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시작된 연구부서 신청
* * *
선선한 날씨임에도 한여름에 준하는 더위가 느껴졌다. 각종 수련에 이어 수십 분을 달리기까지 하니,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 무거워질 지경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빨리빨리 움직여라!』
『헉, 허억……, 예!』
다른 생도들마저 제정신이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오죽할까.
“하아, 하아.”
타오르는 갈증에 혀는 내빼고, 팔은 바닥에 닿을 듯 축 내렸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체력을 가져 최후미를 달렸다.
그래도 발을 멈추진 않았다. 체력이 고갈되었다고 하더라도, 정신력으로 꿋꿋이 몸을 움직였다.
여기서 잠깐이라도 멈칫하는 순간, 다시는 발을 떼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마지막 한 바퀴 남았다!』
난 혀를 힘껏 씹어 몽롱해져 가는 정신을 깨우고는, 도착선을 향해 나아갔다.
훈련을 병행하니 더 힘들긴 하네.
마나 등급을 올리기 위해 단련에 임한지 어느덧 사흘, 남들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만 정신을 되찾아도, 바로 체내의 마나를 방출하고, 회복되자마자 또 죽도록 마법을 쏘아 올리는데 컨디션이 좋겠는가. 매일 근육통을 달고 살지.
“하악, 하아악…….”
“수고했다, 예나. 용케도 낙오하지 않았군.”
기어이 제한 시간 이내에 결승선을 통과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파스슥─!
그리고 얼굴이 하늘을 향하도록 몸을 돌린 뒤 심호흡했다.
“파아!”
죽는 줄 알았네.
뺨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떼며 두 눈을 감았다. 폐에서는 누군가가 손으로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기절했겠지.
그 정도로 노력했다는 뜻, 난 살갗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을 들이켜며 두근거림을 진정시켰다.
“예나, 손 잡아!”
“응, 고마워.”
곧이어 에리카가 뻗은 손을 잡고, 두 발로 땅을 디뎠다.
“흐으, 흐으. 수고했어!”
“괜찮아?”
“응! 이래봬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거든.”
에라카는 말랑한 살집이 달려있는 양팔을 들어 근육을 뽐내는 포즈를 취했다.
언뜻 봐선 허당 끼가 다분해 보이는 에리카였지만, 사실은 그만한 자신감을 가져도 충분한 녀석이었다.
리나, 월프 등을 제외한 생도 대부분을 헥헥거리며 부진을 면치 못할 때쯤, 그녀는 월등한 속도로 완주를 한 뒤, 나를 기다렸던 거니까.
든든하네.
“좋은 의지야.”
“헤헤.”
난 어깨동무를 하듯 한쪽 팔로 에리카의 목을 감싸쥐곤, 하늘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웃었다.
「지, 진짜 왜 이리 힘드냐.」
「미리 운동 좀 할 걸.」
그리고 여느 때처럼 종례를 하기 위해, 생도들 사이로 들어가 줄에 맞춰섰다.
“음?”
월프?
그러자 여태껏 비어있던 옆 자리가 매워졌음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월프 폰 슈트레만이었다.
퇴원했구나.
부상 등의 이유로 훈련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종례엔 함께하는 성싶었다. 그는 전신을 에워쌌던 붕대마저 풀은 행색이었다.
확실히 여기 군의관 솜씨가 좋긴 좋아.
치아를 다시 붙인건지 월프의 치열 속 빈곳마저 메워져있었다. 이 수준이면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치유 계열의 지원형 각성자 중 하나겠지.
난 월프의 외견을 감상하며, 잠깐 동안 그를 치료했을 군의관들의 실력에 감탄하는 시간을 가졌다.
“…….”
“…….”
이내 월프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하곤 시선을 옮겼다.
죽이겠단 표정이군.
적개심이 찐득하게 묻어나왔다. 진심을 담아 면상에 주먹을 처박은 만큼, 복수심도 활활 불타오르겠지.
바뀌였으면 했는데,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쉬웠다.
저번 대련으로 월프가 나와의 격차를 체감하고, 못돼 먹은 성격을 고쳐먹길 바랬는데 무리였나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구나.
쓸데없는 존심만큼 쓸모없는 건 없는데 말이야. 어떻게든 본인이 졌다는 결과를 부정하는 건가. 저러면 언젠가 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 게 확실했다.
“쯧.”
한심하네.
하나의 군인으로서 승부에 승복하는 면모를 보여줬다면 좋으련만, 뭐 나야 좋았다. 주제를 파악 못하고 달려드는 놈을 상대하는 것처럼 즐거운 게 없었으니.
다만, 장교로서 자격을 상실한 모양새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다들 주목!』
난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가르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처럼만 하면 더 할 나위가 없다. 아무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감사합니다!』
『그래, 아무튼 공지할 사항이 하나 있으니 잘 듣도록.』
딱딱─!
그는 손가락을 맞부딪쳐 소리를 내어 이목을 집중시킨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부터 연구부서 신청이 시작되니 잘 알아보고 가입하도록. 추후 졸업 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니 충분히 고려하고 결정하도록 해라.』
이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내용은 생도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연구부서 신청, 드디어 사관학교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격이었으니까.
『부서 목록은 광장 게시판에 있으니 참고할 사람은 가도록 하고. 그럼 점심 맛있게 먹도록 해라.』
『수, 수고하셨습니다!』
가르텔은 간단명료하게 공표를 끝내고, 수업을 마쳤다.
터벅─ 터벅─
“예나, 너는 식사하고 집무실로 찾아오도록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그래. 기다리도록 하마.”
가는 길에 개인적으로 언사를 건네는 거까지 잊지 않았다.
「넌 어디 갈 거야?」
「괴수운용 연구부나 갈까…….」
「같이 신청하러 가자!」
직전의 공표가 영향을 끼쳤는지, 식당으로 향하는 생도들의 대화 주제는 거의 대부분 연구 부서였다.
「하하, 리나는 결정했어?」
「대충.」
그 중에는 저번 대련 이후로 한 번도 대화를 청하지 않은 리나도, 변함없이 그녀에게 관심을 표하는 월프도 포함됐다.
딱히 ‘연구부서가 뭐야?’ 와 같이 충격을 받은 이는 업었다. 생도들이 대강 알고 있는 정보였으니까.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가 드문드문 퍼진 거겠지.
“예나! 가자.”
“그래.”
터벅─ 터벅─
난 멀어져 가는 생도들의 뒷모습을 확인하면서, 손을 잡아 이끄는 에리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예나는 뭐하고 싶어?”
“마도 전술 계획부.”
“거, 거기 엄청 유명한 곳 아니야?”
“교관님께서 추천서를 써주신다고 하셨어.”
방금 전 가르텔과의 대화가 그에 관해서였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뒷말을 삼켰다.
“역시 대단하구나, 예나는…….”
에리카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돌려가며 말하다, 내 말을 듣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여러 번 꼬았던 머릿결을 힘없이 풀었다.
“에리카는 어디 갈 계획인데?”
“나, 난…….”
난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를 바라봤다. 연구부서는 추후 근무지에 대해서도 큰 결정을 하니, 내심 같은 부서를 이야기하길 고대했다.
이젠 진정한 동료 아닌가.
이미 에리카에 대해 상당한 신뢰감을 가진 지 오래, 함께 있으면서 그녀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고 싶었다.
당연히 지금 세상에는 없을 훈련법들로 말이다. 비록 그녀보다 육체적인 능력치가 떨어지지만, 이론은 누구보다 박식했기 때문에 문제없었다.
“에리카는 능력도 나쁘지 않고 꾸준히 노력도 하니까 원하는 부서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자신감을 가져봐.”
난 괜히 시무룩해 보이는 에리카에게 몸을 기울여 눈웃음을 지었다.
“으응.”
“빨리 식사하러 가자.”
그녀의 따듯한 손을 꼭 맞잡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가르텔과의 면담 때문에 음식 자체를 적게 받았으며, 더구나 게시판 부서 목록을 보겠답시고 많은 생도들이 식당조차 오지 않았으니까.
까드득─
난 후식으로 나온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평소보다 인적이 드문 광장을 거닐었다.
“예나는 가르텔 교관님께 간다고 했지?”
“응, 오늘 바로 신청하려고.”
“역시 그렇겠지…….”
그렇게 달콤한 설탕 덩어리가 전부 녹아내리자, 언제나처럼 옆을 지켜주는 에리카에게 말을 건넸다.
슬슬 가봐야지.
오늘 추천서를 받는 김에 부서 신청까지 끝낼 계획이었다. 맘 편하게 지금 끝내야지. 괜히 미루다가 매일하는 수련 일정에 차질을 빚기 싫었다.
“이제 첫 날일 뿐이니까,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 아직 시간은 많잖아?”
“그래야겠다…….”
“그럼 난 가볼게. 내일 보자.”
“응, 잘 가!”
에리카는 토끼같이 몽글몽글한 눈망울로 두 팔을 흔들며 배웅했다. 난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녀에게 맞인사를 하곤,
끼익, 덜커덩─!
그대로 사관학교 건물 본관 안으로 향했다.
【 본관 】
대부분의 교관의 집무실이 있는 구역임과 동시에 연구부서가 있는 곳이었다. 쉽게 말해 아스트라한 사관학교의 핵심을 이루는 공간이었다.
따라 예를 갖춰야 했다.
난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벗었던 정모를 바로 썼다. 풀고 있던 셔츠의 단추는 끝까지 채워 단정함을 갖췄다.
또각─! 또각─!
제복의 주름까지 펴서야, 회색의 대리석 바닥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빌헬름 가르텔.
그의 집무실로.
* * *