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데리안의 과제공지
* * *
「쟤, 쟤가 추천서를 받았다고?」
「듣기로는 사람 패는 걸 좋아하는 사이코라던데…….」
그들이 이동하느라 생긴 찰나의 조용함 속에선, 그동안 의식하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차차 귓가에 꽂혔다.
비단 1학년들의 말이 아니었다. 일 년은 일찍 들어온 선배들의 쑥덕거림도 주위에서 울렸다.
「낙하산은 아냐?」
「가르텔 교관님인데 낙하산이겠냐?」
「아무리 그래도 평민인데…….」
「야, 그 말 베르토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아. 그렇지…….」
진짜 단단히 찍혔군.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의도치 않게 사관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1학년이 됐다.
투벅─ 투벅─
크네.
연구부장과 그 아래 직책에 있는 남자, 즉 차장이 교실 중심으로 가며 내 주변을 지났을 떄, 이 곰 같은 선배의 몸집이 확실히 체감됐다.
발걸음조차 묵직한 그는, 과거 남자였던 내 몸을 감안해도 하반신 하나를 더 붙인 크기였다.
「우, 우와아.」
「꿀꺽…….」
우람한 풍채에 지레 겁을 먹는 아이들을 보면 위엄을 알 만했다.
“대부분은 알 테지만 난 이트리트, 이트리트 폰 멘하임이라고 하고 연구부장이야. 여기 옆에 있는 남자가 바로, 연구 차장 베르토 선배고.”
이트리트는 그 남자를 가리켜 베르토라고 알렸다.
연구 차장이라.
중세 시대에 태어났으면 방패를 들었을 만한 이가 탁상에 앉아 전략 전술을 집필하고 있다니. 가히 문무를 겸비한 인간상의 표본이었다.
“베르토라고 한다.”
베르토는 다른 생도는 다 제쳐두고, 곧바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예나 프로이드입니다.”
난 불현듯한 인사에 어리둥절 했지만, 맞서 통성명을 했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가르텔 교관님께 추천서를 받는 건, 웬만한 생도는 꿈도 꾸지 못할 업적이니.”
그저 근엄하고 엄중한 면모를 보였던 베르토가 처음으로 입가에 둥근 호선을 띄며 말을 이었다.
“혹여 네 신분을 빌미로 방해하는 녀석이 있으면 바로 말해라, 선배, 동급생 상관하지 말고. 특별하게 대하지 않을 거지만, 해를 당하지도 않도록 약속해주마.”
꾸드득─
제복 위로 터질 듯한 근육을 뽐내는 그가 꺼낸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지켜준다니.
생각지도 못한 호의였다. 심지어 생도들이 다 모인 이 자리에서 굳이 이런 선언을 했다는 건, 날 건들지 말라는 간접적인 경고를 보낸 셈 아닌가.
빚진 게 있나? 아니, 베르토라는 남자와 얽힌 적은 없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의도가 뭔지 아리송했지만, 일단은 그에게 허리를 숙여 행동으로 대답했다. 외견부터 든든한 사람이 선심을 쓴다는데,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지.
“이제 우리 할 일은 끝났고,, 담당관님만 오시면 되는데…….”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끝나고, 합격자도 빠짐없이 왔는지 확인도 했겠다, 이트리트는 손가락으로 반대쪽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교실 문을 바라봤다.
끼익─!
그렇게 대략 일 분이 흘렀을 때, 그녀의 바람에 따라 문이 활짝 열렸다.
“음, 빽빽하네. 다 온 건가?”
“네!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걸까, 데리안이 입에는 도넛을, 오른손엔 반쯤 태운 시가를 들고 나타났다.
“그럼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지.”
본인도 늦게 온 걸 아는지 지체하지 않았다.
타악─
그는 멋지게 등장한 뒤, 즉시 이트리트에게 명단을 넘겨받고, 부장과 차장이 서 있던 바닥으로 가,
“앞으로 3개월간 진행할 과제 설명을 말이야.”
공지를 시작했다.
*
베르토와 이트리트라, 분명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데?
『임명식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다. 각자 본인의 성 이름을 말하고, 앞으로의 포부를 밝히는 게 전부야. 그럼 뒷줄부터 차례대로 시작하…….』
데리안의 등장으로 임명식이 차차 진행되어 에리카를 포함한 타 생도들이 말담을 나눌 동안, 난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채 침묵을 유지했다.
베르토, 그리고 이트리트라는 이름이 너무나 익숙했다. 마치 과거, 이 세상을 즐겼을 적에 본 거 같은…….
“아.”
데.
설마?
멍 때리던 찰나, 기억의 단편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봤다.
분명히 저들을 봤다.
그것도 어느 이름 모를 제국의 길가나, 전쟁터가 아니라 신문에서 봤고, 이 선배들의 이름이 담긴 기사의 제목이 평범한 시사 이야기는 아니었던 점.
그리고, 이들의 이름 옆에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단어가 적혀있었던 점 등, 범상치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장검의 밤』
두 남녀는 다름 아닌, 이 사건의 희생자였다.
일종의 권력 싸움의 희생자랄까. 장검의 밤이란, 당수가 총리로 자리매김한 노동자당 내부의 파벌 전쟁이었다.
반(反)총리파와 총리파.
오랫동안 서로 애매한 관계였던 이들의 갈등이 쌓이고 쌓여, 결국 터져 제국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결과론적이지만 총리파가 승리했을 때, 반대 파벌과 관련된 거물 정치인과 몇몇 장군이 피로 대가를 치를 정도였던 만큼, 절대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으음.”
이거 참 난감하네.
그렇기에 상당히 난처했다. 어느 면으로 보자면, 과거에 내가 저들을 죽였던 주범에 가까웠으니까.
당시에 난, 총리의 편에서 방해되는 인물을 잔혹하게 처리했던 일종의 행동파였다. 그런 와중에 죽었다는 건, 내가 정리한 수많은 인간 중 하나였다는 거겠지.
이번에도 기회가 된다면 총리의 편에 서려고 했는데…….
다시금 숙청의 날이 도래한다면, 지지했던 수뇌부를 이번에도 따르며 입지를 다질 심산이었다.
그편이 훨씬 쉬웠으니까. 아무리 파벌 간의 대립이라고 해도, 판세라는 게 있는 게 마련이지 않나. 굳이 불리한 반(反)총리파에 서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연구부장과 연구차장, 저 둘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단 말이지.
“으으음…….”
“예나, 어디 아파?”
“아니 그냥 긴장돼서. 에리카는 자기소개할 준비해.”
“으, 으응!”
난 괜스레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발을 까닥이다, 옆에서 고개를 내빼는 에리카를 보곤 자세를 고쳐앉았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리적일까, 결단을 내리기엔 어려운 고민이었다.
죽이는 데 거부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내 편안한 앞날을 위해서라면 더러운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지 오래이지 않는가.
저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선택이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멤돌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트리트와 베르토가 나와 친밀감을 형성한 채 졸업했다고 가정해보자.
마도전술 계획부라는 우등생 집단의 부서에서 근무했던 만큼, 두 사람은 적어도 제국 행정부 정도의 핵심 기관에서 근무하게 될 테고,
그렇게 된다면 난 든든한 마도 장교 인맥 둘이 생기는 셈이다.
하지만 죽어버리면 쓸모없는 상상이 돼버린다는 건데, 어떻게든 과거 역사와는 다르게 이들을 살리거나, 아니면 역으로 내가 변절해야 하는 건가…….
『다음, 에리카 폰 로제힐트?』
“네!”
꽤 오랫동안 근심을 품었는지, 어느새 차례는 에리카에 당도해있었다. 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부서실 내부를 둘러봤다.
이트리트와 베르토를 제외하면, 딱히 특별한 아이는 없네.
좀 더 정확하게는 기존에 알았던 리나를 제외하면, 과거에 마주쳤던 이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월프라는 놈이 생겨난 듯, 내가 몰랐던 재능있는 아이가 있을 확률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 예나 나 떨려.”
“힘내.”
“예나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럼 이 아이만 챙겨도 충분하겠지.
「에리카 폰 로제힐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배님들!」
「아, 면접 때 웃겼던 아이구나? 만나서 반가워, 에리카. 베르토가 널 좋게 평가해주기도 했으니까 기죽지만 마.」
「저, 정말요?」
아니, 이제 어련히 잘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나.
수줍음에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던 과거에서, 당당히 가슴을 펴고 발표하는 에리카를 보며 내심 뿌듯했다. 예전보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군. 이런 외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실력적인 부문에서 말이야.
『응, 그러니까 파이팅하자! 다음은 예나 프로이드?』
끼익─
난 그렇게 미래를 기약하며, 시기적절하게 일어나 내 이름과 더불어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쳤다.
“예나, 너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어. 1학년 중에서 추천서를 받은 건 네가 유일하니까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해.”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미 데리안이 오기 전, 미리 대화가 한 번 오가서인지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그저 형식적인 격려와 응원 몇 번이 환영 인사의 전부였다.
『흐음, 드디어 끝났나? 마음 같아선 생략하고 싶었지만, 높으신 분께서 꼭 해야 한다고 하더군.』
내가 마지막 순서였는지,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데리안은 하품을 큼지막하게 하며 허리를 세웠다.
『그럼 이제부터 과제 공지를 시작할 테니 주목하도록 해라. 까먹어서 불이익을 받는 건 너희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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