행보가 무척이나 기대됐다.
“자네가 아끼던 생도라고 하지 않았나.”
“염려하실 거 없습니다. 그 아이라면 어떤 시련이라도 충분히 극복할 만한 능력을 가졌으니까요.”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군, 그래 허허!”
가르텔은 입에 시가를 물고 웃음보를 터뜨리는 교장을 바라보는 한편, 지금쯤이면 트럭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을 예나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귀족들에게 질타를 받든, 질투와 야유의 대상이 되든, 예나 프로이드는 충분히 이겨낼 만한 힘을 가졌다.
‘그 눈빛을 잊을 수 있어야지.’
그녀에게 마도전술 계획부로의 추천서를 써줬던 그때, 교관과의 개인적으로 면담을 하는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소신껏 의견을 펼친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가진다는 거지. 비록 그녀가 행정부로 가는 게 어떻겠냐라는 제안을 거절했지만,
‘볼수록 매력적인 아이야.’
실망하지 않았다. 감히 교관의 명령에 반한다는 따위의 얄팍한 분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나의 결단력에 이끌려 더욱이 관심이 커져갔다.
과연 예나가 이번 훈련에서는 어떤 면모를 보여줄까. 그리고 이 기간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까.
“크흐흐──.”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가르텔은 품 안에 챙긴 많고 많은 서류 중,
【잠수 훈련 개요】
새로운 교육과정 중 하나가 상세히 수록된 페이지를 확인하며, 어깨가 들썩이도록 속으로 껄껄거렸다.
“아, 오늘 담배 맛이 특히나 좋아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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