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에리카의 다짐
* * *
“행정부에 다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경험이 될 텐데?”
원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가르텔은 파이프의 불씨를 털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노골적으로 언짢음을 표했다.
“제국의 몇없는 마도 장교로서 성공을 이륙하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 전 스스로 아버지처럼 멋지고 강한 군인이 되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되레 마음에도 없는 눈물을 찔끔 흘리거나 청산유수로 설득을 시도하여, 그에게 내 강한 의지를 표출했다.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 그렇게까지 울상을 지으니 어쩔 수 없군.”
그러자 가르텔도 더는 압박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도록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거기엔 그토록 원하고 있었던 봉투가 들려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난 까칠한 표면의 그것을 공손히 받았다. 반으로 접어 가슴팍 소매에 넣곤, 뒤로 물러났다.
“그래, 내일 보도록 하지.”
철컥─!
그의 인사말을 끝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후우.”
짙은 커피의 향도, 숨을 옥죄어오던 압박감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난 복도 한 켠에 기대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만족스러운 만남이었어.
아직 장관의 자리까지 오르진 않았다만, 어쨌든 행정부가 자신의 앞마당일진데 이런 딜을 건넸다라, 호의를 끌어낸다는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추천서도 성공적으로 받아냈으니까…….”
후회될 건 없다.
많은 이득을 챙겼으니까.
찌이익─!
급히 나오느라 미처 챙겨 입지 못했던 코트와 정모를 걸치면서, 품안에 감춰뒀던 갈색의 봉투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본 문서를 ‘마도전술 계획부’에 발신함]
그 안에는 제국어가 빽빽이 기술된 문서 한 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추천서를 드디어 손에 넣었다.
이제 연구부서에 가면 되겠지.
스르륵─
이마를 뒤로 쓸어올려 머리를 정돈하며 발을 뗐다. 전과 달리 복도를 걷는 움직임이 가벼웠다.
남은 건 이제 하나.
데리안과 루츠 담당관을 만나, 마도전술 계획부 가입하는 것.
또각─ 또각─
난 새파란 눈동자를 번쩍이며 계단으로 향했다.
* * *
에리카는 본관으로 들어가는 예나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양껏 오므렸다.
‘나도 힘내야지!’
자신보다 성적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노력하는 게 대단했다. 벌써 교관의 눈에 들어 추천서를 받는다고 하니, 경외심마저 들었다.
‘심지어 매일 수련을 한다고 했어.’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예나만은 달랐다. 그녀는 언제나 묵묵하게 성장을 도모했다.
한 때는 함께 놀고 싶어도 자꾸 어디론가 가는 예나가 미웠지만, 이젠 아니었다.
엄청 착한 아이란 걸 알았으니까. 그게 내가 싫어서 피하는 게 아닌, 장교로서 자세를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걸 알았기에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면모를 본받아야지.’
에리카는 언제나 진취적인 예나를 상기하며, 굳게 의욕을 다졌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평범하진 않았는데…….”
휘이잉─!
늘 푸른 잔디가 살랑대는 걸 바라보면서, 과거 강의실에서 처음으로 예나를 대면했을 적을 떠올렸다.
그녀의 도움으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시험을 통과했다. 그에 이어, 조가 편성됐지만 그 누구도 말을 안 걸어줘 뻘쭘한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기도 했다.
전부 예나의 순수하고 부드러운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겠지.
에리카는 확신했다. 비록 예나의 용모가 차갑고 어른스럽더라도, 내면만큼은 누구보다 여리다고.
까득─
그 때문에 그녀가 너무 걱정됐다.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가 같은 조원인 월프에게 위협받고 있었으니까. 에리카는 지금쯤이면 교관님과 이야기하고 있을 예나를 생각하며 입술을 곱씹었다.
‘입학식 날에 서로 싸웠다고 했지?’
평민인 생도와, 그 악랄하기로 유명한 슈트레만 가문의 자제와 싸웠다, 그리고 그 생도의 이름이 예나 프로이드라고 하더라. 소문으로 접해 알고 있는 소식이었다.
딱히 평민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슈트레만 가문과 시비가 얽혔다는 점이 우려스러웠다. 거긴 귀족 중에서도 로열, 최상위 계층이었으니까.
‘심지어 잔인하기고 한 집단이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잔인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스스럼없이 행핸다는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 만연히 퍼져있어, 예나의 안위가 불안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월프가 그녀에게 얼마나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훤히 보였으니까.
‘절대로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해.’
아무리 예나가 그 놈을 대련에서 이겼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대련’이다. 안전이 보장된 싸움이란 말이다.
월프가 진심으로 굴복시키고자 한다면, 그녀가 막아낼 리가 없었다.
꽈악─
결국 나라도 예나의 곁에 서서 든든한 보탬이 되어야 해. 에리카는 꼼지락거리던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움켜쥐곤,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예나는 내가 지켜줄 거야…….”
그게 바로 하나 뿐인 친구를 위한 도리, 도와줬던 사람에 대한 보답이다.
그렇다면 어제처럼 기숙사에서 탱자탱자 놀며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예나와 같이 힘을 키워야 한다.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타악─!
에리카는 가슴을 쭉 내밀어 심호흡하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부터 수련을!’
동시에 주변 표지판을 찾아 무작정 단련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또각, 또각!
들리는 거라곤 교관들의 간헐적인 군홧발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복도 속, 난 어느 나무 문 앞에 도착하곤, 소매를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도전술 계획부]
문 한가운데 걸려있는 표지판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안에 데리안과 루츠가 있단 말이지.
똑똑똑─!
확신이 든 순간 망설임이란 없었다. 난 마지막으로 뒷머리가 잘 정돈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곧바로 노크했다.
철컥!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부서 신청하러 왔구나?”
“네?”
그 사이로는 따스한 부서실의 온기와 함께 분홍색의 머리와 동그란 안경이 인상적인 여성이 환영했다.
“편히 들어와도 돼!”
비슷한, 아니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녀는 눈웃음으로 인사하며 안으로 손짓했다. 난 정모를 벗고, 안내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부로 진입했다.
“……따듯하네요.”
“그치?”
냉랭하기만 하던 복도와는 다른 후덕함이 온몸을 감쌌다.
「거기 작업물 좀 줄 수 있어?」
「이건 행정실에 좀 맡길게!」
「마도술을 집필한 도서가 어딨더라…….」
복도에 있느라 들리지 않았던 학생들의 수다 소리도 귓가에 꽂혔다.
“꽤 시끄럽지? 다들 논문을 쓰느라 정신 없어서 그래. 1학년 때는 모르겠지만, 우리 선배들은 제출할 게 많거든.”
안내를 돕던 여성은 부드러운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마따나, 부서실에 있는 생도 대부분은 적어도 한 학년은 높아 보였다. 그들 어깨에 달린 견장의 색이 1학년의 것은 아니었으니까.
생각해보니 지금이 중요한 시기였구나.
차작, 차자작─!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리는 선배 생도들을 바라보니 문득 떠올랐다.
매년 신입생이 입학하는 2월의 봄, 이때가 바로 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생도, 특히 졸업이 예정된 학생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라는 걸.
이번 달이 바로 연구 보고서나 논문을 완성하는 때였다. 그리고 그 수준에 따라, 향후 어디에서 근무하게 될 지 결정되는 게 통상적인 관례였다.
생도들에게 민감한 시점일 수밖에 없었다.
잘하면 제국의 수도인 베른에서 일하게 되겠지만, 반대로 낙오지에 배정당하는 참사가 일어났으니까.
뭐, 명색의 마도 장교이니 낙오지라고 불리는 쪽도 웬만한 군인은 가기 힘든 곳이지만, 어쨌든 주 무대인 베른에서 멀어지는 셈이기에 모두가 기피했다.
“그래서 조용히 따라와주면 좋겠어, 알겠지?”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리로 와주렴.”
때문인지 머리카락에 분홍빛을 머금은 그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반대손으로 날 잡아 이끌었다.
또각─ 또각─
그녀는 어느 밝은 색 계열의 문 앞에 서서야 멈춰섰다.
“저 안에 들어가면 명단이 있을 거야, 거기에 이름을 쓰면 돼.”
“네.”
“나중에 다시 봤으면 좋겠네. 꼭 합격하길 빌게!”
그리고 무릎을 팔로 받쳐 눈높이를 맞추며 마지막 당부를 전한 뒤 떠났다.
이 안이 집무실인가 보군.
난 총총걸음으로 다시금 본인의 업무를 하러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짧게 응시하다, 정면에 있는 문손잡이를 횡으로 돌렸다.
달칵─
“실례하겠습니다.”
조용했다.
또한 냉랭했다.
방음 기능이라도 내장되어 있는지, 열었던 문이 닫히자 거짓말같이 더는 바깥의 소란이 들리지 않았다.
“프으으──.”
오직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신문을 보는 남성의 숨소리만이 내부를 울렸다.
엄청난 압박감이군.
그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으며, 신문 너머로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딱히 신청하러 오는 수많은 후보생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마도전술 계획부 부원 신청서]
그냥 회의실에서 쓸 법한 책상에 놓여있는 이 종이 위에 빨리 이름이나 쓰고 가라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더욱 누군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끼익, 끼이익─!
난 여느 교관의 집무실에서나 풍기는 담배와 커피 냄새를 맡으며 발을 내디뎠다. 벌리우드 색으로 마감된 벽과, 길다란 회의실 책상을 지나,
“담당관님을 뵙습니다.”
탁자 위에 발을 꼬아 올려놓고, 시가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 이름 모를 교관 가까이에 당도했다.
“신청서는 저기에 있을 텐데, 뭐하자는 거지?”
그는 싫증이 난 표정으로 슬쩍 머리를 들어 흘겨봤다.
하지만 난 그런 짜증에도 불구하고 속으로 싱글벙글하며 남성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앞머리와 가슴팍에서 찰랑거리는 검은 십자가 훈장이라는 특징을 가진 녀석의 용모에 기쁜 내색을 비췄다.
정체가 궁금했던 놈이 다름아닌, 힌츠 폰 데리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였으니까.
저 생김새를 잊을 수 없지.
어떻게 까먹겠어. 대전쟁 이전 시기부터 함께해, 결국 승전이라는 지대한 업적을 일궈낸 일원 중 하나인데.
심지어는 과거 엔딩 직전, 내게 제국기를 넘겨줬던 당사자가 바로 데리안이었다. 나로선 기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놈이 바로 이 남자였던 것이다.
바스락─
교관이 누군지도 확인도 했겠다, 슬슬 이 긴장되는 기류도 풀 겸, 난 품에서 지체 없이 추천서를 꺼냈다.
“예나 프로이드입니다.”
“음?”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데리안에게 건넸다.
“그럼 네가…….”
차갑기만 하던 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데리안은 시가를 내려놓은 뒤, 탁자에 있던 단안경을 끼고, 포장을 뜯어 추천서를 꺼내 들었다.
“하하……, 내가 유명 인사를 미처 몰라봤구만 그래, 네가 예나 프로이드군?”
처음으로 그의 말문이 트였다.
“예, 맞습니다.”
“교관들 사이에 네 이름이 퍼져있는 건 알고 있나?”
데리안은 고급스러운 금색 체인이 달린 단안경을 고쳐 쓰며 의자를 돌렸다. 신문지만 쳐다보던 놈이 드디어 두 눈으로 내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난 그 시선에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무 경험이 몇 년인데 설마 모르겠는가. 수업 첫날에 추천서를 받았다는 점이 사관학교에 얼마나 큰 파급력을 끼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나를 아니꼽게 보는 교관도 많겠지.
군인이란 집단 자체가 보수적이기도 하고, 상당수의 교관이 귀족이니, 출신 성분이 좋지 못한 내가 추천서를 받은 부분에 반발이 만연할 터, 어떻게 보면 내가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워낙 얼굴이 궁금해서 말이야, 하하─!”
다행히 데리안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는지, 호의적인 시선으로 내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아무튼 반갑네, 예나. 자네 아버지가 프로이센 마도술을 개량했다지?”
“맞습니다.”
“대단한 부모를 두었어. 너희 부모님께서 차안하신 기술은 향후 제국의 위대한 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