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네가 왜 여기에 있어?
* * *
“이번 1학년들은 어때 보였나, 이트리트.”
기나긴 면접이 끝났다. 데리안 담당관은 업무를 보러 먼저 떠났고, 생도들은 갔다. 교실엔 직전까지 면접을 진행했던 두 명의 2학년 생도만이 남아있었다.
“음……, 꽤 나쁘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중에서도 연분홍의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은 소녀는 합격을 준 아이들이 만족스러웠는지, 무거운 의자를 치우면서도 헤실거림을 잃지 않았다.
‘기대해볼 얘들이 꽤 많았어.’
유명한 아이도 있었던 거 같은데, 과거에 황녀였다고 했나? 아무튼 눈 여겨볼 친구들이 꽤 있었다.
이는 부서를 책임지는 연구부장으로서 좋은 소식이었다.
“베르토는 누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
“음, 나 말인가.”
이트리트는 그렇게 상념을 이어나가며 몸을 돌렸다.
“아무리 무뚝뚝한 너라고 해도 제일 맘에 든 후배는 있을 거 아냐.”
그리고 뒤에서 책상을 옮기던 남성을 뻔히 바라봤다.
“리나라고 했나? 그 아이가 제일 낫다고 생각해?”
부장으로서 베르토의 의견을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웅장한 대흉근을 보면 몸 쓰기 좋아하는 장교같지만, 그도 엄연히 부서 운영을 담당하는 책임자였으니까.
그의 직책은 무려 연구부장 바로 아래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내가 황가를 싫어하는 건 알지 않나.”
“아, 그랬지? 미안…….”
“애초에 다른 녀석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
“네가?”
덜커덩─!
이트리트는 베르토의 답변에 순간 놀라 의자를 떨어뜨렸다. 그가 정말 남에게 관심을 가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베르토는 보통 남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엄격하고 철두철미하며, 근육만큼이나 매섭게 생도들을 평가하기에 1학년엔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게 평상시의 그였으니, 오늘 이변이 발생한 셈이다.
“이름이 뭔데?”
그래서 무척이나 궁금했다.
터엉─
이트리트는 청소를 멈추고, 그대로 베르토 앞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탁상을 짚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네 인정을 받을 만큼 대단한 아이가 누군지 궁금한걸.”
그의 지근거리 곁으로 가까이 가, 동그란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명 파란 머리였지…….”
끼익─
베르토는 턱을 쓸며 일어나, 면접 봤을 당시의 자리에 다가갔다. 뒤이어 난잡하게 쌓인 문서 중 하나를 꺼내, 이트리트 곁으로 돌아가며 페이지를 넘겼다.
사락, 사라락─
“아.”
“누구야, 누구야?”
“찾았군.”
대략 삼십여 초가 흐르고, 베르토는 어느 한 장의 문서에서 손을 멈췄다.
"에리카 폰 로제힐트, 이 아이다.”
그리고 해맑게 웃는 소녀의 증명사진을 가리켰다.
* * *
에리카는 행복해 보였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두 손을 팔랑거리며 날아가듯 양발을 교차하며 움직였다.
“예나, 나 합격했어! 헤헤…….”
“알아. 그 말 오늘만 네 번째인 거 같은데.”
“아, 그런가?”
정말 신났네.
이젠 귀찮아질 정도지만 오늘은 놔둬도 괜찮겠지. 언제 다시 저런 기쁨을 맛볼 수 있겠는가, 즐길 수 있을 때 충분히 즐겨놔야 후회가 없을 거다.
이론 강의를 했던 게 결정적이었어.
에리카의 후기를 듣자 하니, 담당관과 선배들이 전술에 관련한 이론 지식을 많이 물어왔다고 했다.
거기서 탈락과 합격의 갈림길이 결정됐었으리라.
“아무튼 예나! 정말 고마워!”
그 사실을 에리카도 아는지, 그녀는 끊임없이 감사를 표했다.
“친구니까,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아, 아하.”
에리카의 거하게 감동을 하기라도 한 듯, 땅바닥을 기는 거 같은 자그마한 음성으로 내 대사를 되뇌었다.
“치, 친구…….”
약간 내 의도를 오해한 성싶었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에리카는 내가 다져놓는 길을 따라오며 든든한 버팀목으로 성장하고, 난 그 버팀목을 앞으로 펼쳐질 다양한 사건들에 적재적소로 이용하는 거다.
일종의 거래였다. 물론 에리카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지만.
즐겁기도 하잖아?
물론 단순한 거래 명목 이외에도, 에리카를 가르치고 그녀가 커가는 양상을 보는 거 자체가 재밌었기에, 꾸준히 그녀를 데리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에리카의 순수함이 즐거움이라는 감각을 만드는 거 같달까.
그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하다니, 예전 삶이었으면 이 기분을 느끼지 못했겠지.
과연 앞으로는 얼마나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질까.
에리카와 함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마도 장교의 임무를 수행하고, 언젠가 터질 대전쟁에서 활약하기까지. 벌써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예나. 머, 머리끈이라든지 나중에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우린 둘도 없는 친구니까!”
“그래, 알았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리카는 싱그러운 샴푸 향을 풍기는 머리를 들이밀며, 선명한 두 눈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빨리 가자.”
“응!”
난 그녀의 작디작은 손을 꼭 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딱 맞춰 도착할 거 같네.
흙길 옆 시계는 어느새 점심시간의 끝을 달려가고 있었다.
에리카의 합격 소식이 발표되었던 어제가 지나고, 부원 임명식이 시작하는 오늘, 우리는입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전술 계획부로 가는 중이었다.
“오늘 이후로 부서실엔 못 가겠지?”
“어, 내일부터 합동 훈련이 시작될 테니까.”
“드디어구나…….”
에리카는 담당관을 비롯한 선배 생도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긴장한 모양인지, 꼭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면접에서 얼굴을 봤긴 했지만, 정식을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오랜 경험으로 노련함을 쌓은 내가 착실히 이끌어 나가야겠지.
“도착했어, 에리카.”
“으응!”
“들어가자.”
따로 준비하는 시간은 없었다. 저번처럼 부서실 앞에 도착하고, 목각판에 쓰인 【마도전술 계획부】라는 제국어를 확인한 순간, 곧바로 문손잡이를 돌렸다.
“긴장하지 마. 어차피 다 같은 생도니까.”
에리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경직된 몸짓으로 뒤따라왔다.
철컥─!
활짝 문을 열자, 전에 맡았던 에스프레소의 향기가 화악 풍겨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온 건지, 이미 합격한 아이들이 대기실로 보이는 곳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아?”
별 감정 없이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으나, 곧이어 눈에 들어온 ‘무언가’에 경직되듯 몸을 굳혔다.
의자에 도열한 합격자들 사이, 여기서 보리라고 짐작조차 하지 않은 성스러운 백발의 소녀를,
“황녀?”
“……예나 프로이드?”
대면하게 되었으니까.
* * *
얘가 왜 여깄어?
“네가 왜 거기서…….”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아, 안녕 너도 여기 부서원이구나!”
리나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내 의문을 큰소리로 내뱉으며 허공에 손가락을 치켜들고 덜덜 떨었다.
옆에서 다른 생도의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예나 프로이드, 저 당최 뭔지 모를 녀석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지금 이 문을 열고 여기에 들어왔다는 건 계획부에 합격했다는 건데, 그렇다면 하위권의 성적에 머물러있는 예나가 경쟁을 뚫어냈다는 거야?
‘아…….’
머리가 복잡하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리나는 앞뒤가 안 맞는 현실에 헛숨을 들이켰다.
‘물론 예나의 본 실력이라면 여기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그녀의 ‘공식적인’ 성적은 최하위권 아닌가. 정상적인 절차를 겪었다면, 면접도 보지 못하고 서류상으로 ‘광탈’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도대체 어떻게 가입한 거야.”
리나는 괜히 공격적으로 예나를 대하며 의구심을 지었다.
“가르텔 교관님께 추천서 받았는데.”
“아?”
그러나 그 기조로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터져 나왔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예나가 추천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건 에리카뿐이었으며, 예나도, 에리카도, 친구라곤 서로가 전부였기에 소문이 퍼질 수가 없었다.
“추, 추천서?”
"응."
리나는 예나의 순진무구한 면상을 보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저러면, 진짜 추천서를 받은 거 같잖아.’
거짓말을 한 건 아닐 테다. 거짓이라면 그녀가 꼼수를 쓰고 이 부서에 합격했다는 말인데, 슈트레만 가문의 힘조차 미치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를 조작한다?
그건 예나를 의심하기 이전, 제국의 보안망이 숭숭 뚫렸다는 거라, 다른 의미로 걱정을 해야 했다.
부서 하나 가입하겠다고 위험을 감수할 리도 없었다.
부들부들─
편법 없이 정당하게 가입했다는 건데, 나도 받지 못한 추천서를 도대체 어떻게 받은 거야, 아니 애초에 위장 생도라면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면 안 되는 거잖아.
설마 위장 생도라는 게 그동안 자신 혼자 만들어낸 망상인 걸까.
‘아냐, 그럴 리 없어.’
말이 안 돼. 그냥 날 혼란스럽게 하려는 걸 거야. 리나는 주먹을 쥐고 손톱으로 꽉 짓눌러 불안함을 겨우 가시게 했다.
‘좋게 생각하자.’
예나 프로이드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니, 몰랐던 그녀의 면면을 확인할 가능성도 늘어났다. 잘하면 결정적인 증거의 단초를 잡을 수 있어.
「헬레나. 언제쯤 자료를 줄 수 있어?」
「화, 황녀님. 조금만 기다려 주…….」
「부탁한 지 일주일이 넘…….」
「면목이 없…….」
리나는 전날의 기억 때문이라도, 포기하지 말자며 의지를 갈무리했다.
언제부턴가 헬레나는 기숙사에 있는 시간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는 어디론가 떠나 있었다. 자료를 찾지 못해 조바심이 나는 거겠지.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남의 도움만 바라선 비참한 결말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헬레나가 안 된다면 내 손으로라도, 이 지긋지긋한 실을 끊고 싶었다.
만약 예나가 진짜 생도……, 따위의 고민은 하지 않았다.
지금껏 이를 바탕으로 행동했는데, 그 신념이 깨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흐으으──.”
이제 와서 그런 고찰을 하는 건 전혀 의미 없어. 각오를 단단하게 다지는 게 현재로서 최선이야.
「예나. 우린 저기에 앉자.」
「그래.」
우선 내 앞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인 예나를 치우는 데 집중하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